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귀환 마교관
263화
기연(奇緣).
무림인이라면 한 번쯤 꿈꾸게 되는 아니, 수시로 갈망하고 원하는 것이 바로 기연이다.
전설적인 무림 고수들은 대부분 기연을 얻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기연을 믿지 않았다.
다른 이가 보면 지금껏 그가 기연을 얻어 왔다고 믿을 테지만, 이는 엄연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곳에 바슈크의 해머가 있다는 것 역시 기연이라기 보단, 전생을 통해 기억을 저장해 둔 덕분이었다.
물론 지옥 같은 마계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데에는 커다란 운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인으로서 중원에서 얻은 기연은 아무것도 없다.
한데 지금 그 기연이 사비강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다.
이게 기연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사비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위 위에 고여 있는 우유 빛깔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공청석유(空淸石乳)!
한 방울이 모이기까지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린다는 그 공청석유다.
보통 지하 동굴 깊숙한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영약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공청석유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 아닌가?
대략 눈대중으로 보니 고여 있는 물이 수십 방울은 될 듯했다.
삼 대가 덕을 쌓아도 보지 못할 거라는 이 귀한 영약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꾸웅…! 꾸웅…!
사비강이 감격에 젖어 있는 중에도 수면 아래에 잠긴 거상은 끊임없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녀석이 계단을 만드는 방식은 우선 벽을 부순 다음 그 파편으로 생긴 바위를 반대편에 쌓아 가는 식이었다.
정말이지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지능적이었다.
‘하지만 기연을 얻은 만큼 이 싸움도 끝이 보이는구나!’
사비강은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얼른 허리를 숙여 공청석유를 들이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만들어질 불패의 군단을 위해 좀 챙겨 가서 그들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공청석유는 워낙 정순한 기운의 영약인데다 딱히 기질을 가리지 않는 만큼 정사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큰 힘이 될 것이기에.
어디 그뿐인가?
내공심법의 초짜라도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각종 영약을 먹고 운기를 잘못해서 자칫 주화입마에 걸릴 수 있는 경우가 흔한 걸 감안한다면, 내공을 흡수하기 쉬운 공청석유는 그야말로 영약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죽을 고비에 놓여 있으니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나?
‘뭐, 할 수 없지. 내가 다 마실 수밖에.’
바위 위에 옴폭 파인 곳에 고여 있는 물이었기에 들어서 마실 수는 없었다.
천하의 둘도 없는 영약을 마시는 자세치고는 마치 개가 바닥을 핥는 듯 하여 영 모양새가 나지 않았지만 어디 그게 대수인가?
사비강은 체면불고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기 위해 바닥을 싹싹 핥아댔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머리가 쾌청해지면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게 느껴졌다.
비록 결계 안이었지만 이곳의 공청석유는 결계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즉, 밖에서부터 가지고 들어온 내공이나 마나가 아니라는 뜻.
물속에 잠긴 채 열심히 계단을 쌓고 있는 저 거상과 이제야 똑같은 조건이 된 것이다.
사비강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잠시 후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비록 내공이 텅 빈 상황이지만, 이미 심법이 경지에 오른 사비강은 혈맥의 단단함이나 단전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운기를 함에 있어서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머리 위에 요상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공심법이 경지에 오른 자에게서나 나타나는 오기조원(五氣朝元)과 삼화취정(三花聚頂) 같은 형상이었다.
한데 조금 이상한 점은 계속 그 형상이 시시때때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다섯 개의 고리인 오기조원의 형상을 띄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삼화취정의 모양으로 바뀌고, 또 다시 마교에서나 나타날 법한 악귀의 형상이 생기기도 했다가 사기(邪氣)가 느껴지는 시커먼 손이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비강은 내공을 일주천할 때마다 전신의 혈맥을 따라 힘차게 뻗는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정순한 기운이 한 번씩 전신을 휘돌 때마다 단전에 쌓인 내공은 점점 불어났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비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천천히 옅어져 갈 무렵, 그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됐다. 사 갑자!’
이만하면 거상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만약 결계 밖으로 나가게 되면 총 십오 갑자 정도나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산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이 그렇게 딱딱 계산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거다.
이치대로 보면 십오 갑자가 되어야겠지만, 실제로는 구 갑자에서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사비강은 십일 갑자의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무공을 발휘할 때는 구 갑자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서 그릇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단전과 중단전의 한계량.
인간으로서 단전의 크기를 그 이상 키우는 건 쉽지가 않다.
아예 크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때부터는 단전의 크기가 매우 천천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삼류 무사가 일류가 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절정 고수가 초절정이 되는 건 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마나는 다르다.
비록 큰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 9서클에 오르진 못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마나량은 심장에 무한히 쌓을 수 있다.
물론, 마나량을 늘리는 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이유로 사비강은 결계 밖으로 나가는 즉시 대부분의 내공을 마나로 치환해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십오 갑자의 내공을 온전히 보유할 수 있기에.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내공이 십오 갑자 수준이더라도 9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즉,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질도 향상되는 게 아니라는 뜻.
8서클까지는 마나량에 따라 그나마 서클이 향상되기 쉽지만, 9서클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알려져 있다.
드래곤들이나 가능한.
하지만 마계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9서클을 넘은 자가 총 일곱 명이나 된다.
그 중에는 놀랍게도 마족이 아닌 인간도 한 명 포함되어 있다.
대체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그 인류의 벽이라는 9서클을 넘어섰던 것일까?
물론 그가 이룬 9서클의 경지는 일곱 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긴 했다.
초절정 고수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이 아니듯, 9서클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이 아니었던 것.
그래도 9서클이라는 경지는 감히 함부로 평할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이다.
어쨌거나 지금 사비강은 기연을 얻어 다시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얻었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사비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짧은 시간 운기를 한 것 같지만, 아마 꽤나 시간이 흘렀으리라.
쿠우웅!
마침 땅바닥이 진동하면서 육중한 소음이 울렸다.
거상이 수면 가까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군.’
사 갑자의 내공이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마침내,
츄아아아!
수면 위로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 올라오면서 물줄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터어엉!
커다란 손이 물가를 짚었다.
곧이어 바슈크의 해머가 튀어나왔다.
콰지익!
해머가 땅바닥을 내려치면서 깊숙이 박혔다.
거상이 천천히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녀석이 완전히 수면 밖으로 올라왔을 때, 사비강이 거상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 돌대가리야.”
**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괴형분타주 언두수(彦頭秀)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적무린을 맞이했다.
적무린의 뒤에는 석탄강과 유송령이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할 일도 없는지라 적무린을 따라 분타를 구경이나 할 겸 온 것이었다.
적무린은 언두수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에 마련된 정자에 올랐다.
정자 위에는 탁자와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일부러 적무린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듯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제법 풍광이 좋았다.
다만 그곳에는 적무린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자들이 있었으니….
“또 보는군.”
적무린의 말에 조장들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한쪽 팔을 잃고 붕대를 친친 감은 이강주도 있었다.
적무린이 자리에 앉자 언두수가 손수 찻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수하들이 실수를 한 듯 하오. 혹여 적 대주께서 기분이 상하셨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이미 혈사련의 무신대주 자리에서 물러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언두수는 그를 ‘적 대주’라고 칭했다.
실상 따지고 보면 분타주의 지위는 총타의 단주 급이라고 봐야 했기에 적무린보다는 위급이었다.
하지만 역시 총타에 머물고 있는 대주를 함부로 대할 만큼 배포가 큰 분타주는 없으리라.
적무린이 총타에 머무는 한, 언제든 그의 입김이 혈사련주에게도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언두수는 잘 알고 있었다.
“수하들이 무슨 실수를 하셨다고 그러시오?”
적무린이 싸늘하게 되묻자, 언두수가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그야… 적 대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설치는….”
“날 알아보고 못 알아보고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소.”
“하면…?”
“중원 곳곳에 귀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소. 그렇잖아도 정도맹 녀석들은 우리를 근거도 없이 의심하고 있는 판국이오. 한데 이곳에 오니 가관이더군. 객잔에서 되지도 않는 갑질을 하는 것을 보니 정도맹 녀석들이 왜 그리 본련을 멸시하고 욕하는지 알 만 하더이다.”
“아아….”
“천상궁 인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그런 일이 있었구려.”
언두수가 민망함에 고개를 주억거리자, 가만히 서 있던 이강주가 발끈했는지 한 마디 내뱉었다.
“천상궁에서도 빈번히 시비가 붙고 싸움이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만.”
적무린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순간 언두수가 벌떡 일어나서는 이강주의 뒤통수를 따악 후려쳤다.
“커윽!”
“이 멍청한 놈!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 너는 부끄러움도 없느냐? 뭘 잘 했다고 따지는 것이냐!”
언두수는 그저 적무린이 천상궁으로 돌아가서 괴형분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적무린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됐소. 그만하시오. 내가 직접 말하지.”
“아, 그, 그러시겠소?”
뒤통수를 문지르며 서 있는 이강주를 향해 적무린이 차갑게 일렀다.
“천상궁 인근에서 벌어지는 싸움들은 모두 무림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꼴같잖은 갑질을 하며 본련이 욕먹을 짓을 하더군.”
“…….”
“흑도의 길을 걷는 무인이라고 해서 인간성도 쓰레기가 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본련을 무시하고 힐난하는 정도 무인들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게 뭔지 아나?”
“……?”
“그런 녀석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너희 같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은 뼈째 갈아 마시고 싶거든.”
마지막 한 마디에서는 살기마저 우러나오고 있었다.
그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이는 이강주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지만, 괴형분타주인 언두수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충분한 경고가 되었는지, 언두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적, 적 대주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내 아랫것들을 잘 타일러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그래야 할 거요. 나는 돌려서 말을 할 줄 모르니. 여기서든, 천상궁에서든.”
“물, 물론이오.”
적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 벌써 가려고 하오?”
“볼일은 끝났소. 이제는 분타주께서 하기 나름 아니겠소?”
말을 마친 적무린이 휙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석탄강과 유송령이 그 뒤를 얼른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