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귀환 마교관
272화
사비강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앞을 가로막은 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따지려는 게 아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시커먼 그림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추량이 얼른 횃불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도비천을 비롯한 일당이었다.
처음에는 암살을 시도하려는 것인 줄 알고 추량이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오랜 여행으로 지친 상태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더니 도비천을 비롯한 일당 세 명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엎드리는 게 아닌가?
갑자기 벌어진 일에 추량은 ‘어어?’ 하는 표정으로 도비천 일행과 사비강을 번갈아보기만 했다.
사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잖아.”
“맹 영감을 구해 주십시오.”
“맹 영감?”
도비천이 빠르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는 맹가숙이 이번에야말로 큰마음을 먹고 사비강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것.
한데 그것이 결국 또 다른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위까지 세세히 설명했다.
**
같은 시각.
맹가숙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씨부럴. 이게 어찌 된 거야?’
그가 눈을 부라리며 옆을 돌아보았지만, 진조영 역시 영문을 모르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좁은 협곡으로 걸어 들어온 자들은 사비강 일행이 아니었다.
대신 두 사람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다.
“맹 영감. 잘 지냈는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걸어온 자는 맹가숙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
과거 한때 그가 몸을 담았던 천귀대(天鬼隊)의 사조 조장, 우염득(于廉得)이었다.
맹가숙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오랜만이군, 우 조장.”
“허참, 우 조장이라니. 영감 눈엔 아직도 내가 조장으로 보이나? 여전히 과거에 젖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군. 한심하긴.”
우염득이 비아냥거렸다.
순간 맹가숙은 뱃속부터 피어오르는 살심을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심해?
네놈이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상대의 격장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맹가숙은 심호흡을 하고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우염득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더니 맹가숙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하긴. 머릿속에 한 번 공포가 자리 잡으면 좀처럼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 보통 사람이라더군. 맹 영감도 많이 무서웠겠지.”
그 말이 결코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맹가숙은 이를 빠득 갈았다.
“여기엔 어쩐 일인가? 우 조장.”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사내 한 명이 불쑥 나서며 눈을 부라렸다.
“대주님께 말을 공손히 하라.”
그랬다.
우염득은 이제 조장이 아니라 대주였다.
아까부터 그가 과거를 운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했다.
이젠 자신의 지위가 조장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맹가숙을 더욱 자극할 것이라는 것을 우염득은 잘 알고 있었다.
맹가숙이 미간을 팍 구겼다.
“네놈들이 함정을 판 거였군.”
“함정이라고 부르기에도 낯 뜨겁군. 이렇게 단순히 걸릴 줄은 몰랐거든.”
맹가숙이 진조영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제 그 정보, 누구에게 받은 거냐?”
“뇌랑대(雷狼隊) 범달(氾達)에게 들었는데. 그놈이 이럴 줄은….”
진조영의 대꾸에 맹가숙은 실소가 터졌다.
범달이라면 확실히 진조영이 의심 없이 받아들일 만하다.
적어도 녀석은 한때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였기에.
하지만 그마저 줄을 갈아탔을 줄이야.
맹가숙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우염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툭 까놓고 생각해 보라고. 한때 유력한 차기 대주였던 맹 조장이 이젠 개망나니가 되어서 신생조라는 근본도 없는 골칫덩이가 되었는데, 누가 아직도 마음을 터주겠나?”
“……!”
“그나저나 맹 영감도 참 많이 변했어. 한때는 당주들마저 긴장하게 만들던 실력이었는데 말이야. 세월 탓인가?”
“너 이 새끼…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나저나 신생조가 되어서도 교관을 죽이는 임무라… 확실히 맹 영감은 조직을 배신하는 게 딱 어울린단 말이지.”
결국 참다못한 맹가숙이 폭발하고 말았다.
“닥쳐! 애초에 누가 먼저 배신을 했는데 감히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그러자 우염득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영감. 그새 잊은 건가? 천귀대주님을 죽인 게 누구였는지?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건 애초에…!”
“변명은 필요 없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지른 우염득이 수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스스슥. 스슥.
갑사 협곡을 둘러싸고 시커먼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대략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
아마도 묵귀대주(墨鬼隊主)가 된 우염득이 대원들을 모조리 끌고 온 모양이었다.
하긴 이들이 과거 천귀대원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것들이…!”
“제길, 미안하게 됐수. 내가 범달 녀석을 무작정 믿는 게 아니었는데.”
진조영이 이를 갈고는 말했다.
맹가숙은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나직이 읊조렸다.
“됐다. 언젠간 짚고 넘어갔어야 할 일. 오히려 잘 됐다. 이참에 확실하게 풀자.”
“난 영감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니까.”
“말 고쳐라. 오늘 만큼은 조장이다.”
“알겠습니다, 조장!”
진조영이 호기롭게 소리치자, 우염득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영감. 겨우 그런 몸으로 뭘 어떻게 하려고? 아직도 옛날처럼 설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노옴!”
맹가숙이 사자후를 터뜨리고는 구절창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그날처럼 가늘게 떨려 왔다.
**
두 해 전.
구절창을 콱 움켜쥔 맹가숙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헉, 헉, 헉!”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서 죽어 가는 이달(李達)을 보았다.
“조, 조장님… 저… 죽, 죽는 거죠? 헤헤….”
이달의 뺨을 타고 피눈물이 흘렀다.
“죽긴 누가 죽냐? 씨부럴 막내야!”
맹가숙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막내 이달은 곧 죽는다.
목이 찢어지고, 옆구리가 절반 정도나 베였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다.
싹수가 있던 녀석이었는데.
한 번 잘 키워 볼 생각이었는데.
그런 막내가 죽어 간다.
‘씨부럴…! 니미럴…!’
맹가숙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서 이달이 힘겹게 말했다.
“화… 내지 마세요… 어린놈이… 먼저 갔다고… 죄송….”
말을 마저 맺지도 못한 이달이 숨을 완전히 거두고 말았다.
“못난 새끼….”
맹가숙은 눈물이 고인 이달의 눈을 손으로 감겨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피비린내를 모조리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온통 붉은 색이었다.
“니미럴, 징글징글하구먼. 카악, 퉷!”
맹가숙은 목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가래를 거칠게 뱉어냈다.
바닥은 발을 딛는 곳마다 핏물이 흘러서 연신 질퍽거렸다.
무수한 시체들 중에는 이달을 포함해 맹가숙이 이끄는 천귀대의 오 조도 꽤 많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총 서른 명의 조원들이 오백에 달하는 정도인들과 격투를 치렀으니.
그럼에도 아직까지 예닐곱 정도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반면에 정도맹 측 사상자는 백여 명에 달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저 협곡으로 밀고 들어오는 무인들이 사백여 명이라는 사실이다.
“씨벌! 잔당을 추격하는 임무라고 했잖습니까!”
전신에 피에 젖어 혈귀(血鬼)가 된 진조영이 침을 튀며 소리쳤다.
도비천이 개미떼처럼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보면 모르겠어? 속은 거지. 그 개새끼들이 예전부터 조장을 견제하더니…!”
맹가숙은 이를 빠득 갈았다.
일 년 전, 기연을 얻어 영약을 복용하고, 구절창의 비기를 익힌 후부터였을 거다.
그는 조장이라는 직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니, 대주라는 직급도 부족할 만큼 강해졌다.
원래부터도 조장 중에서는 제일 강했던 그였다.
그쯤 되자 대주와 조장들이 자신을 견제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같은 조직인데 별 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한데 이런 짓을 꾸며?
그저 정도맹의 잔당들을 추격하는 임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미끼였다.
협곡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백여 명의 정도맹 무인들.
이후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그 폭약…!’
임무에 나서기 직전, 천귀대원들이 폭약을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예감이 틀리길 바라지만, 언제나 불길한 추측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
맹가숙은 이를 빠득 갈더니 휙 돌아섰다.
사백여 명의 정도맹 무인들이 그들 앞에 다가오려면 시체로 쌓은 벽을 넘어와야 했기에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찰나,
쉬이잇!
탁탁. 탁탁탁. 탁탁…!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지쳐 있던 오 조원들은 손 한 번 까딱하지 못한 채 점혈 당했다.
“조, 조장님. 뭡니까?”
도비천이 눈을 부릅떴다.
“다 내 탓이다. 미안하게 됐다. 살아남아라.”
“제기랄! 뭐하는 짓이냐고 묻잖소!”
하지만 맹가숙은 대답 대신 점혈 당한 오 조원들을 어깨에 들쳐 메더니 협곡 사이의 동혈 안으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오 조원들을 모두 동혈 안에 밀어 넣은 후 맹가숙이 구절창을 휘둘러 입구를 무너뜨렸다.
쩌엉! 꽈르르릉!
먼지가 비산했다.
누군가는 밖에 남아야 했다.
그래야 동혈이 무너져 매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동혈 인근에 떨어지는 폭약은 전부 걷어내야 하리라.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정도맹 무인들이 시체로 쌓은 벽을 허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녀석들은 이곳에 훨씬 더 많은 혈사련 무인들이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이리라.
그때였다.
툭, 툭툭!
치이익! 치이이익!
곳곳에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폭약!
“헉! 폭, 폭약이다!”
“피해라!”
갑자기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아우성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맹가숙 근처에도 폭약이 떨어져 내렸다.
다행히 심지가 붙은 폭약이다.
시간이 있다.
그는 얼른 무너진 동혈 입구에 있는 폭약부터 재빨리 걷어찼다.
혹시라도 오 조원들이 완전히 고립되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기에.
뒤이어 그는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구절창으로 들어 올려서 날렸다.
휙휙휙!
찰나지간 많은 시체들이 날아가 폭약을 겹겹이 덮어 갔다.
다음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아앙!
협곡 전체가 격동하며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사백여 명의 정도맹 무인들이 일시에 인육 파편이 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맹가숙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스스스….!
곧 누런 공기가 협곡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닌가?
폭약에는 독무(毒霧)가 포함되어 있었다.
“크읏!”
막다른 협곡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맹가숙은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피독주를 깨물고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
“그 지옥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지. 그리고 내 손으로 천귀대주에게 복수했다.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맹가숙이 그날을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그날 그는 독귀(毒鬼)가 되었다.
전신 세맥의 절반 정도가 중독되면서 이제는 그 당시 힘의 절반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맹가숙은 천귀대주의 심장에 구절창을 박아 넣었다.
본대로 복귀하자마자 돌발적으로 저지른 짓이었기에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맹가숙을 포위한 대원들은 무기를 앞세운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온통 피에 젖은 맹가숙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뻔뻔한 얼굴을 들이대면 내 마냥 웃을 줄 알았소?”
“맹 조장…!”
“잘 가시오.”
마지막 인사를 끝낸 맹가숙은 천귀대주의 심장에 박힌 구절창을 뽑아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우염득이 저 배신자를 잡아 죽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때 그 자리에 련주가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자신을 비롯한 오 조원들은 모두 천귀대원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참 지랄 같단 말이지. 그래도 한때 같은 조직에 몸을 담은 동료들에게 매장당할 뻔했다는 것. 그리고 간신히 살아온 우리에게 네놈들이 칼부터 겨누었다는 것. 그때 네놈들이 우리에게 피워 올리던 살기는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
당시 련주는 전후 사정을 이해하고는 맹가숙 일당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스으읍, 후우우!”
맹가숙이 심호흡을 하자 마침내 손 떨림이 멈췄다.
독기로 인해 녹광(綠光)으로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갑사협곡 위로 타들어 가던 노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그날과 다르다.’
맹가숙은 자신과 대치한 우염득과 그의 부하들을 보았다.
약 이 년만의 대치 상황.
“훨씬 낫군. 그때보단 말이지!”
팟!
맹가숙이 몸을 날렸다.
동시에,
“죽여라!”
우염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치솟았고, 갑사 협곡을 메운 묵귀대원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부딪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