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81화 (281/670)

# 281

귀환 마교관

281화

단리정은 높은 나뭇가지 위에 꼿꼿하게 선 채로 관제묘 인근을 살폈다.

벌써 해가 저물 무렵이 다 되었지만 매설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 중에 마침 관제묘 앞으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은시 지단의 무인들이 나타났군.”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연우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몇 명이나 되지?”

“많아. 서른 명이 넘어.”

“국주님은?”

“안 보여.”

단리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타났어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났다.

아무래도 매설란이 협곡을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득 후회가 됐다.

‘만약 그때 같이 남았더라면…’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대주의 자리는 언제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그랬다면 매설란 뿐만 아니라 천멸대원 모두가 위험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연우경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국주님은 나타나지 않고, 지단의 무인들만 나타났다라….”

“아무래도 국주님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좋지 않은 상황이군.”

“하지만 국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실 거야. 우리가 구해야지.”

두 사람은 나직이 대화를 나누다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나무 아래에는 천멸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 됐어?”

염자량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단리정이 대원들을 둘러보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추측한 바를 전했다.

“국주님이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로 봐서는 협곡에서 놈들에게 당한 것 같다.”

“젠장! 우리만 먼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자책보다는 대책을 생각해야지.”

“하지만 지단이 배신을 한 거라면 당장 그쪽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목단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리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방금 지단의 무인들이 관제묘 인근을 살피고 돌아갔어. 아마도 우리를 찾는 거겠지. 오래 머물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우리 위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그럼 이제 어쩌지?”

목단화의 말에 곡보옥이 주먹을 손바닥에 마주치며 소리쳤다.

“어쩌긴 뭘 어째? 당장이라도 가서 국주님을 구해야지!”

“섣부르게 행동할 일은 아냐. 국주님이 계실 때도 우리가 놈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천신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해.”

연우경이었다.

곡보옥이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정도맹으로 서신을 보내서 상황을 알리고 지원 요청을 하는 게 어때?”

조문탁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곡보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쳤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러는 사이 그 녀석들이 놀고만 있겠어? 당장 국주님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우린 손가락만 빨고 있으라고?”

결국 천멸대원들이 입을 다물고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긴, 정도맹의 지단주가 배신을 했다면 말 다한 것이 아닌가?

이곳은 더 이상 정도맹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어쩌면 천신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곳일지도 모르겠어.”

능소소가 양팔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감찰총국이 신설되고 나서 천멸대가 만들어진 후 오늘 같은 위기는 처음이었다.

더 늦기 전에 매설란을 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의 전력으로는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정도맹의 지원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이럴 때 사비강 교관님이 계셨더라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

한참이 지나서야 단리정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진 않다.”

“뭔데?”

곡보옥이 다그치듯 물었다.

다른 대원들의 시선 역시 대주, 단리정에게 향했다.

단리정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혈사련으로 가는 거다.”

“뭐?”

“혈사련으로?”

천멸대원들이 저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단리정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맹의 감찰대가 혈사련의 도움을 받겠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세상이 비웃을 일이 아니겠나?

단리정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선 혈사련의 응천 분타가 제일 가깝다. 다행히 혈사련은 지금 본맹에 협조적이니 운이 좋다면 지원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녀석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그 녀석들로서는 우리를 돕지 않아도 그만이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 그리고 천신교는 이미 혈사련과 한바탕 마찰을 일으켰으니,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그러자 곡보옥이 버럭 소리쳤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사파 놈들에게 손을 벌리는 건 체면이 아니잖아!”

“지금 체면치레를 할 때가 아냐. 국주님부터 구해야지.”

의외로 곡보옥에게 반박한 사람은 연우경이었다.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가 혈사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에 찬성하니, 다른 대원들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설마 국주님보다 우리 체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목단화까지 나서며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이쯤 되자 곡보옥도 더 이상 반박할 수는 없었다.

단리정이 대원들을 훑어보며 못을 박았다.

“좋아. 그럼 이 길로 혈사련 응천 분타를 찾아가도록 한다.”

천멸대원들이 저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이게 대체….”

노회군은 뺨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광풍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처음에는 광풍대주가 방심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사비강은 광풍대의 진법을 교묘하게 흩트려 놓았다.

그의 보법은 기상천외했다.

아니, 그걸 보법이라고 할 수는 있을까?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너무 빨라서 움직이는 과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정말이지 귀신처럼 신출귀몰했다.

사실 그건 사비강이 블링크 마법을 썼기 때문이었지만, 노회군이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미러 이미지 마법까지 곁들였으니, 노회군이 볼 때는 영락없는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술법으로만 보였다.

‘대, 대단한 자였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무모한 도발은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제길…!’

노회군이 내심 욕지거리를 뱉으며 마당에 널브러진 광풍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사비강은 검을 뽑아 들었지만, 단 한 차례도 살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베르타스를 마치 몽둥이처럼 사용했다.

검의 옆면으로 광풍대원들을 후려친 것이다.

그 덕에 광풍대 전원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굉장히 수치스러운 상황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끄으윽.”

“윽… 내 다리…!”

바닥에 널브러진 광풍대원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쉽게 일어나질 못하자, 사비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노회군을 돌아보았다.

“흐음. 워낙 간청하기에 한 수 베풀어 줄까 했더니… 이래서야 더 이상 가르쳐 주기도 어렵겠군.”

“이익…!”

노회군이 이를 빠득 갈았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광풍대는 사비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노회군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짝짝짝.

“역시 대단하오. 내 교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대단할 줄은 몰랐소. 과연 명불허전이오. 교관의 무위에 감탄했소이다.”

“별 말씀을.”

사비강이 노골적으로 조소를 지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노회군은 내심 배알이 뒤틀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마 광풍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요. 한 수 가르쳐 줘서 고맙소.”

“나야말로 엄청난 학구열에 감탄했소. 저렇게 온몸을 던져 가며 배우려는 의지가 가득하니 광풍대는 앞으로 나날이 발전할 것 같소.”

“허허. 과찬이오. 아직은 갈 길이 먼 녀석들이라오.”

“하지만 난 저들을 보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됐소. 내가 그동안 너무 안주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노회군은 사비강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한데 이어진 사비강의 말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해서 말인데 나 또한 분타주께 부탁드리겠소.”

“뭘 말이오?”

“내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사비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잠시 벙 찐 표정을 짓던 노회군이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사 교관께서는 아주 재미있는 농을 할 줄 아시는군. 나는….”

“농이 아니오. 천상궁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응천 분타주의 고강한 무위를 직접 겪어 보고 내 부족한 부분을 다듬고 싶어서 하는 말이오.”

“허허, 거참. 난 별 볼일 없는 늙은이일 뿐이라오. 누굴 가르칠만한 재주가 없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노회군이 은근슬쩍 물러나며 걸음을 돌렸다.

한데 이번에는 구경하러 모여든 신생조원들이 그의 퇴로를 막아서는 게 아닌가?

“뭐하는 건가?”

노회군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자 신생조원들이 저마다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또한 두 분의 대련을 보며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분타주께서 보여주시는 무공은 저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백공보에 이어 방각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끄음!’

노회군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다?’

이젠 조금 전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

광풍대의 무리한 부탁을 사비강이 들어 준 만큼, 노회군은 이 상황을 빠져나갈 명분이 없었다.

그때 지켜만 보던 맹가숙이 방점을 찍었다.

“아니면 설마 분타주께서는 본조의 교관님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나직하고도 정중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분명한 시비조였다.

노회군이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하자, 이번엔 적무린이 나섰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뭐, 뭐가 말이오?”

“사 교관님이 광풍대를 상대로 한 수 가르침을 내렸으니, 이번에는 분타주께서 신생조를 상대로 한 수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는 거지요.”

“그것도 좋습니다!”

백공보가 두 주먹을 쾅쾅 부딪치며 히죽 웃었다.

노회군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나더러 이 개망나니들을 상대하란 말인가!’

상황이 엉뚱하게 흐르자, 노회군은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그래도 여러 사람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권위 있는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스르르릉.

노회군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돌아섰다.

그가 선택한 상대는 사비강이었다.

“사 교관, 뜻이 정 그렇다면 한 수 부탁드리겠소.”

“나야말로.”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두 사람이 짤막한 예를 갖춘 후 서서히 기수식을 취해 갔다.

‘끄음…! 역시 보통이 아니군!’

단지 마주 선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엄청나게 다가온다.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검을 내찌를 것만 같은 위압감.

이건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저 요상한 검신이 자신의 목을 뚫어 버릴 것만 같은 현실감은 극도의 공포를 이끌어낸다.

‘설마 기를 의념(疑念)으로 승화시키는 단계에 이르렀을 줄이야…!’

다시 한 번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한다.

이길 수는 없더라도 호각을 이루는 분위기는 만들어야 하리라.

그리고 적당한 순간에 검을 거두고 물러난다면 체면은 챙길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선공을 양보할 수는 없지!’

생각을 마친 노회군이 바닥을 찼다.

타앗!

쉬이이잇!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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