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귀환 마교관
264화
꾸우우웅…
콰다앙!
육중한 덩치가 마침내 쓰러졌다.
녀석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몇 차례 깜빡이더니 이내 암회색의 바위처럼 변해 버렸다.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거상이 쓰러진 것이다.
사비강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녀석이 어찌나 설쳐댔는지, 공동의 크기가 더 넓어졌다.
벽이 부서지고 바닥이 파이면서 공간이 넓어진 탓이었다.
사비강은 쓰러진 거상의 오른손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손가락 하나가 어지간한 성인 키만 했다.
녀석이 들고 있던 해머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비강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다음 순간,
“하앗!”
기합을 터뜨리자 베르타스를 휘어 감으며 검강이 솟구쳐 올랐다.
찰나, 사비강이 해머를 거칠게 내려쳤다.
쩌어엉!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마찰음이 공동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해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은 다시 내려쳤다.
쩌엉! 쩌엉! 쩌어엉!
그렇게 몇 차례나 해머를 두드려댔을까?
마침내,
쩌적…! 쩌어억!
쿠르르르르!
해머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돌가루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사비강은 보았다.
무너진 해머 안쪽에 잠든 것처럼 곱게 놓여 있는 진짜 해머를!
‘바슈크의 해머…!’
사비강의 입매가 찢어졌다.
이걸 찾으려고 이토록 개고생을 하게 될 줄이야.
“하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공동에 짜랑짜랑 울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오랜만에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비강은 바슈크의 해머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망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마계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대장장이의 망치다.
이를 테면 쇠망치로 금강석을 제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금강석으로 쇠망치를 제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수월하다.
바슈크의 망치는 바로 그런 개념으로 볼 때 모든 금속을 제련할 수 있는 도구다.
심지어 베르타스마저도 바슈크의 망치로 제련이 가능하다.
물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바슈크의 해머를 손에 넣었다.
이걸로 마계 군단의 계획을 조금은 틀어 놓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역시 뺏어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이지.’
사비강이 히죽 웃고는 망치를 든 채 거상의 등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망치를 치켜든 후 사정없이 내려쳤다.
꽈아앙!
천지가 격동하는 듯 커다란 소음이 울리더니 거상이 맥없이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부서진 거상의 몸속에는 다양한 마공석과 오색찬란한 금속들이 들어 있었다.
바슈크의 해머를 구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겉보기에 그저 평범해 보이는 거상… 물론 움직이는 거상이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거상의 몸속에는 온갖 희귀 금속들이 존재했던 것.
이 금속들은 명기를 만들 때 좋은 재료가 될 터였다.
사비강은 바닥에 떨어진 그 금속들을 열심히 주워들었다.
마공석처럼 몇 개의 금속은 그 자체로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것이 있었고, 대다수의 금속은 무기에 박아 놓거나, 제련할 때 섞어 줌으로써 강도를 높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거상을 때려 부순 사비강은 마지막 금속 하나까지 모두 챙긴 후에야 공동을 빠져나왔다.
사 갑자의 내공을 쌓은 그가 경신법을 펼쳐 공동을 빠져나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상대로 밖으로 나왔더니 십오 갑자에 달하는 내공은 여전히 구 갑자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때문에 사비강은 상당수의 내공을 마나의 상태로 모아 두고는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
“헐. 도대체 꼴이 왜 그 모양입니까?”
“사부한테 한다는 소리하고는.”
추량의 말에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량은 사비강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말했다.
“어디 저승이라도 다녀온 사람 같습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대충 대답을 한 사비강이 침상에 가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추량의 말대로 사비강의 겉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사흘만의 귀환.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략 한 나절이면 충분할 거라고 봤는데.
오래 걸려 봐야 이틀이면 이곳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꼬박 사흘 만에 돌아왔다.
당장 떠나기에는 몸이 너무 지쳤다.
물론 십오 갑자에 달하는 마나를 얻긴 했지만, 사흘 동안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은 거라고는 물고기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공 없이 싸우는 동안 여기저기 파편에 얻어맞으면서 옷이 상거지 꼴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미끼는 구한 겁니까?”
“구했지.”
“미끼 잡으려다가 사람 잡겠군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다.”
“사부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나저나 옷이 엉망인데 새 옷이라도 좀 사와야겠습니다.”
“네가 다녀오려고?”
“그럼 누가 다녀오겠습니까? 사부님을 제가 보살펴야죠.”
“호오. 웬일이냐? 흑귀를 시키지 않고.”
추량이 씩 웃었다.
“알고 보니 꽤 좋은 녀석이더라고요.”
“그래? 그럼 좀 사와.”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추량이 방을 나가자, 사비강이 허공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한 거냐?”
“그냥… 원래 잡일은 아무에게나 시키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허공에서 흑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에게 시키는 거라고 했지요.”
“그 말 한 마디에 저렇게 변했다고?”
“생각보다 단순하더군요.”
사비강이 피식 웃어 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지난 사흘이 석 달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좀 쉬어야겠다.”
“안심하시고 쉬십시오.”
다시 허공에서 흑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람들은 노인을 ‘조 씨 영감’이라고 불렀다.
정강산 일대에서 조 씨 영감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자도 거의 없었다.
조 씨 영감은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방의 의자에 걸터앉아서 나무를 조각하고 있었다.
괭이질을 하는 농사꾼의 모습을 조각하는 것이었는데, 이마에 맺힌 땀방울까지 하나하나 세공으로 다듬고 있었다.
과연 그 집중력과 실력은 범인들이 보기에 신기에 가깝다고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마침 문이 열리면서 한 중년의 사내가 들어섰다.
“영감님, 계십니까?”
목소리가 친근한 것이 꽤나 자주 이곳을 들락거리는 자 같았다.
조 씨 영감이 고개를 힐끗 들어 보니 낯이 익은 중년의 남자가 웃고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옷만 보아도 그가 꽤나 여유 있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하러 또 오셨나?”
조 씨 영감이 까칠하게 묻자, 중년의 사내가 껄껄 웃었다.
“허허, 영감님. 너무 까칠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자꾸 찾아오는 것도 다 영감님의 작품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말을 꺼내면서도 시종 공방 구석구석에 놓인 조각상들을 훑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과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한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이 중 아무거나 집안의 장식장에 갖다 두어도 체면치레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운 조각상들이었다.
나무로 조각해 둔 것도 있었고, 돌이나 쇠로 조각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나무로 조각한 것이 가장 많았다.
조 씨 영감이 까칠하게 말했다.
“백번을 와도 그건 안 돼.”
“허허, 거참.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뭐 말도 꺼내기 전에 그러십니까?”
중년의 남자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조각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부터 가슴까지만 만들어진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묘한 조각상이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잘 만든 조각상 같은데, 또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중년의 사내는 그 조각상이야말로 조 씨 영감의 역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본다면 그 조각상의 진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다보면 그 조각상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조각들과 달리 그 조각상은 굉장히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열망과 회한….
하나의 조각상으로 이토록 복잡한 감정을 다 담을 수 있다니.
장식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중년의 사내는 그 조각상에서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읽어낸 순간부터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조 씨 영감이 그 조각상만큼은 절대 팔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봐도 막무가내였다.
그냥 팔려고 만든 조각상이 아니라나?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중년의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자네도 어지간히 끈질기군.”
“하하. 그래도 영감님의 조각상은 그 진가를 아는 자에게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걸 가져가라니까.”
“다른 건 이미 충분히 사가지 않았습니까? 난 저게 갖고 싶을 뿐입니다. 애환상(哀歡狀).”
그랬다.
그 조각상의 이름을 조 씨 영감은 그렇게 불렀다.
애환상이라고.
어딘지 그 이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내 작품을 아끼고 사랑해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네. 하지만 그건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닐세. 살펴 가시게.”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씀해 주십시오. 내 능력이 되는 한 원하는 만큼 값을 지불해 드릴 테니.”
“마음만은 고맙게 받지.”
“영감님도 참.”
중년의 사내가 툴툴 웃어 버리고는 공방을 나갔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자 조 씨 영감은 조각하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애환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조각상.
“나참, 저딴 게 어디가 좋다는 건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애환상을 바라보던 영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조각을 이어 갔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을 했을까?
이제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짓는 남자의 형상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계시오?”
낯선 목소리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한데 공방 앞이 아니라, 이젠 사용하지도 않는 대장간 쪽이었다.
조 씨 영감은 멈칫하고는 곧 조각상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웬 나그네가 대장장이를 찾아서 잘못 온 것이리라.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금신수 조신량! 여기 없소?”
쩌렁쩌렁 외친 고함소리에 조 씨 영감은 굳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잠시 동안 잊었던 별호.
아니,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별호를 부르는 놈이 있다니.
그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공방을 나섰다.
마침 대장간 쪽에 다섯 명의 무인이 보였다.
“웬 놈들이냐?”
그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일행 중 한 명이 이쪽을 돌아보고는 물었다.
“조신량. 반갑소.”
자신을 의심도 없이 단번에 알아본 것 같은 말투에 짐짓 놀라면서도 조 씨 영감은 차갑게 되물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난 사비강이오. 정도맹 감찰총국주였다가 지금은 혈사련에서 교관으로 지내는 중이지.”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정도맹 감찰총국주가 어떻게 혈사련의 교관이 될 수 있다는 거야?’
한동안 강호의 소식을 일절 접하지 않았던 조신량으로서는 사비강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릴 뿐이었다.
“어디서 사기나 치려고 온 거라면 냉큼 돌아가라. 네놈들이 찾는 사람은 이곳에 없….”
“만생검(萬生劍) 때문이오?”
“……!”
조신량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가 뺨을 씰룩이면서 사비강을 빤히 노려보았다.
“네 이놈… 뭐하는 녀석이냐?”
“말하지 않았소? 교관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