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귀환 마교관
219화
끼이이익, 철컹!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밀실로 들어선 사내는 얼굴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공진철에 구속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설백이 게슴츠레 눈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또 오셨군. 아직도 설명이 부족한가? 나는 아는 것을 다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고문이라도 당한 것인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적면인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일은 잘 해결될 것 같다.”
“그럼, 이제 날 죽일 건가?”
“글세…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설백이 대답 대신 적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무리 기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진 않다.
어차피 구걸한다고 해서 얻어낼 목숨도 아니고.
설백이 픽 웃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였겠지.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적면인은 말없이 웃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암회색의 단환이었는데,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냄새가 어찌나 역겨운지 코끝에 들이댔을 뿐인데도 설백은 구토가 치밀었다.
“젠장, 그것 좀 치워!”
“먹어. 그래야 산다.”
설백이 적면인을 빤히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적면인이 설백의 입속에 단환을 넣었다.
어차피 눈속임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설백은 단환을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쓰고 역겨운 맛이었다.
“내가 먹은 게 뭐냐?”
“월취매은단(月取埋隱團)이다. 짐작하다시피 독단이다. 잠복기는 한 달.”
“내게 남은 수명이 한 달이라는 뜻이군.”
적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백이 그를 빤히 노려보며 물었다.
“뭘 원하는 거냐?”
“딱히. 그저 동기 부여라고나 할까?”
“동기 부여?”
“당신이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을 좀 더 서두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지.”
“무슨 소리냐?”
적면인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당신에게 한 달의 삶이 남아 있다. 이제 뭘 할 건가?”
한 달의 삶이라.
설백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현실적인 질문이 불쑥 들어오자 절로 고민이 됐다.
한 달이면 너무 짧다.
뭔가를 이루기에도,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턱 없이 부족한 기간.
그렇다면 역시….
“그야 당연히….”
망설임 없이 대답하려던 설백이 움찔 떨었다.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을 꺼냈다.
“사비강을 제거하길 원하는군.”
적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깨달았다.
설백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그런 거였군. 사비강을 제거한 후에는?”
“해독제를 주도록 하지. 단, 기한은 알다시피….”
“한 달이라는 거군.”
따지고 싶은 건 많다.
하지만 설백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자신은 살아 있다.
그리고 삶은 곧 기회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그가 미소를 그렸다.
“좋아. 내가 그를 제거해 주겠네.”
“그럴 줄 알았지.”
적면인이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
**
“네? 지금 무슨 말씀을….”
추량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내용만 보면 명백한 농담인데,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헤헤헤. 사부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내가 널 놀려서 뭐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추량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점점 표정이 굳어 갔다.
“설마… 진심입니까?”
“그래, 진심이다.”
“사부님, 죄송하지만… 잠시….”
추량이 사비강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어 보았다.
사비강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야?”
“아니, 혹시라도 열이 있으신 건 아닌가 하고.”
“뭐,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아뇨, 아뇨.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건….”
추량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도 어지간히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필요할 때면 거짓말을 진짜처럼 꾸며대기도 하고.
그런데 사비강은 자신보다 훨씬 더 한 사람이었다.
‘농담을 하시더라도 도대체 말이 되게 하셔야지….’
도대체 마계는 무엇이며, 마법은 또 뭔가? 이미 미래를 살아봤고 회귀를 했다니?
“사부님. 제가 좀 멍청해 보였나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태연하게….”
그때,
화르르르륵!
“헉!”
추량이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어느새 사비강의 손바닥 위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비강이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파이어 볼이라는 거지. 화염 계열의 마법이야.”
그러더니,
쑤아아앙!
“우와악!”
추량이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콰아앙!
매섭게 날아간 화염구가 추량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서는 벽에 부딪치며 폭발했다.
다행히 벽은 멀쩡했다.
추량이 해쓱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건물은 걱정하지 마. 이곳 지하는 결계 때문에 어지간한 마법 공격에는 끄떡도 없으니까.”
“지, 지금 건물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욧!”
“그럼?”
“왜 갑자기 절 공격하시냐고요!”
“아, 그건….”
사비강이 곰곰이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짜증나서.”
“네에?”
“네가 날 안 믿으니까 짜증나서.”
“그게 무슨…!”
“지금도 못 믿겠냐?”
“제발 그만 좀 놀리세요. 사부님이 극양의 신공을 익혀서 절 시험하시는 걸 모를까봐 그러세요?”
“역시 안 믿는군. 그럼 이건 어때?”
순간 사비강의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콰지지짓! 콰지지짓!
그의 주변 공기가 차갑게 얼어 가더니 이내 뾰족한 얼음 화살이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
추량이 퀭해진 눈으로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극음의 무공까지…!”
“진짜 신경 거슬리게 하는 녀석이네.”
말을 마친 사비강이 손을 휙 젓자,
쒸에엑! 쒸에에엑!
“허억! 우악!”
추량이 얼른 몸을 날리며 피했다.
콰차앙!
아이스 에로우가 그대로 추량을 지나치면서 벽에 부딪치며 깨져 나갔다.
추량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깨져 나간 얼음 파편은 진짜였다.
어깨를 스친 차가운 감촉도 여실하게 느껴진다.
세상에 이런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말일까? 정말로 마계의 마법?’
하지만 그는 곧 도리질했다.
그럴 리가!
세상에 그런 게 어디에 있나?
사부는 원래 엉뚱한 구석이 있지 않던가?
필시 자신을 놀리는 것이리라!
그때,
쉬이이이잇!
“어헉!”
추량은 자신에게 똑바로 날아드는 아이스 에로우를 보았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
피하기는 이미 늦은 상황.
그가 얼른 양 손을 뻗으며 장력으로 맞섰다.
“이여업!”
콰차아앙!
촤아아앗!
장력에 의해 아이스 에로우가 산산조각 깨져 나가면서 추량이 뒤로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추량은 뻣뻣하게 굳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손.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극음의 신공?’
손바닥부터 전해진 한기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이내 턱이 달달 떨릴 정도가 되자,
“추워 보이는군.”
말을 마친 사비강이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직후,
화아아아아악!
“우와아악!”
느닷없이 사비강과 추량을 가로지르는 불기둥이 생겨났다.
그 어마어마한 열기 때문에 피부가 다 익어 버릴 듯했다.
물론 손바닥에 스며든 한기는 이제 씻은 듯 사라진 상태.
추량이 얼른 내공을 운기하면서 몸을 차갑게 식혔다.
“이제 알겠습니다!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러자 사비강이 이번에는 아이스 캐논(Ice Cannon)을 캐스팅했다.
짜자자자자작!
새하얀 광선이 쏘아지자 화마처럼 이글거리던 불길이 거짓말처럼 식어 가면서 바닥이 꽁꽁 얼어붙었다.
아이스 캐논이 파이어 월보다는 상위 레벨의 마법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진화될 수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닥 너머로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의심이 많은 건 좋은 거지. 하지만 그 의심을 내게 둘 필요는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추량의 표정은 이제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무위가 극양의 신공이든, 극음의 신공이든, 마계의 마법이든 상관없었다.
태어나서 이런 경이로운 무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그가 예의 그 존경심 가득한 얼굴로 사비강에게 절을 올렸다.
“사부님! 제게 그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싫어.”
“예?”
“괘씸해서 마음이 바뀌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꼭 열심히 연마해서 사부님의 수제자가 되겠습니다!”
“수제자는 지금도 많다.”
“에이, 사부님.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조만간 멋진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미 인근의 주루는 확실히 꿰고 있거든요. 물 좋은 곳을 이미 파악해 두었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배우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추량이 힘차게 대답하며 포권했다.
**
땀이 뚝 떨어졌다.
추량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 듯 후들거렸다.
벌써 얼마나 이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을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기마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마 자세를 한 상태에서 내공을 운기했다.
그것도 생전 처음 듣는 방식으로.
그 이름도 생소한 음양환유마나심법(陰陽換喩魔羅心法)이었다.
사비강이 독자 개발한 심법으로 내공을 마나로 치환하는 심법.
아무리 사비강이 옆에서 도와준다지만 익숙하지 않은 운기를 계속하다 보니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이겨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끄응. 사부님… 더 이상은 정말… 무, 무리….”
“뭐라고? 말을 똑바로 해. 잘 안 들려.”
“이젠 더 이상… 참기가… 힘듭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추량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굳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너의 열과 성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더냐? 아무래도 넌 내가 제자로 거두기에는 역량이 부족….”
“아닙니다!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추량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버럭 소리쳤다.
그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운기를 시작했다.
단전의 내공이 서서히 전신의 혈맥을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심장 부근에서 마나로 치환되자, 뻑뻑한 이물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렇게 얼마나 다시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으로 내공을 마나로 치환한 추량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더니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
사비강이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추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도 이만하면 오래 버틴 건가?”
무심한 말투였지만, 사실 사비강은 내심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음양환유마나심법을 처음으로 운기했다.
자신이 도와준 걸 감안하더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으리라.
‘역시 근성은 있는 녀석이군. 근데 이 녀석만 보면 자꾸 놀려 먹고 싶단 말이야.’
그때, 머리 위 어딘가에서 쿵쾅거리는 소음이 들려 왔다.
‘근성 있는 녀석들이 또 있나 보군.’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