# 285
귀환 마교관
285화
통로 끝에 다다르니 난간 아래로 펼쳐진 공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동의 삼 층 정도 되는 높이였다.
매설란은 몸을 낮추고 공동 안쪽을 바라보았다.
횃불이 둥근 벽을 따라서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공동 한가운데에는 언뜻 연못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연못이 아니라 커다란 그릇 같은 구조물이었다.
놀랍게도 그 구조물 안에는 온통 핏물로 가득했다.
때문에 피비린내가 공동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것들은 신도들인가?’
커다란 그릇을 둘러싼 사람들.
그들은 새하얀 망토를 머리에서부터 덮어쓰고 있었는데, 뭔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매설란은 왠지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또한 바닥에는 그릇을 중심으로 기괴한 문양의 글자가 파문처럼 번져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의식이지? 저 피는 인신 공양을 하면서 생긴 건가?’
그렇다면 저 큰 그릇에 모여 있는 피가 전부 사람의 것이란 말이다.
저렇게 많은 양의 피가 모이려면 아마 수십 명을 죽인 것이리라.
‘개 같은 놈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저 미친놈들을 단칼에 쓸어 버리고 싶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로 보면 무공이 특별히 강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의식을 치르느라 모인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기분을 더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순한 기운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었고, 흔한 사파의 무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도 또 달랐다.
‘우선은 여길 벗어나자.’
녀석들이 당장 뭔가를 하는 것 같지 않으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빼내는 것이 우선이리라.
그런데 그녀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아래쪽에서 하얀 망토를 걸친 신도 두 명이 한쪽의 커다란 철문으로 다가가더니 잠금 장치를 풀고 여는 것이 아닌가?
구구구구구구….궁!
육중한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곳에서는 뜻밖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아이들…!’
매설란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문이 열린 통로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였다.
한데 그들 모두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대략 마흔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저 아이들을 왜 여기에…? 도대체 이것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매설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왠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등장하자 그릇을 둘러싸고 묘한 말을 웅얼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묘한 공명음을 일으키면서 공동이 웅웅 울렸다.
마치 공기마저 떨리는 듯했다.
다음 순간,
부글…!
‘조금 전에 분명히…!’
매설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릇에 가득 담긴 핏물에서 뭔가 불쑥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신도들이 아예 양팔을 들어 올린 채로 이리저리 흔들면서 절규하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대열을 갖춰 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신도들의 의식이 끝났다.
고막을 쩌렁쩌렁 울려대던 그 기괴한 울림도 잠잠해졌다.
신도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곧 아이들이 나왔던 철문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육중한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공동 안에는 여전히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밖에 없었다.
잠시 후,
구르르륵! 부그르르…!
“……!”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거대한 그릇의 핏물에서 뭔가가 불룩 솟아오른 것이다.
‘맙소사…! 저, 저게 뭐야?’
마치 연체동물처럼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괴생명체!
달팽이의 몸처럼 흐늘거리는 그것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우욱…!”
매설란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가렸다.
지독한 냄새!
숨을 쉬기 힘들 만큼 악취를 풍기는 녀석은 마치 인간의 뇌를 닮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뇌의 아래쪽에는 수십 가닥의 촉수가 다리처럼 이어져서 흐느적거렸고, 그 가운데에 쩍 벌어진 곳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것이 이빨처럼 자라나 있어서 입을 연상케 했다.
마물의 크기는 웬만한 집채만 했다.
단언컨대, 저렇게 흉측한 괴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때문에 매설란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초현실적인 괴물의 모습과 달리, 전신에 음습해 오는 감각은 너무나 생생한 것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매설란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릇 밖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은 그 흉측한 괴물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칠만도 하건대, 아이들은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기괴한 마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설마… 저 아이들이…?’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리고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괴한 마물은 흐느적거리며 핏물을 벗어나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틀림없어! 저 아이들이 제물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신도들은 여인들을 죽여서 저 마물을 소환했고, 이젠 아이들을 저 마물의 먹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다.
저런 마물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도 오지 않지만, 이대로 아이들이 제물이 되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매설란이 난간을 짚고 몸을 던지려고 할 때였다.
‘기척…!’
그녀가 얼른 돌아서며 날아드는 손을 쳐냈다.
탁!
‘당신은…!’
매설란이 눈을 부릅뜨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마주쳤던 바로 청면의 노인이었다.
조용히 혈을 점해서 매설란을 재우려던 청면인은 내심 혀를 차고는 입술로 검지를 가져갔다.
[조용히.]
매설란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여기서 떠들면 너도 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감히 저 마물을 상대로 싸울 생각을 했군.]
[저 마물의 정체는 뭐지?]
매설란이 쏘아붙이듯 묻자, 청면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오로지 존야께서만 알고 계시겠지.]
[존야…? 그게 누구지?]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경고하건대 여기서 소란을 피워 봐야 서로에게 좋을 건 없다.]
청면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는 마물이 이쪽을 의식할까 봐 극도로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마물은 점점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저 아이들을 마물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거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물은 소환되고 나서 바로 폭주해 버릴 테니까.]
[소환…?]
[잡담은 여기까지. 어서 자리를 피하자니까.]
그때였다.
마물의 촉수 하나가 흐느적거리며 아이 한 명을 옭아매더니 휙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곧이어 마물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그 아이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다른 촉수들은 밥상처럼 차려진 아이들을 하나씩 옭아매며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를 본 매설란이 경악하면서 반사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헛! 안 돼!”
“이런, 미친…!”
동시에 청면인의 표정이 확 굳었다.
매설란이 마물 앞에서 절대로 해선 안 될 행동을 한 것이다.
마물이 포식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어떠한 자극도 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건만!
아니나 다를까, 마물이 꿈틀거리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곧이어,
슈우우우욱!
촉수가 늘어나면서 매설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청면인과 매설란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물러났다.
꽈아앙!
촉수가 통로 끝을 때리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크욱!”
“으윽!”
청면인과 매설란이 비틀거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뭐가 이렇게 빨라?’
매설란이 놀란 눈으로 마물을 바라보는데, 녀석은 잔뜩 화가 난 것인지 촉수로 연신 바닥을 땅땅 때려댔다.
그러더니,
쉬아아아아악!
투두두두둑!
“허억!”
매설란이 입을 딱 벌리고는 헛바람을 삼키고 말았다.
빠른 속도로 휘둘러진 마물의 촉수가 그대로 아이들을 후려치면서 온몸을 찢어발긴 것이다.
육체가 분리된 아이들의 몸뚱이가 여기저기 날아가면서 나뒹굴었고, 사방의 벽에 피가 잔뜩 튀었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매설란은 분노보다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뭐야?’
“제길! 멍청한 년이…!”
청면인이 욕지거리를 뱉더니 곧 바닥을 차고 통로를 따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매설란이 벌떡 일어나는데,
쉬이이이이익!
이번에도 마물이 촉수를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헉!”
매설란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몸을 굴렸다.
콰다앙!
촉수가 통로 끝을 다시 한 번 때리자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물은 이제 제물을 포식하는 일에 더 이상 흥미가 없는 듯했다.
단지 자신의 포식을 방해한 인간에게 어떻게든 응징을 가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쉬이잇!
다시 촉수가 날아들었다.
매설란이 얼른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쌍장을 뻗었다.
퍼엉!
“꺄아악!”
촉수와 정면으로 부딪친 그녀는 그대로 통로를 따라 한참이나 튕겨 나갔다.
호신강기를 일으켰음에도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이 따랐다.
‘뭐가 이렇게 강한 거야!’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쪽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서 통로 끝이 차단됐다.
‘우선 여길 빠져나가자!’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심 피눈물이 흘렀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저 마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매장해 버려만 했다.
그녀가 곧 통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꾸웅…! 꾸드드득!
공동 안쪽에서는 마물이 벽을 부수는 것인지 연신 충격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
쾅!
무인 하나가 튕기듯 날아가더니 벽에 처박히면서 그대로 의식을 잃어 버렸다.
일권을 내지른 곡보옥이 히죽 웃으며 손을 털었다.
“뭐, 식은 죽 먹기군. 사파 녀석들은 왜 이런 것들을 상대로 피해까지 입었나 몰라.”
마침 바로 뒤에서 등을 지고 싸우던 백공보는 천신교도의 양팔을 잡더니 그대로 손을 펼치며 찢어버렸다.
부우욱!
“크아아악!”
몸이 찢어진 천신교도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백공보가 손을 털고는 코웃음을 쳤다.
“땅 짚고 헤엄치기군. 정파 놈들은 왜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도망치다가 국주까지 납치 됐나 몰라.”
“이익…!”
곡보옥이 이를 빠득 갈고는 자신들을 에워싼 천신교도들을 보았다.
그들은 사비강의 작전에 따라 북측에서 침투했다.
침투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경계를 서는 자들이 일전에 천멸대와 싸운 자들에 비해 약한 데다 머릿수도 적었기 때문이다.
한데 안으로 들어오니 예상보다 많은 신도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면서 대응하는 게 아닌가?
머릿수로 따지면 확실히 열세인 상황.
하지만 그보다 더 곡보옥을 기분 나쁘게 한 것은 방금 전 백공보가 한 말이었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약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조직명이 신생조라지? 무공이 신생아 수준이라는 건가?”
“윽…!”
“뭐야? 정말인가보네? 하하하!”
정곡을 찔린 백공보가 이를 빠득 갈고는 물었다.
“그러는 네놈들은 조직명이 뭐냐?”
“우리는…”
곡보옥이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편의상 ‘천멸대’라고 부르긴 하지만 정식 명칭은 차마 입에 올리기가 그렇다.
그러는 사이 마침 신도 하나가 곡보옥을 향해 몸을 날려 왔다.
찰나,
쉬컥!
한 줄기 섬광이 스쳐 가더니 신도의 옆구리가 절반이나 베인 채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곡보옥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뽑아 든 채로 서 있었다.
그가 곡보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 우리가 그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라고 왜 소리치지 못하느냐?”
“아…”
곡보옥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런 명칭을 말하지 말라고요!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의 몫입니까!’
반면 정식 명칭을 처음 들은 백공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