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귀환 마교관
246화
“사부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당연하지. 그걸 이제 알았나?”
사비강의 대꾸에 추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누룽지가 넘어간다는 게 대단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비강이 추량을 힐끔 보았다.
“그럼 그 상황에서 그 여자가 계속 슬픔에 잠기도록 놔두었어야 했나?”
“그건….”
“상대의 슬픔을 고려한 행동이 너 자신의 체면을 생각한 거냐? 아니면 그 사람을 생각한 거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추량이 즉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잘 모르겠습니다.”
“난 그냥 내가 욕먹는 걸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언제나처럼.”
사비강이 툭 던지듯 내뱉고는 걸음을 옮겨 갔다.
반면 추량은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욕먹는 걸 신경 쓰지 않을 뿐이라….’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누룽지를 먹지 않았을까?
‘젠장, 생각하니까 갑자기 배고파지네.’
추량이 얼른 사비강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보화산 남쪽에 위치한 동혈에 다다랐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각이었기에 추량은 왠지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귀신같은 게 사는 건 아니겠지요?”
“말했잖아. 그 귀신이 ‘소유강’이라고.”
“어, 어째 그 말이 좀 더 무서운 걸요? 지난 칠 년간이나 실종된 사람 아닙니까? 한데… 죽어서 귀신이 된 거라면….”
사비강은 더 이상 추량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동혈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넌 밖에서 기다려라.”
“예? 왜요? 같이 가겠습니다! 절대로 같이 갈랍…!”
“왜? 귀신을 직접 보고 싶어? 뭐 그런 경험도 나쁘진 않지.”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망부석이 되어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동혈 안으로 걸어갔다.
휘이이이잉!
사비강이 떠나 버린 동혈 입구에 찬바람이 지나쳐 갔다.
‘으으. 왠지 으스스하군!’
추량이 팔뚝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스윽 올리는 게 아닌가?
“으갸갸갸갹! 누, 누, 누구냐! 덤벼라! 다 죽여 주마아악!”
검을 뽑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던 그가 두 눈을 끔뻑거리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사비강이 멀뚱멀뚱 바라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는 거냐?”
“아, 저 그게… 그런데 사부님 왜 다시 나오셨습니까? 여기가 아닙니까? 역시 오늘은 날이 아닌 건가요? 다음 기회에 다시 오도록 할까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이거나 받아.”
사비강이 뭔가를 휙 던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추량이 손에 들린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건…?”
“배고플 테니 먹고 있어라.”
누룽지였다.
사비강이 휙 돌아서서 동혈 안으로 들어가자, 추량이 눈시울을 잔뜩 붉히고는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은 정말 춘대래예요!”
**
남자는 얼굴이 백설처럼 희었다.
핏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피부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그의 손에는 한 자 정도 되는 길이의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검은 한 사내의 심장을 꿰뚫은 채였다.
“끄으으윽!”
심장이 꿰뚫린 남자, 삼적이 입가에서 피를 걸쭉하게 늘어뜨리며 신음을 흘렸다.
푸슉!
어중간한 길이의 검이 뽑혀 나오자, 결국 삼적이 바닥에 쿵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는 붉은 눈동자를 내리깔고 쓰러진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다섯 구의 시체.
어둠에 삼켜진 이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이렇게 죽어 나갔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예전에는 설득해 보기도 했고, 타이르고 구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귀찮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살수를 뻗어 오는 자들에게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결국 다섯 명의 무리가 모두 죽었다.
“지겹군.”
거무죽죽한 입술이 열리면서 매우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한지 범인이 들었다면 이승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시체의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깔고 앉았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있노라니 수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날 자신은 인근 마을에서 정파 무인과 소소한 말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강호의 싸움이 으레 그렇듯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순간, 소소한 다툼은 생사비무로 이어지기가 일쑤다.
정당한 비무를 통해서 놈을 꺾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놈과 같은 문파의 무인들이 죽이겠다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놈들을 피해 달아났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는 그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지워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동혈을 발견했다.
‘그래, 아주 우연이었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느닷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자칫하면 재수 없게 벼락을 맞아 죽을 뻔한 순간이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이 동굴 입구가 나타났지.’
절벽 한쪽이 무너져 내리더니 동혈이 드러난 것이다.
벼락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동혈이라니.
처음 입구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고수들은 하나같이 기연을 얻지 않았던가?
그건 분명 기연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기연은 개뿔…!’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그날 이곳으로 발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후회가 밀려온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흐음. 아직 잔챙이가 남아 있었나?”
무한의 어둠 속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귀찮군.’
분명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되면 또 죽자고 달려들 터.
차라리 먼저 죽여 버리는 것이 속 편하리라.
남자는 스르르 걸음을 옮겼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반면 이제 막 무한의 어둠으로 들어온 상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가 입매를 치켜 올렸다.
‘놀랄 수밖에. 이 끝없는 어둠에서 나가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내가 너에게 안식을….’
그때,
“라이트.”
상대의 입술을 비집고 무심히 튀어나온 한 마디.
다음 순간, 놀랍게도 무한의 어둠 속에 빛이 생성됐다.
“크웃!”
남자가 얼른 팔로 눈을 가리며 훌쩍 물러났다.
그는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빛이다! 빛!
지난 수년 간 이곳에 갇혀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빛이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이곳에서는 절대 불을 밝힐 수 없을 텐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팔을 내렸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어둠 속에서 빛의 구가 떠올라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보고는 태연하게 묻는 게 아닌가?
“소유강이냐? 이렇게 보니 꽤 젊구나. 하긴 내가 널 처음 봤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팔 년 후였으니까.”
소유강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처음 봤을 때가 팔 년 후라고?
뭔 앞뒤가 안 맞는 소리야?
도대체 어떻게 저 빛이 생겨난 거지?
의문이 꼬리를 문 끝에 그의 입술을 비집고 질문이 튀어나왔다.
“네놈은 누구냐? 악신이냐?”
“아니. 난 사비강이다. 어엿한 교관이지.”
“교…관?”
“그래. 내가 널 데리러 왔다. 앞으로 넌 내 수하가 될 거다.”
“수하…?”
“뭐, 제자라고 하기엔 이미 완성형에 가까우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악신과 계약해 보니까 기분이 어때?”
“네놈이 어떻게 악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거냐?”
“당연히. 내가 그놈들이 만든 세계에서 살다가 왔거든.”
소유강은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또 악신이 장난을 치는 건가?
칠 년 전, 그는 이곳 무한의 어둠에 갇혀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때 악신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 나와 계약을 한다면 너에게 생명을 주마.
그 결과 소유강은 빛을 잃고 어둠의 생명을 얻었다.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악신은 자신에게 영원히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종의 저주였다.
그런데 저 빛은….
사비강이 소유강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아, 이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마나로 만들어진 빛이니까. 태양만 아니면 상관없거든.”
“도대체 네놈은….”
“어차피 시간을 길게 가지고 대화를 해야 풀릴 문제니까, 우선 여기부터 나가지.”
“후후후.”
소유강이 툴툴 웃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상황이다.
지난 칠 년간 이토록 재미있는 상황은 이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수십 번 불청객이 이곳을 찾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모두들 자신을 보면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저리 태연하게 말을 걸어 오다니.
아니, 애초에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에 제 발로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저 녀석이 누구든, 이 무한의 어둠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방법은 절대 없….
“자, 답답했을 텐데 이제 그만 나가자.”
“후후. 네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잔말 말고 물러나 있어라.”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냐?”
“깨버려야지. 이 무한의 어둠을.”
“깬다고? 아니, 그보다 넌 무한의 어둠을 알고 있는 거냐?”
“안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네 말투부터 고쳐야 한다. 그땐 내가 네 주인이니까.”
사비강이 품에서 라겔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활과 화살 그리고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붉은 빛이 너울거리는 신기한 구슬.
바로 오래 전, 단구기에게 빼앗은 데블 파이어.
즉, 폭렬단이었다.
사비강이 화살촉 끝에 폭렬단을 매달더니 시위를 당겼다.
“지금… 뭐하는 거냐?”
소유강이 멍하니 물었다.
“무한의 어둠도 결국은 마나의 결계다. 횃불은 이곳에서 꺼지더라도 마나로 만든 빛은 꺼지지 않지. 그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이용해서 막강한 폭발을 일으키면 이 무한의 어둠도 깨지거든.”
소유강이 눈을 끔뻑거렸다.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넌 보고나 있으라고.”
마침내 사비강이 활시위를 놓았다.
다음 순간,
슈우우우웃!
꽈꽈아아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격동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