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귀환 마교관
273화
“부탁드립니다!”
도비천이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보던 추량이 넌지시 사비강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아무래도 사달이 벌어질 것 같은데,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생조원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혈사련에서 사부님에게도 그 책임을 묻겠다고 난리칠 것 같은데.”
하지만 사비강은 시종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내가 손해 보는 짓이군.”
“예?”
“난 나서지 않을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사비강이 무릎을 꿇고 있는 도비천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비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교관님! 이대로 두면 맹 형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알 바 아니지.”
“교관님은 신생조의 교관 아닙니까?”
“너희들에겐 그저 정도맹의 볼모가 아니었던가?”
사비강이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도비천이 어금니를 쿡 씹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비강이 말을 더했다.
“그렇게 급하면 너희들이 가서 도와주면 될 것 아니냐? 날 찾아올 시간에 지금이라도 그리로 달려갔으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묵귀대의 전신은 천귀대입니다. 그놈들에 대해서는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만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닙니다.”
“흐음. 그럼 너희들은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동료를 돕는 근성을 가진 녀석들이군.”
사비강이 차갑게 이르자, 도비천이 움찔 떨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나를 죽이려고 하는 네놈들을 내가 왜 구해야 하나?”
“그건… 교관님이 먼저 원하신 것 아닙니까?”
사비강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틀렸다. 그건 정답이 아니야.”
결국 도비천이 이를 빠득 갈고는 소리쳤다.
“적어도 당신이 맡은 조직이라면 최소한 그 조직원들을 지켜 주긴 해야 할 것 아냐!”
사비강이 잠시 멈칫했으나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뭐, 그건 정답에 좀 가깝군.’
**
“헉, 헉, 헉!”
맹가숙이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헐떡였다.
뚝. 뚝. 뚝…
아홉 마디로 굽은 구절창의 창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전신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맹가숙은 그야말로 혈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피에 잔뜩 젖어 있었다.
진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맹가숙보다 조금 더 심각한 상태였는데, 왼쪽 팔이 길게 찢어져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점혈을 해서 지혈을 시켰지만, 워낙 너른 부위에 입은 상처였기에 지혈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보다 더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몇몇은 아예 목숨까지 잃고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끄으으.”
“으윽…!”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편, 묵귀대주 우염득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맹가숙을 노려보았다.
“정말 대단하군. 이 정도까지 버틸 줄은 몰랐어.”
“클클. 네놈이 모르는 게 어디 그 뿐이겠냐? 네놈 모가지도 곧 땅바닥에 구를 거라는 것 역시 모르겠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끝내 허세를 부리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 그 몸.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말이야.”
“흥! 네놈은 잊었더냐? 그날 그 지옥에서 나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천귀대주의 심장을 가를 때 네놈도 그 자리에 있었지. 이 몸은 불사신이다.”
“미친 영감이군. 역시 천귀대주님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영감은 죽어야겠어.”
“하! 웃기는 소리! 네놈에게 그딴 의리 따위는 없다는 걸 내 누구보다 잘 알지. 네놈은 그저 훗날 내가 네놈 자리를 위협할까 봐 겁이 나는 거겠지.”
맹가숙이 차갑게 조소하자, 우염득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공력을 절반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맹가숙이지만, 역시 신경은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차피 이제 맹가숙은 곧 죽을 것이다.
상부에 보고하기로는, 맹가숙이 다시 한 번 앙심을 품고 자신을 급습했기에 죽였다고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혈사련에서도 도저히 손쓰기 힘들어서 신생조로 편입시킨 자가 아니던가?
맹가숙의 낯빛이 시퍼렇고, 눈동자가 녹빛을 띄는 것을 보면 독기가 어느 정도 올라오는 듯했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우염득이 침을 탁 뱉고는 말했다.
“영감은 그날 죽었어야 했다. 그게 영감의 임무였지.”
“개소리.”
“안 됐군. 지금쯤이면 영감의 옛 동료들이 영감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군.”
“어차피 조직이나 동료 따위를 믿지 않은지 오래다.”
“쯧쯧. 불쌍한지고. 두 번이나 조직에게 버려지다니.”
우염득의 도발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조직의 배신’이라는 부분은 맹가숙에게 있어서 뼈아픈 기억이었기에.
흥분을 하자 맹가숙의 눈동자가 더욱 짙은 녹색을 띄었다.
구오오오.
우염득의 전신에서 공력이 뿜어지면서 장삼이 부풀어 올랐다.
수다는 끝났다.
이만하면 충분히 할 말은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저승에서 천귀대주님을 뵙게 되거든 무릎 꿇고 사죄해라.”
“엿이나 처먹어라.”
타앗!
순간 우염득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맹가숙이 얼른 내공을 운용해 안력을 키웠다.
내공을 안력에 집중하게 되면 동체 시력이 좋아지기 때문에 상대의 살초를 한 번 정도 막아내는 데에는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울컥!
진득한 피가 입 밖으로 토해졌다.
‘제길!’
기력이 쇄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내공을 운기했더니 독기의 영향을 받았다.
쉬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우염득의 칼이 맹가숙의 목을 베어 왔다.
‘비록 살갗이 좀 베이더라도!’
맹가숙이 슬쩍 보법을 밟으면서 뒤로 미끄러졌다.
피츗!
우염득의 칼날이 맹가숙의 쇄골 부위를 사 촌 가량 베고 지나갔다.
찰나, 우염득이 눈을 부릅떴다.
‘피해?’
이렇게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깔끔하게 공격을 피해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상대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데다 중독 증상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맹가숙은 실전에 강한 자였다.
그날 그 지옥 같은 협곡에서도 악착같이 살아서 귀환한 자였다.
실전에 적응된 그는 온갖 변칙적인 싸움에 능숙했다.
지금만 해도 보통 강호인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할 도박을 건 것이다.
만약 맹가숙이 조금만 더 목숨을 아꼈더라면, 무리하게 피하려다가 두 번째로 이어지는 공격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맹가숙은 자신을 믿고 도박을 걸었다.
모든 내공을 안력에만 집중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칼을 피해냈고, 그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은 우염득의 배후를 차지한 것이다.
“뒈져라!”
순간 맹가숙의 구절창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일직선으로 쭉 펴지더니 우염득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마지막 순간 우염득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끝이다, 이 개자식아!’
맹가숙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푸욱!
마침내 그의 창이 섬뜩한 파육음을 터뜨리며 뭔가를 내질렀다.
그런데…
“이건… 뭐야? 씨벌!”
맹가숙이 버럭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우염득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묵귀대원 중 한 명이었다.
“쿨럭! 커윽…!”
우염득 대신 가슴이 꿰뚫린 묵귀대원이 울컥 피를 토해내고는 그대로 무너졌다.
맹가숙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병신 같은 새끼가… 어째서 이딴 놈을 대신해서…! 그런다고 네놈의 죽음을 누가 알아 줄 것 같으냐?”
조직에게 배신당해서 죽을 위기까지 겪은 맹가숙이었다.
한데 원수 같은 우염득이 조직원의 보호를 받는 모습을 보자, 더욱 열불이 뻗치는 것이었다.
우염득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흐흐. 이게 수장의 통솔력이라는 거다. 너 같은 문제아는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겠지.”
우염득이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는 내가 방심했지만, 다시 그런 행운이 따르진 않을 거다. 각오해라.”
그가 또 한 번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때,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이구만. 네놈들은 전부 다 혈사련 무인 아니냐?”
“……!”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에 협곡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움찔거리고는 두리번거렸다.
협곡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그가 땅콩을 까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긴 뭐 정도맹도 다를 건 없었지. 규모가 크면 다 콩가루가 되는 건가?”
뜻밖의 등장에 제일 긴장한 사람은 우염득이었다.
설마하니 사비강이 직접 나타나서 맹가숙을 구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자신을 암살하려고 아등바등거리는 녀석을 기어코 살리려고 하다니. 정말 미친놈이 틀림없군.’
그가 속생각을 삼키고는 소리쳤다.
“말했다시피 이건 집안 문제인데 끼어들 생각이오?”
“설마. 내가 왜 저 영감을 구해야 하지?”
“그, 그거야….”
오히려 되물어 오니 우염득은 할 말이 궁해졌다.
‘뭐지? 구하려고 온 게 아닌가?’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여기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알아서들 하라고. 정말이니까.”
이쯤 되자 우염득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확실히 소문대로 괴짜군. 이거 어쩌나? 맹 영감. 저 교관도 당신을 구할 생각이 없다는데? 이번에도 조직이 당신을 버렸군! 하하하!”
그때 사비강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뭐요?”
우염득이 신경질적으로 되묻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얘들이 가만히 안 있겠다는군.”
“뭐? 무슨…?”
다음 순간, 협곡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신생조였다.
이내 그들이 협곡 아래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순간 맹가숙의 뒤로 한 무리의 신생조들이 병풍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맹가숙과 진조영도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네놈들이….”
“시끄러워, 영감. 귀찮은 일을 벌이고 있어. 쯧.”
백공보가 혀를 차면서 투덜거렸다.
한편, 갑자기 신생조가 나타나자 우염득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들이… 왜 맹 영감을 구해 주는 거지?”
그러자 백공보가 목을 우두둑 꺾더니 성큼성큼 나섰다.
“그래도 내가 신생조인데, 같은 신생조원이 어중이떠중이한테 당하면 쪽팔리잖아.”
“맞는 말이지. 괜히 이런 시답잖은 녀석들한테 당해서 나도 같은 취급당하면 기분이 좆같거든.”
방각이었다.
뒤이어 나선 사람은 유송령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교관을 죽이려면 머릿수 하나라도 더 채워 두는 게 좋지 않겠어?”
이쯤 되자 우염득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혈사련에서도 다루기 힘들 정도로 제멋대로인 녀석들이 아닌가?
게다가 무공마저 고강해서 함부로 쳐내기도 아까운 녀석들만 모아 놓은 게 신생조다.
그런 녀석들이 합심해서 덤비겠다고 하니….
‘제길… 이건 계산 밖인데.’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처음의 계획도 완전히 틀어진다.
“쳇, 어쩔 수 없군. 오늘은 우리가 이만 물러가지. 하지만 다음에는 각오해야 할 거야. 맹 영감.”
그러자 백공보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어이. 누구 마음대로 간다는 거냐?”
“뭐?”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뭐라고? 네놈들은 굳이 일을 크게 만들겠다는 거냐!”
“몰랐나? 우린 그딴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애초에 문제아는 건드리질 말았어야지!”
“헉! 이, 이 무슨…!”
하지만 신생조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신생조원들이 일제히 묵귀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