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14화 (214/670)

# 214

귀환 마교관

214화

‘괴물이다! 저놈은 괴물이야!’

방각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철봉 위의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비 오듯이 땀을 흘리는 유송령과 달리 사비강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뽀송뽀송했다.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자신의 기수식 자세를 고쳐 준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제길, 그럼 앞으로 꼼짝없이 저 정파 교관에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건가?’

기분이 묘했다.

저 정도로 강한 자에게 배울 수 있다는 건 분명 기회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왜 하필 정파 무인이란 말인가?

물론, 흑도의 길을 걷는 다수의 무인들은 정파 무인의 무공을 훔쳐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대체로 강해지기 위해서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바로 흑도의 길을 걷는 무인들의 특성이니까.

하지만 훔쳐 배운 것과 정식으로 사부로 모시는 것은 천지 차이가 아닌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한편, 철봉을 올려다보는 적무린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뭔가 달라졌다.

유송령의 눈빛이.

마침내 받아들인 걸까?

아니나 다를까, 유송령이 경직된 표정을 풀더니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더 이상 겨루지 않아도 알 것 같아.”

“……?”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보자 그녀가 거신도를 등에 맸다.

“내가 졌어. 패배를 인정하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중들 사이에서 야유가 퍼부어졌다.

“뭐야? 정파 나부랭이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거냐? 차라리 장렬하게 목숨을 던져라!”

“애초에 생사투를 먼저 제안했으면서 목숨을 아까워하다니! 흑도의 수치다!”

“저 계집년, 진짜 벌써부터 눈이라도 맞은 거 아냐? 킬킬킬!”

온갖 야유가 쏟아졌지만, 유송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제야 사비강도 투기를 풀어 버리고는 피식 웃었다.

“이제야 배울 자세가 된 모양이군. 그럼….”

그 순간,

“엇!”

“떨어진다!”

무인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찰나의 빈틈을 이용해서 유송령이 철봉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배울 자세? 흥! 웃기지 마. 당신을 이렇게 속인 것만으로 만족하겠어.’

유송령의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정파 무인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비무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 알았던 아버지가 지고 말았다.

‘아빠! 무릎을 꿇지 마! 왜 그런 녀석들에게 무릎을 꿇는 거야! 아빠는 잘못한 게 없잖아!’

하지만 아버지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또 다른 용기라고 했다.

생사를 건 비무였지만 가족을 생각해서 일찌감치 패배를 시인한 것이다.

그때 정파 무인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단칼에 아버지의 목을 베어 버렸던.

더러운 사공을 익히고 함부로 설친 대가라며 차갑게 일갈하던 그 남자의 표정을.

이 년 전, 그자를 찾아냈지만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다짐했다.

죽을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겠노라.

‘그러고 보면 지나온 세월 참 악착같이 살았어.’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신이 죽을 줄이야.

억울한 심정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정파 교관이라는 작자에게 엿을 먹였으니 다행이다.

혈사련에서는 교관이 생도를 죽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흥! 꼴좋다!’

그렇게 눈을 감으려는데,

‘으음?’

순간 유송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추락하는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의식의 흐름 속에서는 매우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뭐야? 당신이 왜 같이 떨어지는 거야?’

놀랍게도 사비강이 몸을 날려서 유송령을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유송령이 철봉 아래로 뛰어내린 직후, 철봉을 박차고 달려와 몸을 날린 것이었다.

휘리리릭!

사비강이 그녀를 감싸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 바람에 사비강의 등이 바닥을 향했다.

‘이런 미친! 같이 죽자는 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찰나지간 사비강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팍, 퍼져 나왔다.

실드였다.

동시에,

촤촤촤촤촤촤촤앙!

철판 바닥에서 창살이 무서운 속도로 솟구쳐 올라왔다.

탕!

마치 금속이 부딪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놀랍게도 사비강의 몸은 창살에 꿰뚫리는 대신 그대로 튕겨 올라왔다.

실드가 깨지면서 사비강은 그대로 플라이 마법을 펼쳤다.

휘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창살 위를 한 뼘 정도 떠서 달리더니 그가 곧 철판 밖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이 복잡하고도 현란한 과정은 매우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저게 무슨 경신법이지?’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야?’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추량은 그저 감탄한 표정으로 눈망울을 빛낼 뿐이었다.

‘역시, 사부님이야!’

사비강이 유송령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쓸데없는 짓을.”

“…….”

유송령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볼 뿐이었다.

‘이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런 경우는 그녀의 계획에 전혀 없는 것이었다.

지금쯤 자신은 창살에 꿰뚫려 불에 타 죽었어야 한다.

그리고 사비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곳 사람들에게 해명하느라 바빠야 했다.

그런데…

‘같이 뛰어내려? 저 위에서?’

다음 순간,

짜악!

유송령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사비강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제불능이군. 분신과도 같은 칼을 함부로 내던지질 않나, 이제는 아예 목숨을 내던져?”

“…당신이….”

“뭐?”

“당신이… 당신이 뭔데?”

“뭐라는 거야? 그게 생명의 은인에게 할 말이냐?”

“누가 살려 달라고 했어? 나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사비강이 눈매를 여미고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이내 그의 표정에 차가운 비소가 감돌았다.

“크게 착각하는군.”

“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강한 것처럼 보이냐?”

“무슨 말을….”

“진짜 강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다.”

“……!”

“죽음과 절망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죽음은 그저 절망으로부터의 회피일 뿐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딴 걸 용기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거든.”

사비강이 몸을 휙 돌리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유송령은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죽음과 절망.

그랬다.

그녀는 지금까지 줄곧 죽음과 절망을 동일하게 생각해 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용기라고 생각해 왔다.

한데 아니다.

절망으로부터의 회피.

죽음이란 고작 그 정도일 뿐이다.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어쨌든 네가 패배를 인정했으니 내일부터 꼬박꼬박 출석하도록.”

“…….”

유송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려는데,

척.

어느새 다가온 석탄강이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사비강은 곧장 출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스스스스슥.

무인들이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리면서 그를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이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뭐하는 짓이냐?”

“어이, 교관 나리. 내기의 결과는 정직해야지. 안 그래?”

“그래서?”

“그쪽은 이겼다고 볼 수 없어. 철봉에서 결국 떨어졌으니까.”

“유송령이 패배를 시인한 걸 들었을 텐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결국 그쪽도 철봉에서 떨어졌잖아? 그러니 이건 비긴 거야. 후후.”

교묘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사비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조금 전까진 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기분이 별로야. 그래서 네놈들도 같이 계도를 시켜야….”

그때였다.

스윽.

뜻밖에도 사비강 앞으로 나선 자는 적무린이었다.

그가 날카롭게 여며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모두 물러나라. 억지다.”

“뭐야? 당신도 벌써 이자의 편에 선 거야? 날고 긴다는 적무린도 별 것 아니었군. 이제 보니 정파 나부랭이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쉬익! 철컥!

순간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는 발검!

적무린은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손가락을 베었다.

그 바람에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간 무인이 뒤늦게 눈을 부릅뜨고는 비명을 내질러댔다.

“크아아악! 내 소온!”

“이번엔 경고다. 다음엔 손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적무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렀다.

손가락을 잃은 무인이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저 개자식이 날 공격했어! 다들 뭐하는 거야? 저놈을 죽여 버려! 정파와 손을 잡은 놈이다!”

“어이, 적무린! 네놈은 변절자냐!”

사파의 무인들이 저마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들이 뿜어대는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적무린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의 그 썩은 사고방식이 흑도를 욕 먹이는 거지.”

“뭣이?”

무인 한 명이 일갈을 내지르며 달려들려고 하는 그때,

“됐어. 이제 그만해.”

불쑥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

석탄강이 부축하고 있던 유송령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아. 내가 패배를 먼저 시인한 거야. 이 비무는 내가 졌어.”

당사자가 패배를 인정하니, 다른 무인들도 이제는 할 말이 없었다.

개중에는 유송령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지만, 곧 석탄강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유송령이 사비강을 빤히 보았다.

“내기는 내기니까. 내일부터 출석하지. 당신이 이겼어.”

“당신이 아니라 교관님이다. 그리고 반말하면 또 혼낼 거야.”

유송령이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

정파 무인에 대한 인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내 그녀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러죠, 교관님.”

“좋아, 그럼 내일 보자.”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추량과 적무린이 따랐다.

**

“유송령과 석탄강이 그자의 수업에 참여한다고 하더군.”

얼굴에 검상이 길게 새겨진 남자, 진조영(秦祖永)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짱을 낀 그는 왠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클클. 그년이야 원래 줏대가 없는 년이니까. 그자가 좀 번듯하게 생겼나 보지?”

탁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꺼낸 사람은 얼굴에 검버섯이 핀 노인이었는데, 기다란 창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바로 구절귀창(九折鬼槍)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맹가숙(盟可淑)이었다.

이곳에 모인 무리들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너무 설치는 것 같은데. 손 좀 봐줄까?”

비교적 가벼운 음성으로 말을 꺼낸 사람은 비도술이 특기인 도비천(都飛天)이었다.

맹가숙이 눈을 빛내며 흥미를 드러냈다.

“호오, 그것도 재미있지. 그런데 어떤 식으로?”

“그야 이제부터 궁리를 해봐야지. 이곳이 어디인지 그자에게 확실히 각인을 시켜줘야 하지 않겠어?”

“클클클. 그렇잖아도 무료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군.”

“후후.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만들어 보자고. 감히 우리를 생도 취급한 대가를 톡톡히 보여줘야지.”

“나는 찬성일세. 클클.”

맹가숙에 이어 진조영도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찬성이다.

그 외에도 모여 있던 대여섯 명의 무인들이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맹가숙이 입꼬리를 찢었다.

“자아, 그럼 판을 짜볼까? 그 정파 녀석을 요리할 판을.”

**

이른 아침 독고진은 뒷짐을 지고 산책을 하면서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비강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보나마나 좌절감에 빠져서 하루하루 넋놓고 보내겠지?”

“그것이….”

반조가 슬쩍 눈치를 살피려 말을 잇지 못했다.

독고진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문제라고 하기엔 애매합니다만, 세 명의 생도가 그의 수업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뭣이? 어째서 그런 일이?”

반조가 그동안 사비강에게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전해 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독고진의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독고진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때 만났을 때도 평범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엉뚱하다.

반조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맹가숙 무리가 나설 모양입니다.”

“맹가숙, 그 노인이?”

“예, 그라면 분명 생각지도 못한 비열한 방식으로 나올 게 분명합니다.”

독고진의 표정이 슬금슬금 밝아졌다.

“후후후. 과연. 맹가숙 스스로 생도가 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그는 이럴 수작이었군. 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런데…

“좀 비켜 주십시오.”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기분 좋은 순간을 방해하는 이 눈치 없는 인간이 누군가 싶어서 돌아보던 독고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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