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귀환 마교관
256화
마을 곳곳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흑마에 올라탄 인왕채주(人王寨主) 육한수(陸漢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아수라장이 된 마을을 지켜보았다.
달아나다가 죽는 사람, 용기 있게 덤비다가 단칼에 목이 날아가는 사람, 울며불며 비는 사람들.
그 비극적인 소음을 육한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소음들이 커질수록 그가 누리게 될 소득 역시 더욱 커질 터였다.
마침 그의 곁에 서 있던 부채주 황규억(黃圭億)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번엔 돈 좀 되겠습니다. 거의 정리가 될 것 같은데, 남자도 잡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아서라. 괜히 욕심내다가 나중에 뒷감당 힘들 수가 있어. 다 죽여.”
“알겠습니다.”
황규억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육한수는 한 번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별로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다.
오래 전, 납치했던 남자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 이후로는 그가 세운 철칙이 확고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남자는 죽인다.
여자와 아이만 납치한다.
황규억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수월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잖아도 요즘 소문이 나돌아서 외진 지역 마을은 죄다 호위무사를 고용하니. 쯧.”
“후후. 이 마을 사람들도 고용하긴 했지.”
“그렇긴 하지요. 다만 그 호위무사들이 우리 애들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을 뿐이지만요. 흐흐흐.”
마을 사람 중 누군가 황규억의 말을 들었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으리라.
어려운 형편에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고용한 호위무사들이 전부 이들과 한통속이었다니!
“이번엔 노예상들이 깜짝 놀랄 것 같군요.”
“그들이 놀라든 말든 돈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그만이다.”
“암요. 그렇지요.”
황규억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마침 부하 한 명이 다가오며 보고했다.
“채주님,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에서 치솟던 비명소리도, 거친 고함소리도 이제 잠잠해져 있었다.
육한수는 어딘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일이 빨리 끝난 건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이번엔 작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되나?”
부채주의 질문에 부하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마흔 정도이고, 여자들이 서른 정도입니다.”
“호오!”
황규억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번에야말로 마을 하나를 온전하게 털었으니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크하하하! 좋아, 좋아! 수고했다.”
황규억이 칭찬을 하자, 부하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그가 육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동안은 일 안해도 먹고 살만하겠습니다.”
“후후.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쓰나?”
육한수가 웃으며 받아 넘기자, 황규억이 앞장서며 안내했다.
두 사람이 마을 한쪽으로 가자, 인왕채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흐느끼고 있는 아녀자들과 아이들이 보였다.
육한수가 나타나자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육한수가 뱀처럼 차가운 눈길로 여인들과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부하 한 명이 그들을 하나하나 밧줄로 굴비 엮듯이 묶고 있었다.
그들 모두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육한수를 올려다보았다.
육한수가 흑마의 검은 갈기를 쓰다듬으며 무감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간다. 통제에 잘 따른다면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다.”
그 순간 여인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 살인마 새끼들아! 내 남편을 살려내란 말이야! 네놈들이 뭔데…!”
쉬이이잇!
서컥!
한 줄기 섬광이 날아가는가 싶더니, 여인은 그대로 목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육한수가 도를 뽑아서 그대로 날려 버리는 바람에 여인의 목이 잘려 나간 것이었다.
“꺄아아악!”
“으악!”
여인들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육한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보기는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본보기가 되고 싶은 자가 있다면 나서라. 언제든지 죽여 줄 테니.”
“…….”
이내 사람들이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발작과도 같은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 혹은 아버지를 잃은 분노와 슬픔보다도 눈앞에 도사린 극한의 공포가 더욱 크게만 느껴졌기에.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차례 둘러 본 육한수가 툭 던지듯 말했다.
“가자.”
**
“왠지 가기 싫은 곳이군요.”
언덕 위에서 천리경을 보던 적무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가 돌아서자 사비강과 추량 그리고 석탄강과 유송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 있었다.
사실 그가 사비강과 함께 천상궁을 떠난 것은 류여중의 뜻이었다.
사비강 혼자 다니는 문제라면 적서향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였지만, 신생조원들을 두 명이나 데리고 나가는 만큼 일종의 감시와 보호가 필요하다는 류여중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것이다.
“가기 싫은 곳이라니?”
“아무래도 저 연기는 밥을 짓느라 나는 연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적무린이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추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저게 무슨 연기라는 거요? 설마 마을에 불이라도 났다는 뜻이오?”
“지금은 아니지만 불이 나긴 했던 모양이오.”
적무린의 대꾸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어찌 됐든 어차피 지나갈 곳이야. 가보면 알겠지.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저기서 묵자고.”
그렇게 다섯 사람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 째 제대로 된 숙소에서 쉬질 못했기 때문에 추량과 석탄강, 유송령은 부디 마을에 별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순간, 그것이 허황된 바람이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온통 부서지고 깨진 창문, 떨어져 나간 문짝,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
그야말로 지옥의 광경을 보는 듯했다.
적무린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추량은 입을 딱 벌린 채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끔찍한 광경에 유송령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려냈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같군요.”
“차라리 전쟁이 일어난 거라면 이보단 나았을 지도 모르지.”
사비강의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추량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도대체 어떤 놈들 짓일까요?”
“글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추량은 모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듯 처참한 광경을 보자 오래 전 그가 겪은 일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 역시 어렸을 때, 마을을 습격한 도적떼가 있었다.
다만, 그때는 이 정도의 참상은 아니었다.
관아도 비교적 가까웠기에 도적떼들은 돈이 될 만한 것 몇 가지를 훔쳐 그대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 바람에 마을 사람들 다수가 죽고 다쳤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그 일로 다리를 다쳐 평생을 불구로 지내야만 했다.
한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최근 중원 곳곳에서 납치가 자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여정 중에 그런 마을을 지나치게 될 줄이야.
추량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죽은 자들은 전부 남자입니다.”
“여자와 아이들만 납치한 모양이군.”
유송령이 을씨년스럽게 변해 버린 마을을 휘 둘러보았다.
“마을에 남은 사람이 없나 봐요. 따뜻한 목욕물은 기대할 수 없겠어요.”
“지금 목욕물이 대수인가? 사람들이 이렇게나 죽었는데.”
추량이 짐짓 불만스럽게 말하자, 유송령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살릴 방법은 없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흥, 속 편해서 좋군. 괜히 사파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어.”
이쯤 되자 유송령도 듣기가 거북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쏘아붙였다.
“사파가 왜 사파인지 몸소 겪게 해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비강이 불쑥 나섰다.
“그만들 하고 잘 자리는 알아서 찾아라. 오늘은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혼자 자야겠다. 그러니 너희들도 각자 잘 곳은 알아서 찾도록.”
“예? 혼자 주무신다니요? 호위인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추량이 얼른 따라붙자, 사비강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여기서는 호위 임무 그만 해도 되니까, 너도 잘 곳이나 알아봐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사부님과 함께….”
“너, 무섭냐?”
“무, 무섭다니요! 전 그냥 이 마을에 벌어진 참상에 화가 났을 뿐입니다.”
“그래? 그럼 내일 일어나서 조사해보든지 해. 오늘은 좀 쉬자. 피곤하다.”
결국 추량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서는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너, 너희들은 어디서….”
하지만 추량이 돌아섰을 때, 석탄강과 유송령 역시 어딘가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땐 귀신 같이 빠르네. 흥! 사파가 아닌 나는 따돌리겠다는 건가?’
추량이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시체가 즐비한 마을.
역시 어딘가에 혼자 잠을 자기에는 영 꺼림칙했지만 별 수 없다.
‘그래.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무서운 법이지!’
마음을 굳힌 추량이 다부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잘 곳으로 정한 곳은 마을 어귀에서 멀지 않은 집이었다.
비록 문짝이 떨어져 나가 있었고, 방안에는 온통 식기들이 깨진 모습이었지만, 다른 집들에 비하면 훼손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해가 저물고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푹 쉬자. 그동안 강행군을 했더니 몸이 너무 무겁군.’
추량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방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몸을 던졌다.
폐가나 다름없는 곳에서 침상에 누워 있으니 왠지 찜찜했지만, 그동안의 여정이 고단했는지 쉽게 잠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안 오냐고!”
버럭 소리치며 일어나는 추량이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을 질끈 감아도 보았지만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잠이 들려고 할 때쯤이었다.
부스럭.
‘……!’
부스럭. 부스럭.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던 추량이 눈을 부릅떴다.
‘방금 분명히 무슨 소리가…!’
그러고 보니 인기척도 느껴진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꿀꺽.
뭐지? 이 집에 살던 주인의 망령인가?
분명 이 마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아니지, 마을의 모든 곳을 둘러본 것은 아니니 어딘가에 산 사람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소리는 집 안에서 갑자기 들린 게 아니던가?
이 마을 어딘가에는 사람이 살지라도, 이 집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헉! 역시… 귀신?’
그때였다.
“…고파…”
희미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추량의 귓가에 닿았다.
하마터면 헛바람을 삼키며 그대로 튕겨지듯 일어날 뻔했다.
추량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배… 고파…”
이번에는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아사(餓死)한 자가 귀신이 된 건가?’
다음 순간,
차가운 손길이 팔뚝에 척 얹어지는 게 아닌가?
결국 추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 일어났다.
“우아아아악! 귀, 귀, 귀신이닷!”
“배… 고파요….”
추량의 눈이 더욱 커졌다.
눈앞에 있는 자는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척 늘어뜨린 소녀 귀신이 아닌가?
“살, 살려 주세요! 저는 별로 맛이 없습니다! 저 같은 건 먹을 게 못 됩니다! 그, 그러니 다른 사람을 잡수소서!”
추량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소녀 귀신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흑… 배고파요… 아저씨… 살려 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맛없는 녀석입니다! 저보다 훨씬 맛있는 녀석이 다른 집에서 자고 있습니다. 몸이 시커먼 녀석인데, 저보다 훨씬 건강한 육체를 가졌으니… 음? 방금 살려 달라고?”
귀신이 살려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있나?
원래 죽은 사람이 귀신 아닌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위화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는 아이는 틀림없는 소녀였다.
아직 살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