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귀환 마교관
279화
매설란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 땀은 핏물과 뒤섞여 비릿한 향을 풍겼다.
‘어째서 이런 일이…!’
매설란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천멸대원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그에 반해 복면을 쓴 자들은 끝없이 증원이 되면서 기세를 이어 갔다.
매설란 뒤에서 사방을 경계하며 서 있는 천멸대원들이 저마다 날카로운 기도를 드러내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지쳐 있다는 것쯤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단리정이 전음을 보내 왔다.
[국주님. 아무래도 은시 지단주가 배신한 모양입니다.]
매설란은 미간을 구긴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은시 지단이 이렇게 막장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어!’
하지만 이미 후회해 봐야 늦은 일이다.
그녀가 이곳, 의랑촌으로 천멸대를 이끌고 온 것은 사비강이 보내 준 정보를 입수한 다음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심상찮은 사이비 종교의 태동이 보이고 있으며, 현재 중원 곳곳에서 일어나는 납치 사건들이 그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녀는 직접 천멸대를 이끌고 의랑촌 인근인 은시 지단을 방문한 것이다.
은시 지단주 오재상(吳宰相)은 천신교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몇 차례 혈사련의 분타와 마찰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 듯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좋은 일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놈들이 알아서 응천 분타를 압박하고 있으니, 우리 지단이 할 일이 오히려 줄어든 셈이지 뭡니까? 하하하.”
오재상은 그러다가 둘이 공멸하거나, 어느 한 쪽이 사멸하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지단주로서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태도라고 여겼다.
다만 그는 천신교가 중원 곳곳에서 납치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매설란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오재상은 굉장히 놀라는 듯했다.
“설마 그럼 지금 중원에서 벌어지는 납치 사건이 전부 천신교와 관련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래요. 그래서 오늘 밤 나는 천멸대를 이끌고 의랑촌의 장원을 찾아가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다고 몸을 사릴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부디 조심하십시오. 필요한 게 있다면 지단에서도 지원하겠습니다.”
“아뇨.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발각되기만 쉬워질 거예요. 천멸대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설란은 오재상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한데….
‘그 망할 지단주가 정보를 흘린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지.’
장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을 줄이야.
뜻밖의 전투를 벌이면서 처절하게 싸웠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지칠 대로 지친 천멸대는 복면인들로 완전히 포위된 것이 아닌가?
매설란이 복면인들을 날카롭게 훑어보다가 물었다.
“네놈들 정체가 뭐냐?”
“그걸 밝힐 것 같으면 복면을 쓰지도 않았겠지.”
복면인 중 한 명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매설란이 다시 물었다.
“천신교도들인가?”
“글쎄…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군.”
“이곳이 정도맹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하하하! 그걸 누가 정했다는 건가? 하늘이 정한 것인가? 땅이 정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너희들 멋대로?”
매설란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사실 지금의 대화가 의미 없다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자꾸 대화를 유도해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거나 빈틈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기에는 천멸대의 기력이 너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복면인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천멸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매설란이 단리정을 향해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정면 싸움은 위험하겠어. 신호를 주면 길을 뚫어라. 생로는 대주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
단리정이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황을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이 어둠 속에서 적들의 기세와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단리정이 유일했다.
매설란은 다시 조문탁을 향해 지시했다.
[단리 대주가 생로를 뚫을 거다. 그 즉시 벌떼를 부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간의 수련으로 조문탁은 하루에 두 번 정도는 검은 벌집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이미 한 번 검은 벌집을 사용했기에 두 번째만큼은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짧은 시간에 지시를 끝마친 매설란이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을 향해 물었다.
“납치한 아녀자와 아이들로 뭘 할 생각이지?”
“대업(大業)의 기초를 닦을 생각이다.”
“그 대업이 뭔지를 묻는 거야.”
“훗,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라. 네년도 곧 알게 될…!”
파앗!
그 순간, 매설란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복면인은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에 당황했다.
“이 건방진…!”
복면인이 얼른 칼을 내리쳤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찰나,
“지금이다!”
매설란이 버럭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패애앵!
쒸쒸쒸에에엑!
세 자루의 화살이 북동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화살을 재고 시위를 당긴 후 놓을 때까지의 동작이 그야말로 바람처럼 빨랐다.
푸푸푹!
“크억!”
복면인 셋이 쓰러지자, 적들은 크게 당황해서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만큼 지친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힘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것들이 사태 파악을 못하는구나!”
“뒈져라!”
복면인들이 일시에 천멸대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하아앗!”
조문탁이 기합성을 터뜨리자,
촤라라라라라락!
그의 허리띠에 박혀 있던 수많은 돌기들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아닌가?
푹푹! 푸푸푹! 타탕!
검은 벌떼에 쏘인 복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였다.
이제는 몸을 빼내고 달린다.
“뛰엇!”
단리정이 명을 내리자마자, 천멸대는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처음 단리정이 화살을 날렸던 곳.
매설란이 얼른 상대방에게 일장을 먹이고는 돌아섰다.
타닷!
“저 잡것들을 잡아라!”
매설란에게 떠밀린 수장 복면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매설란과 천멸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단리정이 달아난 방향에는 의량협곡이 있었다.
의랑협곡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이었는데, 미로처럼 갈림길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때문에 다수의 적들을 따돌리기에는 이보다 좋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들의 생각보다 복면인들의 무공 수위가 강했다.
조문탁이 검은 벌집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가 예상 밖으로 많았던 것.
‘설마 저들이 사용했던 건…?’
분명 조문탁이 검은 벌집을 사용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근거리의 적들은 대다수 절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뒤쪽에 있던 복면인들은 대부분 검은 벌집을 막아냈다.
호신강기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단순히 호신강기가 아닐 것 같았다.
뭔가….
‘실드와 비슷한 느낌이었어!’
실드는 사비강이 마계에서 익혀 온 기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들이 실드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일까?
‘내가 잘못 봤나?’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추격자들과의 거리가 조금 좁혀지고 말았다.
“자량!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매설란이 소리치자, 염자량이 얼른 뒤로 빠지며 대답했다.
“기다렸습니다, 국주님!”
사실 염자량 역시 기력이 다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그리고 흑패도를 거꾸로 쥐고는 붕 날아오르면서 적들을 향해 바닥을 찍었다.
“그라운드 웨이브!”
그가 캐스팅을 하자, 곧장 땅바닥이 파도처럼 밀려나면서 적들을 향해 부서져 나갔다.
쿠콰콰콰콰콰!
마치 물결처럼 밀려간 땅이 적들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터져 나갔다.
투콰콰콰콰쾅!
“크억!”
“으아악!”
적들의 추격을 저지한 염자량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는 뒤돌아 달려갔다.
그렇게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마침내 의량협곡이 나타났다.
그리고 첫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촤아아앗!
매설란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천멸대가 흠칫거리고 돌아보자, 매설란이 검을 뽑아 들고는 소리쳤다.
“다들 먼저 가!”
“국주님은 어쩌시려고요?”
목단화가 다그쳐 물었다.
“내가 여기서 길목을 틀어막겠다.”
“하지만 국주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이번에는 연우경이었다.
매설란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사비강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이들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무심결에 든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감찰총국주의 자리를 맡으면서 늘 스스로 사비강과 비교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비교가 아니라 결단이 필요할 때다.
“명령이야. 나도 돌아갈 테니까. 먼저 가.”
“하지만…!”
“시간 없어! 어서!”
천멸대원들이 저마다 입술을 쿡 씹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단리정이 나섰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하지.”
“협곡 너머의 관제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매설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정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천멸대원들을 아우르며 곧장 좁은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매설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찍한 곳에서 기척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끈질긴 놈들.’
도대체 천신교가 뭐하는 곳이기에 저런 무인들이 수두룩하단 말인가?
별 볼일 없는 신생 사이비 종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천멸대는 현재 강호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절정 고수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한데 그런 천멸대를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아넣다니.
물론 함정에 빠진데다 인해전술에 휘말린 셈이지만, 사비강이 떠난 이래 최악의 상황인 것만은 분명했다.
‘입구를 아예 메워 버려야겠어.’
이 협곡에 갈림길이 많다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얼마든지 흔적만으로도 뒤쫓아 올 수 있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매설란이 검을 쥐고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번 일격으로 거의 모든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하리라.
그녀는 고개를 들고 양쪽 바위 절벽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내공으로 시력을 향상시켜 특이점을 찾았다.
강한 일격으로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점.
한참을 살피던 중, 그녀는 절벽 한쪽에 움푹 들어간 부위를 찾아냈다.
‘좋아, 저기라면…!’
운이 좋다면 단 한 방에 절벽의 상당 부분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판단이 끝났을 무렵, 마침 적들이 협곡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앞장 선 자가 매설란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찾았다!”
“저기다!”
매설란이 냉소를 지으며 훌쩍 날아올랐다.
“흥! 찾지 않는 게 나았을 거야!”
파바바바밧!
경공을 펼치면서 절벽을 밟아 올라간 그녀가 공력을 최대한 집중하면서 연검을 뿌렸다.
쑤아아아아앙!
꽈르르르릉! 꽈광!
“헉! 뭐, 뭐얏? 우아아악!”
“피해라!”
추격자들이 혼비백산하면서 흩어졌다.
쿠콰콰쾅! 쿠르르릉!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처음부터 노렸던 부위가 바로 바위 절벽에서 가장 취약했던 부분이었다.
거대한 바위더미가 무너져 내리면서 육중한 소음과 함께 협곡을 메우기 시작했다.
바닥에 착지한 매설란이 무릎을 쥐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급한 불은 껐지만 이걸로 얼마나 시간을 끌어 줄지 알 수 없었다.
얼른 달아나야 한다.
그녀가 막 돌아서는데,
“아니, 매 국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오재상이 무인들을 이끌고 나타난 게 아닌가?
‘저 능구렁이가…!’
하지만 매설란이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면서 물었다.
“적들에게 발각됐어요.”
“그런…! 도대체 어쩌다가…!”
‘네가 정보를 흘렸겠지!’
매설란이 속생각을 삼키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자, 오재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물었다.
“한데 천멸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행히 천멸대와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매설란이 모른 척 말했다.
“일단 급하게 빠져나오면서 모두 흩어졌어요.”
“저런. 그렇군요. 하지만….”
오재상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더니 매설란에게 다가왔다.
“대원들을 버리고 혼자 달아나는 국주라니…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니까요.”
“……?”
“너무 원망하진 마시오.”
푹!
오재상의 검이 다짜고짜 매설란의 가슴을 찔렀다.
내공을 급격히 소진한 뒤였기에 그녀로서는 미처 방어할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오히려 오재상이었다.
그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의 검을 보았다.
검봉이 심장을 뚫는 대신 매설란의 왼쪽 가슴에 닿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이는 예전에 사비강이 준 용린갑 덕분이었지만, 오재상으로서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매설란이 싸늘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어딜 찌르는 거야? 이 변태야.”
찰나,
쉬이이잇!
그녀가 마지막 남은 내공을 끌어올려 검기를 뿌렸다.
쉬컥!
오재상이 얼른 물러났지만,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그는 목이 절반쯤 찢어지고 말았다.
“커억! 커르륵! 컥!”
목을 쥔 그가 한참이나 허우적거리더니 이내 풀썩 쓰러지고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졸지에 지단주가 죽어 버리자, 그와 함께 온 무인들이 얼른 무기를 앞세우며 경계했다.
그 순간,
퍼콰아아아앙!
요란한 폭음이 일어나더니 협곡을 가득 메웠던 바위더미들이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엄청난 기도!’
희뿌연 먼지구름 너머에서 한 인영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매설란은 그의 기도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챘다.
‘강해…!’
마침내 먼지가 어느 정도 걷히고 나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온통 청색으로 얼굴을 칠한 노인.
청면의 노인이 매설란을 보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년 참 성가시게 구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