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귀환 마교관
224화
“이해가 안 됩니다.”
기마 자세를 한 채로 운기를 하는 추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첫날에는 반나절도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 정도쯤은 서서 대화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하던 사비강이 눈을 뜨고는 물었다.
“뭐가?”
“왜 장후겸에게 빚을 진 것처럼 행동하셨습니까? 그냥 천만 냥을 건네줬어도 그자의 입장에서는 엎드려서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텐데.”
“뭐, 두 가지를 생각해서지.”
“두 가지라니요?”
“하나는 내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게 하려는 것. 다른 하나는 죄책감을 이용한 것.”
“무슨 뜻인지….”
“그자는 지금쯤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렇겠지요. 그자가 사부님에게 수하를 보낸 적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지. 하지만 그자의 입장에서는 내 착각으로 인해 본인이 큰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겠지. 그것도 천만 냥이나 되는 빚을 해결했으니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무릇 인간이란 원인 모를 현상에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런데 그 원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더욱 그렇지. 결국 그자는 내가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을 거다.”
“아….”
“결국 장 각주는 앞으로 더욱 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거야. 내 착각이 깨지지 않길 바라면서.”
“그런 뜻이 있었군요!”
“만약 네 말대로 아무 이유 없이 천만 냥을 척 건네줬다면 내 의도를 의심부터 하고 봤겠지. 하지만 그 원인이 착각에서 비롯된 걸 알았으니 지금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심정이겠지. 그리고 그런 상태라면 이쪽에서 더욱 다루기가 쉬운 법이야.”
“크아! 감탄했습니다, 사부님! 정말 심계가 대단하십니다!”
“그간 살아온 세월이 있지 않느냐?”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추량은 새삼 사비강이 달라보였다.
그러고 보면 사비강의 나이는 어지간한 노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나 마계의 시간이 더욱 느리게 흐른다고 하니….
그런데 가끔씩 튀어나오는 거침없는 행동과 엉뚱한 말투만 보면 가끔 그 사실을 잊게 만든다.
뭐, 마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불과 며칠 전인 이유도 있지만.
그때였다.
딸랑딸랑.
지하 연무실 한쪽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집무실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결계가 작동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출입한 자를 알리는 알람이었다.
“계속 버텨라. 다녀올 테니.”
사비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백호당의 무인이라고?”
사비강이 돌아서면서 물었다.
홍염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호당의 무인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그 보부상을 쫓았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보부상과 접선하는 건 목격했나?”
“죄송합니다. 백호당의 무인이 낌새를 챈 것인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홍염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보부상이 송악현까지 들어간 것은 확인했다.
그리고 송악현 주변을 촘촘하게 살폈다.
빠져나간 흔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상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배후 세력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백호당이 그 배후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사비강 역시 같았다.
‘백호당이라….’
문득 전에 만났던 백호당주 추희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도맹에 가장 온건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인.
하지만 이자에 대해서는 사비강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마계가 침공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죽은 이유가 모호하다.
그를 죽인 자는 바로 혈사련주.
어쩌면 뜻이 맞지 않은 것이 이유일 수도 있고, 점점 커지는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마왕에게 살해당한 이유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튼 추희룡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물론 홍염을 통해 조사를 지시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정도 이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왠지 상대하기 쉬운 자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든다.
한데 보부상과 연관이 있다면….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군.’
사비강이 생각을 거두고는 물었다.
“일단 송악현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 보부상부터 찾아내 봐.”
“알겠습니다.”
홍염의 기척이 스르르 지워졌다.
사비강이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보았다.
저만치 백호당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 녀석은 저기서 뭘 하는 거야?’
한참 아래쪽 공터에서 칼춤을 추는 유송령이 보였다.
**
쎄에에엑! 쉬잇!
거신도가 허공을 가르면서 쾌속하게 질주했다.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 가던 거신도가 어느 순간 회오리치는 물보라처럼 요동쳤다.
쉭쉭쉭쉭!
작은 물결들이 마구 모여들면서 언뜻 난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칼부림으로 변한다.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린 물결은 바닥에 이르러서 다시 솟구쳐 올랐다.
쑤아아아앙!
칼바람이 허공을 가른다.
바람결에 날아든 낙엽이 거신도의 기풍에 세 갈래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유송령은 그대로 흐름을 쫓아갔다.
쩌엉!
마침내 거신도가 커다란 바위를 때렸다.
그제야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꽈르르릉. 쿵!
커다란 바윗덩이가 앓는 소리를 내지르며 절반으로 쩍 갈라지고 말았다.
한바탕 요란한 칼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곁의 바위에 앉은 석탄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송령은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뭔가를 느꼈다.
‘달라졌어!’
확실히 다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깨달음을 몸으로 느꼈다.
‘무게를 느끼지 말고 흐름을 느껴라!’
사비강이 해준 그 한 마디가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거신도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거신도를 태산처럼 여기고 휘둘렀다.
한데 이제 보니 거신도는 태산이 아니다.
바다다!
그 크기와 달리 변화무쌍하고, 거칠며, 힘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도다.
공력을 운기할 때도 이전과 달리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랬더니 모든 게 달라졌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었다.
거신도를 손에서 놓치기까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래서 사비강의 조언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잊었던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가 생각났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거신도를 갈면서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셨다.
“거신도는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바람과 같다.”
어떤 면에서 사비강의 조언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와 다르게 도법을 펼쳤다.
몇 번씩이나 칼을 떨어뜨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뭔가 잡힐 듯하다.
유송령이 힐끔 옆을 보았다.
아까부터 커다란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석탄강.
그 역시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느라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마저 살짝 들었다.
유송령은 기다렸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석탄강은 꽤 오랫동안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굴러갔다.
유송령은 조금 전에 느낀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마침내 석탄강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가 유송령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기….”
“저기…!”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석탄강이 양보했다.
“말해.”
“잠깐 대련해볼래?”
석탄강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바라던 바야.”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유송령을 마주보며 섰다.
스르르릉.
길고 완만하게 굽은 환도가 매끄럽게 도집에서 뽑혀 나왔다.
유송령 역시 천천히 기수식을 취해 갔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달라졌어. 더 강해졌군!’
지난 세월 셀 수도 없을 만큼 서로 비무를 했던 두 사람이었다.
기수식만 취해도 상대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타앗!
경고 따위는 필요 없다.
늘 비무는 실전처럼 치러 왔으니까.
유송령이 먼저 몸을 날렸다.
쒸에에엑!
거대한 파도를 몰고 가듯 거신도가 석탄강의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석탄강은 섣불리 피하지 않고 참았다.
그리고 대도가 지척에 이른 순간이 되어서야,
탓!
바닥을 차며 훌쩍 물러났다.
역시 빠르다.
하지만 유송령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보통 때였다면 재빨리 운기하면서 도신을 거두어들이고 다른 변초나 허초를 이어 갔을 터였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흐름을 따라갔다.
쒸이이이잉!
거대한 칼바람을 일으키며 거신도가 허공을 베며 지나갔다.
그 틈을 타서 석탄강이 환도를 휘둘러 갔다.
쒸에엑!
전과 달리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집중은 하되 호흡을 자연스럽게 두었다.
운기의 흐름이 원활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달라!’
스카앙!
분명 유송령의 어깨를 벨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어깨를 베기 전에 칼을 멈추었겠지만.
한데 그러기도 전에 유송령의 거신도가 앞을 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늘었어! 확실해!’
그건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면서 또 상대에게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하앗!”
유송령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거신도를 그대로 휘둘러 갔다.
가볍다.
흐름을 쫓아가기 시작하니 거신도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팔이 늘어난 것처럼.
운신이 자유롭다!
‘너무 가벼워서 기분마저 유쾌해질 지경이야!’
쉭!쉭!쉭!
거신도가 번번히 석탄강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지만 유송령은 마냥 즐거웠다.
한편 석탄강 역시 그녀에게 도를 휘두르면서 쾌감을 느꼈다.
‘운기에서 막힘이 없다! 운기가 훨씬 유연해졌다! 도의 움직임에 답답함이 사라졌다!’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미친 듯이 서로 어우러져 칼춤을 추었다.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숱한 상념을 칼바람에 날려 버리고.
두 사람은 오래도록 칼춤을 추었다.
까앙!
마침내 두 사람이 불꽃을 터뜨리고는 서로 멀어졌다.
“훅, 훅, 훅!”
“헉, 헉, 헉!”
심호흡을 하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시선이 마주치자 풋 웃어 버렸다.
“하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마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유송령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어.”
두 사람이 비무를 시작한 게 오전이었다.
그러니 꼬박 한 나절 동안 비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문득 유송령의 시선이 저만치 우뚝 솟은 사비강의 숙소로 향했다.
“그 남자… 마냥 허세는 아니었나 봐.”
석탄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언덕 아래쪽에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