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귀환 마교관
244화
귀도살은 눈을 부릅떴다.
“쿨럭…!”
시뻘건 핏덩이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털썩!
그가 무릎을 꿇었다.
가늘게 떠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뚫은 검신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손바닥을 베며 피를 흡수해 갔지만, 귀도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이깟 손바닥의 상처가 대수랴.
목이 뚫린 마당에.
쑤욱.
검신을 쥔 그가 제 손으로 베르타스를 뽑아 냈다.
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터지면서 귀도살이 뒤로 넘어갔다.
쿵!
‘믿을… 수가 없군!’
사비강이 이기어검술을 이용해서 공격해왔을 때, 귀도살은 곧장 호신강기를 펼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르타스는 호신강기를 찢으며 힘 대결을 펼치듯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마침내 호신강기가 완전히 깨져 나가는 순간, 귀도살은 자신의 도를 휘둘렀다.
그 다음에는 소리만 들었다.
째캉!
푹!
뭔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살과 뼈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
믿을 수 없게도 귀도살의 도가 두동강 나면서 튕겨 나간 것.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목을 뚫은 베르타스를 내려다보았고, 부러진 칼자루를 확인해야만 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귀도살은 같은 생각을 다시 한 번 되뇌며 그렇게 숨을 완전히 거두었다.
쑤욱!
귀도살의 목에서 뽑혀 나온 검신이 곧장 사비강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이걸로 열 구가 채워졌군.”
“대단하십니다, 사부님! 저는 언제쯤 사부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추량이 두 손을 모으고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비강이 고개를 저었다.
“나처럼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지.”
“헉, 정말입니까?”
추량이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짓자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개죽음은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마.”
“겨우 그 정도로만요?”
“내가 말하는 개죽음은 차원이 달라.”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자못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차원이 다르지.’
마족이 침공했을 때 강호인들은 모두 처참하게 죽어 갔다.
그건 누구라도 개죽음이라 부를 만한 정도였다.
**
콰앙!
탁자가 부서져 나갔다.
“흐이익!”
남자가 머리를 감싸 쥐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주먹으로 탁자를 부순 사내가 씨근거리며 말했다.
“어이, 내 말이 영 말 같지가 않아?”
그는 진천오협(振天五俠) 중 둘째인 이협이었다.
하지만 그를 이협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절대로 ‘협(俠)’자를 붙이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그들의 별호는 진상오적(塵相五賊).
때문에 그 역시 실제로는 이협이 아닌, 이적(二賊)이라고 불렸다.
어쨌거나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남자는 공포로 오들오들 떨었다.
최근 들어 악명 높은 진상오적이 근방에 나타나 설치고 다닌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터였다.
한데 하필이면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줄이야.
“살,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남자가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이적이 두터운 손으로 까칠하게 돋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누가 죽인대? 그러니까 가진 걸 내놓으라니까.”
“정말 이게 답니다요. 믿어 주십시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촌부입니다요! 가진 게 다인 걸 어쩝니까요? 정말입니다.”
남자의 말에 이적이 눈썹을 찡그리고는 창가에 앉은 사내를 돌아보았다.
허리춤에 장검을 패용한 사내였는데, 눈이 족제비처럼 죽 찢어지고 뺨에 검상이 길게 새겨져 있어 인상이 무척 차가워 보였다.
그가 바로 ‘진천오협’이라는 별호를 만든 장본인이자, 진상오적의 일적을 맡고 있는 모당랑(謀螳螂)이었다.
무리는 그를 가리켜 ‘철혈검제(鐵血劍帝)’라는 별호로 부르고 있었는데, 이 역시 모당랑이 스스로 지은 것이었다.
이적이 목을 긁으며 물었다.
“대형, 어쩌지?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가 않은데. 도통 이런 곳에 그런 고급 야명주가 있을 리 없잖수.”
이적이 허름한 민가를 훑어보며 투덜거렸다.
이곳에 값비싼 야명주가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쳐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허름한 민가를 본 순간부터 긴가민가했다.
한데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단검으로 손톱을 다듬던 모당랑이 손끝을 훅 불고는 일어났다.
“정보 물어온 놈 누구야?”
그러자 한쪽 구석을 열심히 뒤지던 또 다른 사내가 뻣뻣하게 굳어서는 몸을 일으켰다.
“저, 접니다. 대형.”
머리에 두건을 쓴 사내는 진상오적 중 막내였다.
“이리와.”
오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자, 모당랑이 단검을 들어 그의 이마를 콕콕 찍었다.
단검이 이마를 찍을 때마다 피가 났지만 오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
“죄, 죄송합니다, 대형!”
“너 하나 때문에 우리가 지금 무슨 개고생이냐?”
“잘못했습니다.”
짜악!
순간 모당랑이 오적의 뺨을 올려붙였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모당랑이 다시 손바닥을 후려치려고 할 때였다.
한쪽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삼적이 앳된 여인의 머리채를 끌고 나왔다.
“흐흐흐! 대형! 그래도 여기 괜찮은 계집이 있는뎁쇼?”
“아악! 살려 주세요!”
여인이 울부짖었다.
“향아!”
엎드려 빌던 남자가 딸을 보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그때 다시 방안에서 또 다른 사내가 좀 더 나이 든 여인의 목덜미를 쥐고는 개처럼 끌고 나왔다.
“여기 농익은 계집도 있슴다!”
진상오적의 넷째였다.
아무래도 두 여인이 모녀지간인 듯했다.
남자가 모당랑에게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대협! 살려 주십시오! 정말 우리가 가진 건 이게 전부입니다요! 제발 제 아내와 딸은 봐 주십시오!”
“이거 참, 눈물 나는군.”
모당랑이 피식 웃더니 바짓가랑이를 붙든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퍽!
“어이쿠!”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한쪽 구석까지 날아가서 쓰러졌다.
모당랑이 음흉한 얼굴을 하고는 두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꺄악!”
삼적이 앳된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렸다.
“어떻습니까? 꽤 반반하지 않습니까? 흐흐흐.”
그가 여인의 목덜미를 혀로 핥아 올라갔다.
“흐윽!”
여인이 치를 떨며 몸서리를 치자, 삼적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었다.
“보십쇼. 이년도 좋아서 움찔움찔 거리는뎁쇼?”
“확실히 돈은 될 물건이구나.”
모당랑이 앳된 여인의 턱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자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중년 여인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내 딸에게서 그 더러운 손을 치워라!”
짜악!
순간 앳된 여인의 뺨이 휙 돌아갔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중년의 여인이 입을 딱 벌리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모당랑이 앳된 여인의 턱을 쳐들었다.
“네 어미가 한 짓이다.”
“그, 그게 무슨 소리…!”
다시 중년 여인이 말을 꺼내는 순간,
짜악!
또 한 번 앳된 여인의 뺨이 휙 돌아갔다.
모당랑이 나직이 읊조렸다.
“네 어미가 뭐라고 씨불일 때마다 내가 네 뺨을 때릴 것이다.”
“……!”
중년 여인이 흠칫거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적이 킬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형, 이년들 팔기 전에 맛 좀 보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대형 먼저 먹고 우리가 돌려 먹지요. 헤헤.”
삼적도 이죽거리며 말했다.
모당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두 여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런 촌구석에서 썩히기에는 좀 아까운 외모였다.
“벗겨 봐.”
“흐흐. 존명입니다요!”
사적이 먼저 중년 여인의 옷고름을 풀려는데,
“기다려 주십시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가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다시 모당랑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모당랑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를 보았다.
“뭐냐? 갑자기 가진 게 생각나기라도 한 거냐?”
“그, 그건 아니지만 대협들께서는 돈이 될 만한 기물을 찾으시려는 게 아닙니까?”
“뭐, 그런 셈이지.”
“제가 기물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요.”
“기물이 있는 장소를?”
“예, 막대한 보화와 기물이 있는 장소를 압니다. 그 장소를 알려 드릴 테니 딸과 아내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흑!”
“흐음. 그 장소가 어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딸과 아내만은….”
“약조하지. 장소를 알려 주면 저 두 년은 건드리지 않고 돌아가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사례하자, 모당랑이 턱짓으로 삼, 사적을 물렸다.
“자, 이제 말해라. 그 기물이 있다는 곳.”
“말, 말씀드리겠습니다요. 한데… 그곳은 좀 위험하다는 소문이….”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아닙니다요! 아닙니다! 이 뒤쪽 보화산(寶化山) 중턱에 다다르면 남쪽으로 난 동혈이 하나 있습지요. 그곳에는 ‘흑귀(黑鬼)’라는 요물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전래동화 따위는 관심 없어.”
“진짭니다! 그곳의 기물을 노리고 들어간 자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 하지만 대협처럼 무공이 뛰어나신 분이라면 충,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흐음.”
모당랑이 턱을 괴고는 침음을 흘렸다.
그 짧은 순간도 남자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뭔가 대단한 비밀을 아는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인근의 주민이라면 모두 아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모당랑도 이미 들은 바가 있을 지도 몰랐다.
잠시의 시간은 벌었지만, 과연 그가 이걸로 만족할 것인가?
모당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당기는군. 한 번 가볼 필요는 있겠어.”
“흐흐흐! 흑귀인지 백귀인지 몰라도 진짜 그곳에 기물이 있다면 이거야말로 횡재한 것 아니오? 대형!”
이적이 들떠서 소리쳤다.
원래 모험을 좋아하는 그였기에 요물 따위의 소문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남자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 그럼… 제 아내와 딸은….”
“좋은 정보가 됐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 역시 저 두 년은 그냥 두기 아까워서 말이야.”
“그, 그런…!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약조란 깨지라고 있는 법이지.”
모당랑이 싸늘하게 웃으며 두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
“사부님, 배고파 죽겠습니다!”
“아직 소리칠 힘이 남아 있는 것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니다.”
“젖 빨던 힘이라는 말 모르십니까? 젖먹이 아기가 젖을 빨 때는 죽을힘을 다한다고 하지요. 제가 지금 그런 힘으로 소리친 겁니다.”
추량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지만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지속적으로 내공을 운기하면 배고픔을 잊을 수도 있다.”
“예에, 배고픔은 싹 잊고 편안하게 죽겠지요.”
추량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자, 사비강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어 버렸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편하게 대한 자가 있었던가?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누구든 그의 곁에 있으면 두려움으로 떨기만 했다.
가장 가까웠던 수하 헬무트 역시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회귀하고 나서는 그래도 특목반 생도들이 조금 격의 없이 대하긴 했다.
그럼에도 추량만큼은 아니었다.
“넌 내가 안 무섭냐?”
“예? 왜요? 혹시 그런 거 좋아하십니까? 막 군기잡고 절대 복종하고 혈서 쓰고 뭐 그런…?”
‘정말이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건 알았지만….’
사비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다. 마침 저기 민가가 있으니 잠깐 들렀다가 가자. 괜히 나도 배고파졌으니까.”
“오오! 좋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부님!”
두 사람은 산기슭에 위치한 민가로 들어갔다.
한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좀 이상했다.
분명 사람이 사는 것 같은데, 대문 한쪽이 부서져 있었고, 창문도 깨진 상태였다.
‘느낌이 이상한데….’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막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쉬이이잇!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