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귀환 마교관
235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온통 얼굴이 붉은 사내가 아래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고개를 들고 다시 서쪽의 먼발치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뒷짐을 지고 나타난 사람은 등이 굽고 머리가 희끗한 노파였다.
다만, 그 역시 얼굴 전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기에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여기 있었구나.”
“오셨소?”
황면인의 말에 적면인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황면인이 적면인 곁으로 다가가 섰다.
“존야께서 흡족해 하신다. 이번에는 네 공이 크다.”
“아직 갈 길이 머오.”
“흘흘흘. 네 자신에게는 조금 관대해져도 되지 않겠느냐?”
“우습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살아보니 그렇더라. 너무 스스로를 옭아매기만 해도 성격 버리더라고.”
“성격 좋게 실패하느니, 성격 좀 버리고 성공하겠소.”
황면의 노파가 적면인을 슬쩍 올려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먼발치로 던졌다.
“대법은 성공하였느냐?”
“…….”
적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황면인이 혀를 끌끌 찼다.
“잔인한 녀석.”
“후후후. 이 세상이 원래 잔인한 곳 아니오?”
적면인이 차갑게 웃으며 황면인을 내려다보았다.
황면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해맑던 아이는 어디에 갔누?”
“그 해맑던 아이는 예전에 죽었소. 당신이 죽이지 않았소?”
“고얀 놈.”
둘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때론 침묵이 몇 마디 말보다 수다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귀에 들리는 말은 없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마음의 수다를 먼저 깨버린 쪽은 황면인이었다.
“얼마나 버티겠누?”
“이 각. 좀 길면 반 시진은 버틸 거요.”
“그게 해낼 것 같으냐?”
“모르겠소. 그러길 바랄 뿐.”
“쉬엄쉬엄 해라. 이만해도 충분히 잘 해왔다.”
이윽고 황면인이 몸을 돌리고는 걸어갔다.
절벽에 홀로 남은 적면인은 다시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보았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문득 날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는 한껏 웅크리고 있을 때다.
더 높이 날아오를 그날까지 지금은 최대한 웅크리고 웅크려서 힘을 비축해야만 한다.
적면인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될 때까지 할 거요. 될 때까지….”
그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만큼이나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꽈다앙!
거칠게 튕겨 나간 사비강이 나무 기둥을 부수며 쓰러졌다.
“크읏!”
그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까드드득. 뚜두두둑!
사비강이 이맛살을 잔뜩 구겼다.
“설백…?”
하지만 설백은 사비강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끄으으으윽!”
침을 길게 늘어뜨린 그가 입을 찢어질 듯 벌리고는 신음을 흘려냈다.
어깨가 기이할 정도로 높아졌고, 등은 활처럼 굽었다.
양손은 뼈마디가 부풀어 오르면서 거대해졌고, 양발도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시커먼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오러와 내공이 서로 몸속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인지, 연신 가슴과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퍼엉! 퍼엉!
“크아아아아!”
마침내 설백이 허리를 활짝 젖히고는 포효했다.
그 순간 사방으로 뜨거운 기풍이 훅 불어 나갔다.
설백의 전신에서 누런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더 이상은 체내의 폭발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저게 뭐지?’
튀어나온 두 개의 뿔, 거대해진 양손과 발. 칼날처럼 날카롭고 길게 자란 발톱. 세로로 길어진 눈동자에 전신에 새겨진 황금빛 줄무늬까지!
얼핏 보면 마계에서 자주 보던 마수와 닮은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기반은 분명 설백이었다.
만약 이곳이 마계였다면 틀림없이 ‘키메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법인가?’
변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대략 일 각의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발작하듯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도 공격과 방어에는 충실했다.
어딘지 중원의 대법과 마계의 결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나타난 것 같은 효과.
‘역시 그 복면인들의 짓인가?’
적어도 설백 스스로가 저런 모습을 원했을 리는 없다.
그가 의식을 잃은 와중에 그때의 복면인들이 대법이든 뭐든 수상한 짓을 한 게 분명하다.
한편, 몸이 기이하게 변한 설백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황홀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아아. 기분이… 좋잖아?”
양손과 발이 괴물처럼 기형적으로 변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현재 느껴지는 쾌감이 극도로 황홀했기에.
마침 저만치 서 있는 사비강이 보였다.
찰나,
팟!
설백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비강 앞에 나타났다.
씨익.
그가 입매를 치켜 올리는 순간,
콰아악!
거대한 손이 사비강을 덮쳤다.
“큿!”
사비강이 베르타스로 막아냈다.
검과 손이 부딪쳤음에도 금속성이 울렸다.
까드드득!
손아귀가 오므려지자, 칼날처럼 길게 자란 손톱이 사비강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콰악…!
“큭…!”
순간, 사비강이 바닥을 박차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스톤 월!”
꾸드드드드득!
갑자기 땅바닥에서 돌 벽이 솟구쳐 오르자, 사비강에게 달려들던 설백이 튕겨 나갔다.
“쥐새끼 같은 놈!”
설백이 탁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곧장 돌 벽을 부수면서 달려왔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사비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상대의 변형에 놀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덤비는 마수는 이미 마계에서 숱하게 겪은 바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설백은 마계의 마수와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기분이 좀 좋아진 것 같은데 미안하게 됐군!”
사비강이 말을 뱉기가 무섭게 바닥을 차고 맞부딪쳐 갔다.
“쿠와아아악!”
설백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타앗!
동시에 사비강이 바닥을 차고는 날아올랐다.
“하아앗!”
기합성과 함께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내질렀다.
쑤우우우웅!
순간 오러가 강기처럼 맺히면서 베르타스를 덮었다.
츄아아아악!
베르타스가 그대로 설백의 가슴팍을 뚫었다.
“크아아아악!”
설백이 입을 찢을 듯 벌리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 순간, 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쩌적… 쩌적… 쩍!
설백의 피부가 조각조각 갈라지는가 싶더니,
쑤아아아아앙!
전신의 갈라진 피부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건 단순한 빛줄기가 아니다.
오러로 뭉쳐진 유기체나 다름없다.
‘오러 웹(Aura web)…!’
사비강이 흠칫거리고는 물러났다.
하지만 오러 웹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빛살과 같은 속도다.
샤아아아아아!
수천 아니, 수만 갈래의 실이 사비강을 꽁꽁 에워쌌다.
마치 거미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감싸 버리는 것처럼.
사비강은 순식간에 새하얀 오러 웹에 걸려들었다.
‘칫, 늦었나?’
하지만 절망하진 않았다.
마계에서도 오러 웹에 갇힌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던전에서 마수를 사냥할 때, 보스 몹을 잡게 되면 심심찮게 오러 웹이 뿜어지곤 했다.
보통 그렇게 오러 웹에 갇힐 경우에는 죽거나 보상을 얻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대법에 걸려 변형된 중원인의 오러 웹에 걸려 봐야 얻을 게 뭔가?
‘재미없게 됐군!’
그 생각을 끝으로 새하얀 오러 웹은 사비강을 완벽하게 감싸며 누에고치처럼 굳어 갔다.
**
“그래서 그냥 보내주었단 말씀입니까?”
“예.”
류여중의 대답에 독고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잔뜩 이맛살을 구겼다.
“정말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보내주었다는 말입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적서향을 뿌렸습니다.”
“아, 물론 그러셨겠지요! 하지만 놈이 어딜 가는지는 적어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고진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세상에.
볼모로 잡은 자를 그냥 아무렇게나 풀어 주었다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는 볼모가 아니라 교관으로 온 것이라고 치자.
그래도 혈사련의 입장에서는 그를 볼모처럼 붙잡아 두고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냥 내보낸단 말인가?
물론 적서향을 뿌렸다지만, 지금 당장 그놈이 뭔 일을 꾸민다고 해도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독고진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감시자도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약조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허! 언제부터 우리가 그리 신의를 따졌습니까?”
“감시자를 붙인다면 모두 찾아내 죽일 거랍니다.”
류여중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뭔가 우스웠다.
그 엄포가 두려워서 감시자를 붙이지 않았다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그건 아니다.
엄밀히 따져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만약 사비강이 본련의 분타를 친다거나 할 목적이었다면, 굳이 감시자를 붙일 의미가 없다.
당연히 보고가 올라올 테니.
그렇다면 정말 개인적인 볼일이라는 뜻인데….
괜히 감시자를 붙였다가 발각이 된다면 그에게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류여중이 생각하기에 사비강이라면….
‘충분히 감시자를 찾아낼 것 같단 말이지.’
차라리 언제든 찾아낼 수 있는 적서향을 뿌려 둔 것으로 만족하는 게 낫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비강의 행방만큼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으니.
독고진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린답니까?”
“보름 안에 돌아온다 했습니다.”
“이제 이레가 지났으니 딱 절반이군요. 허참.”
“기다려 봅시다. 늦으면 금청서를 풀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이제 와서 별 수 없지요.”
독고진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들 무른지 모르겠다.
사비강을 죽이겠다는 설서린은 혼인을 하고 싶다고 했단다.
도대체 죽이자는 건지, 같이 살자는 건지.
게다가 북천각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비강을 칭찬하며 다니질 않나.
북천각주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뜸 찾아가 욕하며 다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
독고진이 입을 꾹 다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꼬박 세 시진이 지났다.
설백과 사비강을 꽁꽁 감싸 버린 실타래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 줄기가 불어 왔다.
낙엽이 굴러와 그 커다란 누에고치에 마구 부딪쳤다.
날아든 잎사귀에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쩌적… 쩍…!
누에고치가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빛이 터져 나왔다.
동녘에서 밝아 오는 여명보다는 훨씬 강렬한 빛이었다.
마침내,
쩌어어억!
알처럼 단단하게 굳은 누에고치가 절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완전히 기력이 빠져나간 채로 비쩍 말라 버린 설백과, 오묘한 기운을 전신에서 피워 올리는 사비강이었다.
쑤아아아!
순간, 주변으로 너울거리던 기운들이 사비강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마침내 사비강이 눈을 떴다.
“후우우우!”
그가 길게 숨을 내쉬는 동안, 비쩍 마른 설백이 그대로 풀썩 쓰러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사비강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보상이 생각보다 쏠쏠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