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귀환 마교관
229화
“끄으윽…!”
바위 구석에 처박힌 설수민이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은 마치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여서 부러져 있었고, 전신이 퉁퉁 부어오른 탓에 그 수려한 외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비강은 단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다.
오로지 검집을 이용해서 마구 구타만 했다.
손속에 사정은 두지 않았다.
심지어 말도 섞지 않았다.
오로지 두드려 패는 일에만 몰두했다.
지켜보던 신생조원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리고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맹가숙 일당은 아예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사람이 저렇게 두드려 맞고도 숨을 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수민이 이렇게까지 맥없이 당하리라곤.
그것도 검은 뽑지도 않은 교관에게.
사비강이 구겨져 있는 설수민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설수민의 머리 위에 한쪽 발을 척 올렸다.
“너희들은 오랜만에 날 좀 화나게 만들었다. 계도가 좀 지나쳤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교관도 사람이라서 말이지.”
“끄으윽…!”
설수민이 이를 악물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사비강이 발로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눈 깔아라.”
“크읏…!”
퍼억!
사비강이 발로 걷어차자 설수민이 다시 저만치 굴러가 버렸다.
“오라버니!”
마침 공터 한쪽에 서 있던 설서린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설수민은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것인지 설서린 쪽으로 힘 없는 눈길을 던질 뿐이었다.
“오라버니…!”
금세 설서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가 가늘게 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생각보다 사비강이 강했다.
오라버니가 저렇게 맥없이 당하는 모습을 본 게 언제던가?
그래, 십여 년 전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감히 오라버니를…!
설서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전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설수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힘겹게 손을 뻗었다.
“린아… 그만….”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설서린에게 닿기에는 너무나 희미했다.
사비강이 설수민의 시선을 쫓아 돌아섰다.
설서린의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녀가 허리띠를 풀더니 척 늘어뜨렸다.
‘채찍?’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붉은 가죽이 척 늘어진 채찍은 꽤나 길었다.
다음 순간,
파앗!
설서린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휘리리릭!
곧이어 그녀가 손을 뻗자 무서운 속도로 채찍이 날아들었다.
사비강이 얼른 옆으로 몸을 굴리며 피하자, 채찍이 그대로 바닥을 때렸다.
콰앙!
가죽이 내려친 것 답지 않게 폭음과 비슷한 소리가 들리면서 바닥이 움푹 파였다.
따다다당!
튀어 오른 파편을 실드로 막아내며 사비강이 곧장 설서린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라고 봐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라.”
쉬이이잇!
그가 검집 채로 내질러 가는 순간,
휘리리릭! 차악!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채찍이 그대로 검집에 휘감겼다.
사비강이 검집을 잡아당기자, 설서린의 몸이 연처럼 딸려 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우우우웅!
붉은 가죽 끈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촤촤촤촤촤촤앙!
놀랍게도 가죽 끈에서 뾰족한 가시가 무수히 돋아나는 것이 아닌가?
피츄츗!
길게 자라난 가시 때문에 사비강이 얼른 검집을 놓고 베르타스만 뽑아 냈다.
쉬이이잇! 콰앙!
채찍에 감겨 날아간 검집이 그대로 바위를 부수며 떨어졌다.
화르르르륵!
가시가 돋아난 채찍은 이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비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그거… 어디서 난 거냐?”
하지만 설서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늦기 전에 내려….”
하지만 말을 매듭짓지는 못했다.
고개를 든 설서린.
그녀의 표정이 어딘지 홀린 듯했다.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한 피부는 여전했지만, 그녀의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눈동자에는 묘한 글자가 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설서린이 히죽 웃었다.
“이미 늦었는데?”
찰나,
파앙!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슈콰아앙!
사비강이 있던 자리가 폭약이라도 터진 것처럼 박살났다.
만약 조금만 늦게 피했더라면, 박살 난 것은 바닥이 아니라 사비강이 되었으리라.
“귀찮게 됐군.”
사비강이 혀를 차고는 설서린의 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호호호! 어딜!”
설서린이 앙칼진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휙 돌리고는 채찍을 휘둘렀다.
화르르르륵!
불에 타오른 채찍은 그야말로 화룡이 연상될 만큼 날렵하게 움직였다.
촤아아악!
매섭게 날아든 화룡이 베르타스를 휘어감으며 똬리를 틀었다.
뜨거운 불길이 얼굴마저 태워 버릴 기세로 사납게 이글거렸다.
사비강이 재빨리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베르타스에 감긴 채찍을 풀어냈다.
파바바바바밧!
순식간에 멀어진 사비강이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순간 이동했다.
팟!
설서린의 배후로 돌아선 사비강.
하지만 붉은 채찍만큼은 사비강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화르르륵!
마치 제 의지를 가진 것 마냥 화룡이 몸을 뒤틀며 곧장 사비강을 향해 쇄도했다.
“하앗!”
사비강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화룡의 머리를 베르타스로 내려찍었다.
쩌어엉!
치이이이익!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르타스에 냉기 속성을 불어넣은 탓이다.
물과 불의 싸움.
화룡과 수룡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는 상황!
치이이이익!
뜨거운 열기가 차츰 식어 가자, 화룡이 재빨리 물러나며 허공에 똬리를 틀었다.
사비강 역시 베르타스를 거두고는 훌쩍 물러났다.
‘틀림없군. 마칸의 꼬리.’
마칸의 꼬리란, 설서린이 휘두르고 있는 채찍의 정식 명칭이었다.
한데…
‘저걸 처음 가지고 있던 자가 설서린이라니. 의외로군.’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어째서 그의 기억에 설수민과 설서린이 없었던 것인지.
아마 이 두 사람은 정사대전 중에 죽었을 운명이리라.
그리고 설서린이 가진 이 마계의 병기는 정파 무인이 습득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무인 역시 마계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마족에게 ‘마칸의 꼬리’를 허무하게 빼앗기고 죽는다.
한데 자신이 개입하면서 미래가 조금 바뀐 것이다.
정사대전은 일찌감치 종료되었고, 그 바람에 설 남매가 전쟁 중에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마칸의 꼬리를 여전히 설서린이 갖고 있게 된 것이리라.
다만 문제는….
‘역시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있군.’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설서린을 응시했다.
“히히히.”
설서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양쪽 뺨은 이제 문신을 새겨 넣은 것처럼 붉은 줄무늬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칸의 꼬리는 베르타스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담겨 있는 병기다.
다루는 자의 정신력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은 이상 병기에 혼을 빼앗기고 만다.
지금 설서린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히려 병기가 사람의 정신력을 지배해 버리는.
“하아아. 몸이… 뜨거워….”
설서린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몸을 꼬았다.
한편, 한옆에 쓰러져 있던 설수민은 점점 변해 가는 설서린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린아…! 그만…!”
하지만 그의 희미한 목소리가 설서린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린아!’
**
“린아!”
설수민의 다급한 목소리에 어린 설서린이 눈을 번쩍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설수민의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버릴 것 같은.
입술을 꾹 씹고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눌러 참는 설수민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오라버니…?”
설서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불렀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인지할 수 없었다.
왜 오라버니가 자신을 보며 이렇게 울먹이는 것인지.
왜 이렇게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설수민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는 것이었다.
“린아!”
설수민이 설서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설서린이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겼다.
“오라버니… 왜 그래?”
멍하니 되묻는 설서린.
그녀는 설수민의 어깨너머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험악한 표정을 확인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그들을 둘러보다가 한쪽 끝에 쓰러져 있는 시신에 눈길이 향했다.
‘저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시체.
아, 기억났다.
위지세가의 차남 위지강(慰遲强)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왜 저기에 저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걸까?
팔과 다리는 찢어져 나가 있었고, 몸통에 머리만 겨우 붙은 모습이다.
그래, 분명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며 접근하던 자였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앞을 막아서며 제지했는데… 그 후로는….
‘기억이 안 나.’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또 다른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저 자는….’
풍제문(風帝門)에서 촉망받는 후기지수인 호운평(胡雲平)이었다.
그 역시 사지가 잔혹하게 찢어진 채 절명한 모습이었다.
그의 곁으로는 위지강과 호운평의 호위 무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설수민의 전음이 설서린의 귓가에 닿았다.
[어서 도망쳐.]
[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볼게. 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도망쳐야 하는 건지.
어째서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잔뜩 화가 나 있는 건지.
그리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며 접근하던 두 사람과 그 수하들이 왜 저렇게 잔인하게 죽어 있는 건지.
그때 둘러싸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사공을 익힌 년이다!”
“마공을 익혔을 지도 모르지!”
“당장 저 년을 쳐 죽여야 한다!”
성난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마구 울렸다.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
웅웅웅.
손끝에서 희미한 반응이 일어났다.
슬쩍 내려다보니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채찍이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허리띠다.
강호기행 도중 우연히 습득한 물건이라며 주신 거다.
허리에 차면 제법 귀티가 나는 허리띠 형태가 되었고, 풀어 내면 채찍이 되는 무기였다.
“헉!”
순간 설서린이 머리를 쥐고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린아, 왜 그래?”
설수민이 설서린의 어깨를 붙들며 소리쳤다.
설서린은 덜덜 떨었다.
뒤죽박죽 마구 뒤엉킨 기억이 머릿속을 아무렇게나 들쑤셔댔다.
우악스러운 손길.
묶인 채로 울부짖는 설수민.
귓가를 간질이는 웃음소리.
‘죽여라!’
귀신같은 목소리.
‘찢어라!’
섬뜩한 속삭임.
찢겨져 나가는 살점들과 팔다리.
솟구치는 핏물과 비명.
“으으…아아아악!”
설서린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