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귀환 마교관
211화
“쉽지 않을 겁니다.”
방각이 불쑥 말을 뱉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요즘 혈사련에서 쓰는 유행어냐?”
“뭐라고요?”
“아니, 뭐 다들 같은 말만 하니까.”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관님 말을 들을 녀석들이 아닙니다.”
“너는?”
“나, 나는 내 의지로….”
“뭐, 알았다. 어쨌든 어딜 가면 이 녀석들을 만나볼 수 있겠어?”
“정말 한 명씩 다 찾아다닐 생각입니까?”
“제 발로 안 온다면 찾아가서 끌고 와야지.”
방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관두었다.
어차피 말을 해도 들을 사람 같지가 않았기에.
하긴. 직접 부딪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그래야 이 빌어먹을 수업도 하기 싫어질 테고.
그러면 자신도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리라.
‘흥! 볼모로 잡혀 왔으면 얌전히 지내다가 돌아갈 것이지. 사서 고생하는군.’
생각을 마친 방각이 차가운 어조로 툭 내뱉었다.
“생사투장(生死鬪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생사투장?”
“일종의 도박장입니다. 뭐, 그곳에 가면 유송령(柳松嶺)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거의 하루 종일 거기에 죽치고 앉아서 노는 년이니까요. 운이 좋다면 다른 녀석도 좀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렇군. 그럼 거기부터 시작하지.”
사비강이 몸을 돌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툭 던지듯 말했다.
“아, 그리고 기수식을 취할 때는 오른발을 한 뼘 정도 더 빼도록 하고, 자세를 더 낮춰. 왼팔은 굽히지 말고 쭉 펴도록 하고, 오른팔은 최대한 직각이 되도록 구부려. 그 편이 싸우기 좋을 거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모퉁이를 돌아가고 나자, 적무린과 추량이 그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쳇, 뭐야? 내 혈응쌍도(血鷹雙刀)에 대해서 뭘 안 다고!’
내심 투덜거린 방각이 몸을 휙 돌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지만 곧 사비강이 던진 조언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몇 걸음을 옮기던 그가 턱을 괴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자세를 더 낮추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에이, 내가 지금 왜 그런 말까지 신경 쓰는 거야?’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다섯 걸음도 옮기기 전에 그는 사비강이 지적한 대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왠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왼팔을 쭉 펴고, 오른팔을 직각으로. 자세는 좀 더 낮추고… 끄응. 제기랄! 완전 불편하잖아! 아, 오른발을 조금 더 빼라고 했던가?’
그렇게 오른발을 한 뼘 정도 스윽 뺐을 때,
“……!”
방각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뭔가 다르다.
단지 기수식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다르다.
무공을 익히는 데에 있어서 기수식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된다.
기수식이야 말로 모든 공격의 기본이며, 모든 방어의 기본이다.
이 기수식이라는 것은 익힌 무공과 병기 등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데, 사비강은 혈응쌍도를 제대로 본 적도 없지 않던가?
설마 어제 잠깐 싸워 본 것만으로 혈응쌍도의 기수식을 효율적으로 분석했단 말인가?
물론 이 추측은 틀린 것이었다.
사비강은 방각의 혈응쌍도에 대해서 이미 전의 생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익힌 도법에서 좀 더 효율적인 기수식을 진작 알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 단순한 변화는 방각에게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한 차례 바람이 불면서 낙엽들이 날아들었다.
‘지금!’
샤샤샤샤샤샥!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도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놀랍게도 그를 향해 날아들던 낙엽들이 먼지처럼 쪼개지며 흩어졌다.
푸스스스스!
‘뭐, 뭐야? 이거!’
방각은 손에 들린 두 자루의 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단지 자세를 조금 바꿨을 뿐인데 도의 무게가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방각이 멍한 표정으로 사비강이 사라진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사비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커다란 덩치로 동혈 입구를 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거참. 비키라니까.”
“참가비.”
덩치는 아까부터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사비강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나는 도박하러 온 게 아니라 누굴 좀 찾으러 왔다니까.”
“참가비.”
“아놔. 가는귀라도 먹었어?”
“참가비.”
사비강이 힐끔 돌아보자, 적무린은 살짝 비웃음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곳의 규칙이기에 자신은 참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생사투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가비를 내는 것이 이곳 규칙이었다.
참가비는 은자 열 냥이었는데, 하필 지금 사비강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뭐, 있어도 줄 생각은 없지만.’
결국 사비강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읊조렸다.
“비켜라. 다친다.”
“참가비.”
“흐흐흐. 아주 좋아. 그런 자세. 마음에 들어. 마음껏 두드려 패도 죄책감이 안 들게 만드는 좋은 자세다.”
사비강이 주먹을 쥐고 우두둑 소리를 냈다.
**
생사투장의 규모와 구조는 예전에 혈사련이 관리하던 호투장과 굉장히 비슷했다.
동혈을 따라 들어가면 크고 너른 공터가 나타나는데 천장이 뻥 뚫려서 하늘이 보이는 게 특징이었다.
이곳을 사람들은 ‘열화구(熱火口)’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곳에서는 각종 도박이 펼쳐진다.
도전자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과제가 주어지고, 그 도전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내기를 통해 다시 도박을 하게 된다.
가령,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맹수와 싸워서 살아남기’ 등이 그런 경우다.
이때 사람들은 도전자가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해서 또 돈을 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인 만큼 생사투장의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그야말로 열화구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곳.
때마침 한쪽 구석에서 여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 땄다! 땄어!”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여인이 옆에 선 사내의 목을 끌어안으며 활짝 웃고 있었다.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짧은 상의에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옆단이 길게 찢어진 하의.
특히 커다란 눈과 붉은색이 선명한 입술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도가 있었는데, 그 도신에 새겨진 글귀는 이런 내용이었다.
건드리면 죽는다.
그 때문일까?
열화구에 있는 누구도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단, 그녀가 매달려서 뽀뽀를 퍼붓고 있는 시커먼 남자만 제외하곤.
훤칠한 키에 검은 먹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몸이 시커먼 남자가 유독 하얗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축하해, 송령. 그런데 우리 수업 안 들어도 괜찮을까?”
“수업? 아이참,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기, 수업 듣고 싶어?”
“그럴 리가.”
검은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송령이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말했다.
“키야! 이 맛이지! 역시 술은 돈 따고 먹었을 때가 최고야! 수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아. 어차피 교관이라는 녀석도 볼모로 잡혀 온 놈일 텐데. 보나마나 지금쯤 그 녀석 자기 숙소에 잔뜩 움츠리고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걸? ‘이 무서운 사파의 소굴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하면서 말이야. 하하하!”
검은 남자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갑자기 거구의 사내가 날아오더니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탁자를 부수며 나뒹구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유송령과 검은 남자가 마시던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챙그랑!
유송령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뭐야? 젠장, 부정 타게!”
도박장만큼 미신이 팽배한 곳도 없는 법.
술병이 깨진 걸 영 좋지 못한 징조로 받아들인 유송령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구의 사내가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면서 일어났다.
“문, 문제가….”
“그래, 문제는 문제지! 네가 지금 내 술병을 깨버렸으니까! 만약 내 운도 깨지면 네가 책임 질 거야?”
“너, 널… 찾으러 온 자가….”
“뭐?”
그제야 유송령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비강과 적무린, 추량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가 유송령이냐?”
“넌 누구야?”
“앞으로 널 가르칠 교관이다.”
유송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기에.
잠시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유송령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뭐야? 진짜 정도맹에서 온 그 교관이야?”
정도맹이라는 말에 주변 무인들의 몸에서 살기가 뻗쳐 왔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훑었다.
“이빨 드러내지 마라. 다 뽑아 버린다.”
그 말에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때, 유송령이 불쑥 나섰다.
“근데 교관님이 여긴 왜 온 거야?”
“너 잡아가려고 왔다.”
“날? 아하하하! 진짜 재미있는 교관이네? 진심이야? 여기서 날 데려가겠다고?”
“그러고 보니 옆에 서 있는 숯덩이도 우리 반 생도인가?”
사비강의 시선이 검은 남자에게 향했다.
“푸훗!”
추량이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뿜었다.
‘숯덩이라니… 아 정말 사부님도 너무하셔. 미치겠네.’
추량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사파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렇잖아도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대고 있는데, 경박한 웃음을 보였다간 뒷감당이 안 될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유송령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톡 쏘아붙였다.
“교관이라는 작자가 말버릇이 나쁘네. 석탄강(石彈强)이 검은 이유는 사흑공(蛇黑功)을 익혔기 때문이야.”
“그렇군. 네가 석탄강이군. 왠지 이름하고도 잘 어울리는 피부색이다.”
“푸우웁!”
다시 한 번 추량이 입을 틀어막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부님이 날 웃겨서 죽이려고 하시는 건가?’
그는 숨 막힐 듯이 뻗어 나오는 살기를 느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반면 유송령은 아까보다 더욱 표정이 굳었다.
“내 친구를 놀리다니. 정말 몹쓸 교관이네. 혼내줘야겠어.”
“후후. 말은 바로 해야지.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이딴 곳에서 도박이나 즐기고 있었다니. 너야말로 혼 좀 나야겠다.”
“후후후. 어떻게 혼내주려고 그러실까?”
“그냥 좀 두드려 맞자. 내가 뭐, 여자라고 봐주고 하는 성질이 아니라서 말이다.”
사비강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갔다.
하지만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해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그야말로 진득한 살기를 마구 피워대는 사파의 무인들이 그를 꽁꽁 에워쌌다.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켜라. 아직 내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아. 맞지 않고 비킬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그때 인의 장벽 너머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 확실히 재미있는 교관이네. 좋아, 그럼 우리 이건 어떨까? 어차피 여긴 도박장이니까 나랑 내기를 하는 거야. 당신이 이기면 내가 군소리 없이 따라갈게.”
사비강이 차갑게 웃었다.
“왜 그래야 하지? 난 널 충분히 데려갈 수 있는데.”
유송령이 눈을 찌푸렸다.
‘이 남자 대체 뭐야? 지금 상황을 알고 하는 얘긴가? 멍청해도 정도껏이지.’
그녀는 속내를 숨기고는 말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일은 내가 출석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어디론가 도망가 버릴 지도 모르고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이기면 앞으로 매일 수업에 참여하겠어. 어때? 이만하면 해볼 만하지 않아?”
사비강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군. 내기 종목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