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귀환 마교관
239화
“야조대의 삼(三)이 죽었습니다.”
수하 각진(覺眞)의 보고에 백호당주 추희룡이 미간을 좁히고는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흉수는 누구인가?”
“그것이….”
“알아내지 못한 것인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각진이 송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추희룡이 그를 돌아보았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짐작되는 자는 있다는 말이겠군.”
“사비강입니다.”
각진의 말에 추희룡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유는?”
“그 시각 사비강이 보강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우연치고는 수상하군.”
추희룡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로 다가섰다.
중원의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하필 삼이 죽은 시각에 사비강이 같은 곳에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사비강이 어찌 그곳에?”
“아무래도 나비 장수를 찾아간 듯합니다.”
“나비 장수를!”
추희룡이 흠칫거리자, 각진이 보고를 이어 갔다.
“설백을 상대하던 자입니다. 나비 장수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긴.”
추희룡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각진이 문득 기척을 스르르 지워 나갔다.
잠시 후,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냐?”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사비강 교관님이 당주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사비강 교관이?”
추희룡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가 전음으로 각진에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삼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만나 보심이….]
[알겠네.]
그렇잖아도 한 번쯤은 사비강을 보고 싶었다.
한데 제 발로 찾아왔으니 오히려 좋은 기회이리라.
“모셔오게.”
시녀가 돌아가고 나서 잠시 후 사비강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가 활짝 웃으며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호당주님.”
“반갑소. 내 한 번 사 교관을 찾아가려고 생각은 했었소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리 앉으시오. 차를 내오게.”
추희룡의 명에 시녀가 물러가서 찻상을 차려 왔다.
사비강은 차를 음미하면서 이런저런 잡스러운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어차피 오늘의 목적은 서로를 떠보는 것.
두 사람은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가 사비강이 먼저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혹시 당주님은 취미가 없으십니까?”
“취미?”
“예를 들어 신병이기를 모은다거나, 영약이나 영단 혹은 그 어떤 신비로운 것을 수집한다거나.”
사비강이 말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무척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현재 사비강은 실내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특이점은 없군.’
하긴 뭔가를 숨겼다고 해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두진 않았으리라.
추희룡은 사비강의 질문에서 핵심을 골라냈다.
“하하하. 신비로운 것이라는 게 무엇이오?”
“글쎄요. 신비로운 건 말 그대로 신비로운 거죠. 모르시겠습니까?”
“하하. 사 교관께서는 그 신비로운 것을 본 적이 있나보오?”
아주 잠깐 사비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기에 추희룡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반면 사비강은 내심 확신했다.
‘뭔가 알고 있군.’
만약 추희룡이 마계 도구에 대해서 아예 모른다면 이렇게 되묻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자신과 같은 말을 꺼냈을 터.
“물론 본 적이 있지요. 오색천마상(五色天馬像)이라거나, 야명주(夜明珠)라거나. 아, 우연한 기회로 삭뇌충과 삭뇌기단을 본 적도 있지요.”
“그, 그러셨소?”
추희룡이 내심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쩐지 사비강이 쳐놓은 덫에 걸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 보통의 중원인이라면 저런 대답을 하지 않았겠는가?
한데 자신은 지나치게 그 ‘신비로운 것’에 의미를 두고 되묻기까지 한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추희룡이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물었다.
“한데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물어보시오?”
“사실 제가 재력이 좀 됩니다. 해서 당주님께서도 그런 취미가 있으시다면 소정의 선물을 드릴까 해서 여쭤 보았습니다.”
“갑자기 선물을? 내게?”
“사실 혈사련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더군요. 정도맹에서 왔다 하여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근한 멸시와 차별 그리고 온갖 비난까지. 후우.”
사비강이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진지한지 추희룡도 그대로 믿어 버릴 정도였다.
“타지 생활이 어디 쉬운 법이겠소? 다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쪽 맹에 볼모로 잡힌 우리 쪽 홍묘의 처지도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오.”
“그렇잖아도 최근에는 제가 홍묘님께 참으로 미안한 마음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선물로 환심을 사 보겠다는 거요?”
“다소 얄팍한 수작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제 나름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디서든 사람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이곳에서 잘 지내보려는 노력으로 봐 주십시오.”
‘이 미꾸라지 같은…!’
추희룡이 속내를 감추고는 찻잔을 들었다.
말은 참 잘한다.
하지만 야조대의 삼이 죽었다.
그가 죽은 곳에 분명 사비강이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게다가 하필 지금 시기에 찾아와서 ‘신비한 것’을 들먹이는 것도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그때 사비강이 다시 한 번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혹시… 신비한 것에 대해서 제가 너무 하찮은 것들을 말씀드린 건 아닌지…?”
추희룡의 표정이 내내 굳어 있으니 눈치를 보면서 묻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역시 추희룡의 입장에서는 흠칫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속을 너무 보이고 있군!’
추희룡이 얼른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오. 그런 게 신비롭지 않으면 뭐가 신비롭겠소?”
이런 젠장!
서둘러 수습한다는 게 자꾸 말실수를 한다.
이런 식으로 답하면 ‘신비로운 것’에 대한 정의를 두고 쓸데없이 설전을 벌이는 꼴이 아닌가?
마치 진짜 신비로운 건 따로 있는데 애써 감추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면 평소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저라면 어찌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후후. 말씀은 고맙소. 하나, 나도 재력이라면 충분하오. 사 교관의 뜻은 내가 잘 알았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말을 마친 추희룡이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허를 찔러 갔다.
“한데 지난번에 보강현을 찾은 것도 혹시 그 신비로운 것을 구하러 간 것이오?”
“아, 그런 셈이지요. 한데 제가 보강현에 갔다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후후. 그야 그곳에 임무로 파견되어 있던 수하가 봤다고 해서 알고 있었소.”
“대체 무슨 임무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사비강이 얼른 말을 매듭짓고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추희룡은 그런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며 적절하게 이야기에 응대했다.
대략 한 식경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나도 사 교관을 만나서 좋았소. 언제든 또 찾아오시오.”
“감사합니다.”
사비강이 씩 웃어 보이고는 포권을 취했다.
사비강이 나가고 나서 추희룡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저만치 서 있는 추량을 만나서 걸음을 옮기는 사비강이 보였다.
추희룡이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매하군. 하지만 뭔가를 아는 것 같다.”
한편, 사비강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간 추량이 전음으로 물었다.
[사부님, 어땠습니까?]
[확실하다. 뭔가를 알고 있다.]
창가에 선 추희룡을 등진 사비강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언젠간 다시 이곳을 찾아와야겠다.]
[또요?]
[저곳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어떻게 아십니까?]
[글세… 내가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다는 게 증거지.]
[예에?]
사비강의 대답에 추량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증거가 그러냐는 듯.
하지만 사비강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추희룡의 방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다. 아니, 살펴보지 못했다.
추희룡이 너무나 예민하게 기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희룡 정도의 초절정 고수를 앞에 두고서는 탐지 마법을 쓰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다.
무공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마법을 캐스팅하는 순간 마나가 움직이면서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찰나를 추희룡 같은 고수가 놓칠 리가 없을 터였다.
한데 오늘 추희룡은 지나칠 만큼 기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대면하더라도 서치와 같은 탐지 마법을 사용하기 어려운 판에,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으니 아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즉, 남이 보기에는 평범하게 마주 앉아서 차를 한 잔 기울이는 것 같았지만, 실상 추희룡은 사비강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동공의 움직임과 호흡마저 신경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잠깐 멈춰 섰던 추량이 얼른 달려와서 다시 물었다.
[오늘 수업도 다 끝났는데, 이젠 어디 가십니까? 일정이 없으면 모처럼 술….]
[술 마실 틈 없다. 포섭 작업을 마저 해야지.]
[조금은 쉬엄쉬엄 하십시오. 요즘 사부님을 보면 너무 바쁘십니다.]
[나도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고 싶다. 하지만 할 일이 많아. 모든 건 적당한 시기가 있는 법이지.]
[혈사련 인사들 포섭 작업은 북천각주가 알아서 잘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명단에 있는 다수를 사부님에게 호의적으로 돌려세우고 있다고요.]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가 돌려세울 수 없는 자도 있다. 그자는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해.]
[그자가 누군데요?]
[월섬당주(月蟾堂主) 소천악(召天惡).]
**
“어쩌고 있느냐?”
소천악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다가 물었다.
시종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여, 여전히 그, 그대로 있습니다.”
“뭐야?”
소천악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시종이 어깨를 오들오들 떨면서 얼른 말을 붙였다.
“수, 수차례 당주님의 뜻을 전했습니다만, 꾸,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당, 당주님을 뵙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네놈은 대체 그놈의 말을 전하는 시종이냐, 내 수발을 드는 시종이냐!”
“죄, 죄송합니다!”
“몇 번을 말해야 되겠느냐? 볼일 없으니 썩 꺼지라고 전하라 하지 않았더냐!”
“이, 이미 말씀은 전했습니다만….”
“이런 젠장!”
소천악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콰장!
탁자가 부서지면서 차려진 음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시종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깟 일도 하나 못하는 네놈은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 내가 네놈의 모가지를 잘라서 그놈에게 뜻을 보이리라!”
“헉! 살, 살려 주십시오! 당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시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하지만 소천악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근 들어 그의 감정 조절 문제는 더욱 심각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한 번 불같이 일어난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시종은 오늘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구나, 생각했다.
성큼성큼 걸어온 소천악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르르르릉!
날카로운 쇳소리에 시종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거든 귀신이 되어서라도 내 뜻을 알려라!”
시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샤아아악!
검신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애꿎은 시종에게 왜 화풀이를 하십니까?”
불쑥 들려온 목소리.
시종은 목덜미에 닿은 차고 날카로운 감촉을 느끼면서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원흉이 서 있었다.
또한 죽음으로 가는 삼도천(三途川)에 한 발 내딛는 이 순간, 아슬아슬하게 손을 잡아 준 인간이기도 했다.
정도맹에서 왔다는 교관.
사비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