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귀환 마교관
245화
“흐흐흐. 고년 젖가슴이 아주 끝내줍디다. 탱글탱글한 것이… 다시 생각해도 침 나오네.”
삼적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나란히 걷던 사적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쉬우면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더 먹으면 되지 않겠수?”
“그 연놈들이 그때까지 그 집에 있을까?”
“하루하루 살기도 힘든 것들이 가면 어딜 가겠수?”
“흐흐.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러자 앞서 걷던 이적이 힐끔 돌아보았다.
“아서라. 그놈 말대로 그 동혈에 금은보화가 잔뜩 쌓여 있으면 뭐 하러 굳이 거길 가냐? 그 돈으로 최고급 기루에 가서 노는 게 낫지!”
“그 말도 일리가 있수다. 근데 그 동혈에 살고 있다는 ‘흑귀’라는 요괴가 좀 찜찜하지 않수?”
“찜찜하긴! 네놈들은 대형의 실력을 못 믿는 거냐!”
“헤헤. 그럴 리가요.”
“걱정 마라. 철혈검제로 불리는 대형께서 흑귀인지 말귀인지 일격에 처단할 테니까. 흐흐흐!”
“암요. 그렇고말고요.”
진상오적이 그렇게 두런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보화산 중턱에 다다랐다.
남쪽으로 돌아간 그들은 어렵지 않게 동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동혈 입구에는 여러 가지 낙서가 있었는데,
- 절대 들어가지 마시오.
- 이곳에 발을 들인 자,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 내가 이곳의 기물과 보화를 모두 가져가마!
등등의 글귀였다.
“기물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군.”
모당랑이 입매를 찢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가자.”
진상오적들은 곧 어두컴컴한 동혈을 따라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입구에서 멀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졌고, 눅눅한 습기 때문에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오적이 미리 준비한 홰에 불을 붙여 주변을 밝혔다.
여전히 길고 좁은 통로.
하지만 생각보다는 깔끔했다.
아직까지는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동혈일 뿐.
바닥에 해골이 널브러져 있고, 여기저기 마른 피가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저 그런 동굴일 뿐이었다.
“좀 더 들어가야겠는데요?”
오적의 말에 모당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섯 사람은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그렇게 걷기만 했을까?
마침내 사적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씨부럴. 뭔 동굴이 이렇게 길어? 이러다가 바다까지 가겠수다.”
“바다가 나오면 다행이지. 저승 나올까 봐 걱정이다.”
삼적의 말에 사적이 툭 쏘아붙였다.
“뭔 말을 그리 하슈? 무섭소?”
“무섭긴. 아까부터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의외로 삼적은 화도 내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대번 대거리를 했겠지만, 지금은 주변 환경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벅저벅.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었을 때,
“저어… 대형.”
막내 오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모당랑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돌아보았다.
“뭐냐?”
“횃불이….”
오적의 말에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횃불이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이적이 씨근거렸다.
“이런 니미럴! 혹시 그놈들이 우릴 속인 거 아니야? 왜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여! 흑귀인지 나발인지도 보이지 않잖아!”
“그만 돌아갑시다.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수다.”
삼적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이 동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사적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자니? 그래도 끝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형!”
“흐음.”
모당랑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하다.
이렇게 긴 동혈은 그도 처음 보았다.
“일단…”
그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후우웅!
동혈 안쪽에서 얼음장처럼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 바람에 횃불이 꺼지고 말았다.
“막내야, 똑바로 안 하냐?”
“바로 불붙이겠습니다.”
오적이 화접자를 꺼내 연신 불붙이기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사적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니미럴! 답답해 죽겄네! 이리 내봐! 내가 붙일 테니!”
하지만 오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었기에 사적은 손을 뻗어 더듬으며 오적을 다시 불렀다.
“씨부럴, 막내야! 대답 안 허냐!”
정적.
그제야 사적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괜히 더욱 크게 소리쳤다.
“막내! 대답 안 해?”
역시나 고요하다.
오적뿐만 아니라 진상오적 중 그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삼 형, 우리 막내 반항기인가 보오. 대답을 안 하네.”
삼적 역시 대답이 없다.
그는 점점 불안감을 느끼면서 이적과 모당랑을 불렀다.
“대형! 이형!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지금 나 놀리려는 거지? 하나도 재미없거든?”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이쯤 되자 사적은 서서히 불길한 예감이 뻗어 왔다.
‘니미럴, 전부 죽은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고요할 수가 있나?
그가 바닥에 엎드려서 더듬어 갔다.
한데 이상하다.
바닥이 마치 대리석을 만지는 것처럼 매끈하지 않은가?
‘씨부럴! 뭐, 뭐야? 여긴 도대체 어디야?’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주변을 더듬었지만 도저히 다른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
팔뚝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까지 귀신이라는 걸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설마… 정말 귀신인가?’
그때였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무한의 어둠이다.”
갑자기 들려온 음산한 목소리.
“으헉!”
사적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웬, 웬 놈이냐!”
“어둠에 머무는 자.”
“무, 무슨 개 같은 소리를…! 모습을 보여라!”
사적이 소리치자 삼 장 정도 앞에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 놀랍게도 시야가 밝아졌다.
그렇다고 대낮처럼 환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어둠 속에 서 있는 상대가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그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
말을 꺼내던 사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상대의 손에 들린 것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당랑의 머리였다.
“대, 대, 대형…!”
“아는 녀석인가?”
상대가 모당랑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런… 씨벌…!”
이가 딱딱 부딪쳤다.
모당랑의 머리를 본 것도 충격이었지만, 상대의 두 눈동자가 핏빛처럼 붉다는 것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왔다.
“네, 네놈이… 대형을…?”
“그렇게 됐다.”
“이런 개쉑…!”
파앗!
두려움과 분노가 부딪친 순간, 사적은 본능적으로 바닥을 차며 날아올랐다.
**
콰앙!
“이런 나쁜 새끼들!”
이야기를 듣던 추량이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그는 난장판이 된 실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부서진 탁자와 의자, 깨진 창문,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남자, 겉옷만 겨우 걸친 채 가랑이에서 피를 흘리며 입을 헤 벌린 앳된 여인.
그야말로 한순간에 풍비박산 나버린 한 가정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었다.
사비강에게 식칼을 들고 달려들었던 여인은 이야기를 마치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눈이 발갛게 충혈 되고 눈자위가 퉁퉁 부어올랐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추량이 입술을 쿡 씹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여인에게 내밀었다.
“이거….”
“…고맙습니다.”
여인이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눈가를 훔쳤다.
그녀가 사비강을 돌아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놈들이 다시 되돌아온 것인 줄 알고….”
“뭐, 괜찮소.”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그러자 추량이 불쑥 끼어들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 사부님은 강합니다. 그 빌어먹을 놈들보다도 훨씬!”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산발이 된 여인이 또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추량이 씨근거리며 말했다.
“사부님, 진상오적이라는 그 개놈들 찾아서 혼 좀 내줘야겠습니다!”
“네가 혼내 주려고?”
“아뇨. 그건 사부님이….”
“됐다.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사부님!”
“어차피 놔둬도 알아서 자빠질 거다.”
“그건 무슨….”
사비강이 대답 대신 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그보다 요깃거리 좀 없습니까? 사실 아까부터 배가 고파서요.”
그러자 추량이 뜨악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부님! 이 순간에 그런 부탁은 좀 아니잖아요!”
“왜? 너 배고프다고 했잖아?”
사비강이 큰 소리로 되묻자, 추량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른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흐느끼던 여인이 뒤늦게 ‘아!’ 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잠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주방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누룽지였다.
사비강이 활짝 웃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오, 맛있군. 너도 와서 먹어라. 맛이 꽤 좋다.”
“하하… 전… 배가 별로 고프지….”
“뭔 헛소리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 온갖 요리를 다 얻어먹을 것처럼 소리쳤잖아?”
“제, 제가 언제욧!”
추량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혹,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단지 배가 좀 고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뭔가 진수성찬 같은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아….”
추량은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난감해지고 있었다.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사양 말고 드세요. 대신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혹시라도 그 녀석들을 본다면 두 대협이 저희를 대신해서 복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물론…!”
“불가하오.”
사비강이 추량의 대답을 가로질렀다.
추량이 그대로 굳어 버리자, 여인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제가 무리한 부탁을….”
“진정한 복수라는 건 스스로 해야지. 누군가 대신해 주는 건 복수가 아니오. 하지만 뭐, 그놈들은 어차피 별로 살지 못할 거요.”
“어째섭니까?”
“흑귀를 잡으러 갔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지금쯤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있겠지.”
“아….”
여인은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윽고 누룽지 한 그릇을 다 비운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소. 넌 이제 배고프다는 말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추량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적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가족 앞에서는 차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비강이 여인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이건 누룽지 값이오.”
“예?”
여인이 올려다보자, 사비강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짧게 캐스팅했다.
“이레이즈 메모리(Erase Memory).”
“아…!”
그 순간 사비강의 손바닥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여인이 스르르 눈을 감고는 풀썩 쓰러졌다.
갑자기 아내가 쓰러졌는데도 넋이 나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딸 역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추량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사, 사부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기억을 지웠다.”
“…예?”
“모든 기억이 추억이 되는 건 아니니까.”
사비강이 무신경하게 말을 뱉더니 남자와 딸에게도 다가가 차례차례 마법을 캐스팅했다.
사실 기억을 지우는 마법인 이레이즈 메모리는 인간이 사용하기에는 다소 위험 부담이 있는 편이다.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은데다 자칫 실패할 경우 시전자에게 타격이 오기도 하므로.
때문에 특히 무공을 익힌 상대나 마나를 익힌 상대에게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사비강이 한 말 그대로 누룽지 값이었다.
추량이 쓰러진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비강이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가자. 이들이 깨어났을 때는 오늘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야.”
“예, 사부님!”
추량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사비강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