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210화 (210/670)

# 210

귀환 마교관

210화

기다란 석탁 위에 한 사람이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백염이 성성한 노인.

두 눈을 꼭 감은 그는 사지가 공진철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바로 정도맹의 장로회주였던 설백이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 가느다란 침을 찔러 넣는 자는 얼굴이 온통 적색으로 물든 남자였다.

적색 칠 때문에 그의 원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적면인(赤面人)은 침을 모두 찔러 넣은 다음 설백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드러난 흰자를 잠시 확인한 그가 곧 몸을 돌리더니 석실을 빠져 나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

설백이 거짓말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잠시 좌우로 눈알을 굴리더니 얼른 팔을 흔들어 보았다.

철그렁! 절그렁!

공진철에 구속당해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깨어난 것은 정확히 적면인이 마지막 침을 자신의 몸에 찌른 순간이었다.

‘그자는 누구지?’

설백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신에 가느다란 침이 여러 군데에 박혀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석실은 창문도 없었다.

한쪽 벽에 걸린 횃불이 빛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은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적어도 정도맹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정순하지는 않았다.

하면 혈사련인가?

설백은 고개를 저었다.

혈사련과 관련된 자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이 혈사련은 아니리라.

그들이라면 자신을 이렇게 살려 둘 이유도 없다.

역시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다행인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기회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온다.

그때를 노려야 한다.

설백은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그였다.

지금은 그저 또 하나의 높은 산을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차분하게 오르면 될 일이다.

한편, 석실을 빠져 나온 적면인은 어두컴컴한 동혈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가 출구까지 빠져나오자, 얼굴을 온통 푸른색으로 칠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 역시 얼굴에 덮어 쓴 색깔이 너무 짙어서 원래의 모습이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좀 어떻소?”

청면의 노인이 묻자, 적면인이 대답했다.

“의식은 돌아온 것 같소.”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군.”

“존야(尊爺)께서는 별 말씀 없으셨소?”

청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일도 중요하지만, 사비강이라는 자에 대해 흥미를 보이셨소.”

“하긴. 그자는 뭔가 달랐으니.”

“그자가 혈사련으로 갔소.”

“혈사련으로? 역시 모종의 거래가 있었나 보구려.”

“그런 듯하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껏 혈사련이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진 않았을 테니.”

적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비강이라는 인물의 행보가 예사롭지는 않다.

너무 파격적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상 이런 자는 존야께서 이루려는 대업의 걸림돌이 되기 마련이다.

“해서 존야께서는?”

“우선은 예의 주시하라 하셨소. 그리고 이쪽 일부터 처리되길 바라고 계시오.”

“알겠소. 설백은 내게 맡겨 두시오.”

**

“정말이지… 형편없군요.”

귀영단의 일영 홍염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 어디서든 금방 적응하는 체질이니까.”

“하지만 주군께서는 이런 대우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

어느새 홍염은 마음 속 깊이 사비강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다.

현재 귀영단의 일부는 홍염을 주축으로 별동대처럼 떨어져 나와 사비강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었다.

반면 귀영단주 웅패는 감찰총국의 눈과 귀가 되어 매설란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용케도 잠입했군. 날 감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런 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일이 원래 우리 귀영부가 해오던 것이었죠.”

“후후. 일은 어찌 됐나?”

“중원의 모든 보부상을 조사 중입니다. 곧 밝혀낼 겁니다.”

“아직 찾아내진 못했다는 말이군.”

“죄송합니다.”

“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하지만 곧 가닥이 잡힐 것 같습니다. 설백의 수하 한 명이 어느 보부상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그 보부상의 행적을 쫓는 중입니다.”

“그렇군.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발견하게 되면 먼저 내게 보고부터 하도록.”

“존명.”

“그럼 계속 수고 좀 해줘.”

사비강의 말이 끝나자 홍염의 기척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휘이이잉.

마침 떨어져 나간 창에서 밤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왔다.

사비강이 창밖을 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좀 초라하긴 하군.”

**

“푸훗!”

추량이 웃음을 터뜨렸다.

앞에 서 있던 방각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저 개잡놈이 지금 비웃어?’

내심 발끈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속 좁아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신 그는 미간을 팍 구기고는 추량을 노려보기만 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던 방각은 오늘 다시 연무장에 나타났다.

물론, 수업에 참여한 사람은 방각뿐이었다.

여전히 연무장에는 낙엽만 애처롭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비강이 입매를 올렸다.

“죽음이 두렵긴 두려웠나 보군.”

“웃기지 마시오. 난 그저 당신이 어떤 식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궁금해서 온 것일 뿐이니까.”

“그렇군. 하면 앞으로 꾸준히 나올 생각인가?”

“물론이오. 다시 말하지만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소. 다만 당신이 어떤 식으로 꾸준히 가르칠지 궁금한 것일 뿐이오.”

방각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적어도 해독제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는 싫었다.

자신은 그저 그 죽음과 상관없이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자여야 했다.

사비강이 재차 물었다.

“그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올 거냐?”

“그럴 거요.”

‘그러지 않으면 네놈이 해독제를 안 줄 것 아니냐!’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삼켰다.

사비강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좋은 자세야. 그 말 믿어 보지.”

“흥! 우리는 정파 나부랭이들처럼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진 않소! 적어도 내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올시다!”

“좋아, 좋아. 마음에 들어.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군.”

사비강의 말에 방각의 표정이 팍 굳어졌다.

‘이놈, 해독제를 무기로 날 제멋대로 다룰 생각이구나!’

분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단환을 복용하지 않았던가?

사비강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해독제 또한 받아내지 못할 터.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일단, 그 말투부터 고쳐라. 교관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예를 다하도록.”

“끄음….”

“뭐, 존경을 강요하는 성격이 아니긴 한데, 피치 못할 경우에는 쥐어짜긴 한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알겠소.”

“알겠습니다, 라고 해야지?”

“니미럴, 알겠습니다.”

“니미럴은 빼고.”

“아, 젠장할! 거참 너무한 것…!”

“할 맘이 없나보군. 뭐, 그럼 내일 보자. 오늘 수업은 이만 끝내지.”

사비강이 몸을 휙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방각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야? 이대로 가는 거야? 이런 개새끼! 해독제를 주지 않고 그냥 가겠다는 거냐! 고작 말 한 마디 때문에 사람을 죽일 생각이냐? 그러고도 네가 정파 무인이냐!’

속에서 열불이 뻗쳐올랐지만, 방각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단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그것을 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교관님!”

“으음? 방금 뭐라고 했지?”

“알겠습니다, 교관님.”

“봐. 하면 잘 하잖아. 이제 조금씩 우러나오기 시작하는군. 존경심이 말이야.”

“크윽.”

“혹시 내 손에 죽을까 봐 쫄아서….”

“흥! 아닙니다! 이왕 배우기로 한 것 스스로 결정한 겁니다! 젠장!”

“흥? 젠장?”

“습, 습관 같은 겁니다.”

“그렇군. 아무튼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하니 역시 혈사련의 무인답군. 대단해. 감탄했다.”

“별, 별 말씀을.”

“그럼 모처럼 기분도 좋아졌으니, 수업을 이어 가도록 할까?”

사비강이 다시 방각에게 다가왔다.

“자, 먼저 운기행공부터 시작하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라.”

“그전에 저어….”

방각이 쭈뼛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그러니까 그게… 뭐 잊으신 것 없습니까?”

“잊은 것? 없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도 불참자가 너무 많군. 그래, 이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불참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게 좋겠군. 너도 같은 생각이겠지?”

“뭐, 그건 그렇겠지만… 그전에….”

방각이 다시 어렵게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제기랄! 해독제 말이다! 해독제! 네 입으로 하루에 하나씩 주기로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니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면서 방각이 계속해서 눈치를 살폈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그러고 있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해.”

‘이 새끼! 결국 내 입으로 자존심을 무너뜨리라는 거냐?’

방각은 내심 발끈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독제를 달라고 하자니, 마치 그 소리가 ‘제발 좀 살려 주세요.’ 같이 느껴져 비참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곧 만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그럼 독이 퍼져서 죽고 말겠지.’

어쩔 수가 없다.

놈의 비열한 수작에 당해 버렸으니.

당장은 굴욕적이지만 해독제를 구걸할 수밖에.

“그건… 왜 안 주시는 겁니까?”

“뭘?”

“매일 하나씩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일 하나씩? 아아, 그거?”

사비강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 이거 참. 미안해서 어쩌지? 그게 어디에 뒀는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뭐, 뭐라고요?”

방각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했다.

이쯤 되자 그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와서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분명히 매일 하나씩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곧 만 하루가 지나갈 텐데!”

“잊어 버린 걸 어떡해?”

“뭐, 뭐 그딴 이유가…!”

“많이 먹고 싶냐?”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방각은 속천불이 났다.

사비강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진심으로 이러는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건 이놈은 분명 최악질이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데, 사비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피곤하냐?”

“뭐라고요?”

“자꾸 보양환(保養丸)을 달라고 하니까 묻는 거야.”

“보…양환?”

그제야 방각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보양환이란 말 그대로 몸보신을 하기 위해 먹는 피로회복제 같은 게 아닌가?

“그래. 네가 달라는 거 말이야.”

“보양환이라고? 해독제가 아니라?”

“음? 해독제? 너 언제 중독된 적이 있는 거냐?”

사비강이 화들짝 놀라더니 방각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닌가?

방각이 손을 뿌리치며 후다닥 물러났다.

“교관님이 내게 먹이지 않았습니까!그 맹독을!”

“뭔 소리하는 거야? 내가 언제 독을 먹였다고 그래?”

“뭐라고요? 어제 분명히 내 입에 강제로…!”

“몸에 좋은 거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보양환을 처먹여 줘도 지랄을 하네.”

“보양환이라니… 그럼 두 번째 꺼내들었던 그 해독제는… 분명히 색이 달랐는데….”

“아, 두 번째 보여준 거? 그것도 똑같은 건데 색이 좀 바랬던 거지.”

이쯤 되자 방각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사비강은 단 한 번도 독이라거나 해독제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지 않은가?

‘제기랄! 도대체 나 혼자 뭔 생각을 한 거야?’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럼 너 오늘 수업에 나온 이유가 중독됐다고 착각해서 그런 거냐? 그래서 죽음이 두.려.워.서. 해독제를 받기 위해 나온 거고?”

“크익…!”

방각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일이 더럽게 꼬였다.

인정을 하자니 결국 자신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나온 게 되는 것이고, 부인을 하자니 앞으로 꼼짝없이 수업에 나와야 할 처지가 아닌가?

잠시 갈등하던 방각이 후자를 선택했다.

“아닙니다. 그저 농담을 한 겁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내 의지로 내린 결정입니다.”

사비강이 활짝 웃었다.

“역시 대단해.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업… 전에 말 안 듣는 생도들부터 찾으러 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