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귀환 마교관
205화
마침 사비강이 손을 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됐어, 됐어. 내가 잘 아는 분들이니까 그쯤 해도 돼.”
그제야 함천석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났다.
사비강 곁에는 총군사 구윤이 함께 있었다.
천세명과 등부형은 그제야 안색이 밝아지면서 재차 인사를 건넸다.
“오오, 사 교관. 오랜만이오!”
“그간 잘 지내셨소?”
두 사람의 인사에 사비강이 웃으며 답했다.
“나야 뭐 항상 잘 지냅니다. 아, 인사하십시오. 이분은 본맹의 총군사님입니다.”
총군사라는 말에 천세명과 등부형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자가 총군사!’
두 사람이 얼른 포권을 취했다.
“용천관의 천세명입니다!”
“용천관의 교관, 등부형입니다!”
두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구윤을 바라보았다.
‘이 곱상한 사내가 총군사구나. 생각보다 젊군.’
두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총군사를 본 것이었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맹 내에서 이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을 언제 만나보겠나?
한데 구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아하, 이분들이 바로 그 개념과 싸가지는 없지만, 심성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그 교관님들이군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소?”
사비강의 말에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내가 언제 국주님 말 한 마디라도 소홀히 하는 걸 봤습니까?”
그러더니 곧 표정을 굳힌 그가 천세명과 등부형을 향해 엄중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두 분은 사 국주님께 예의를 다하시오. 지금과 같은 태도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공분을 얻을 뿐이오.”
평소 구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천세명과 등부형이 뻣뻣한 자세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내의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사비강에게 함부로 대하는 두 사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구윤이 재촉했다.
“두 분, 뭐하시오?”
“아, 예, 알겠습니다.”
마침내 천세명과 등부형이 얼른 포권을 하며 허리까지 숙였다.
“용천관에서 온 천세명이 사비강 국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용천관에서 온 등부형이 사비강 국주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이거 참.”
사비강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면서도 입매가 히죽 올라갔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천세명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이 자식… 즐기고 있어!’
내심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비강이 이처럼 대단한 대접을 받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사비강이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마음껏 즐기고 돌아가시오.”
그제야 이곳을 지켜보던 다른 무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국주님!”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사비강과 구윤은 다시 담소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천세명과 등부형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이게… 다야?’
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순간이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두 사람이 얼른 돌아서서 총군사 구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두 분은 따라오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어느새 함천석이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아, 예….”
함천석이 두 사람을 다시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다.
**
“크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술이 얼큰하게 취한 천세명이 파안대소했다.
등부형도 곁에서 헤벌쭉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두 사람은 현재 한 여인과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에서 눈앞의 이 여인마저 없었더라면 무척이나 우울할 뻔했다.
등부형이 입술이 마를 새라 칭찬을 했다.
“여협께서는 매우 호탕하신 분이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천세명도 이날까지 여협만큼이나 유쾌하신 분을 뵌 적이 없었습니다! 내 술잔 받아 주십시오!”
천세명이 술잔을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은 은밀히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여협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맹 내의 사정에 밝은 것으로 보아 내원에 거주하는 자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줄을 잘 잡아서 출세를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마음이 두 사람의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운만 좋다면 사랑과 출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마침 여인이 곱게 웃으며 물었다.
“두 대협이야말로 유쾌하신 분들이군요. 두 분이라면 저랑 참 잘 맞을 것 같아요. 언젠간 제가 두 분께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와주실 수도 있을까요? 그럼 참 좋겠지만.”
다시 한 번 천세명과 등부형이 눈을 빛내며 서로를 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정도맹 내원에 거주하는 여협이 자신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원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출세 기회가 아니겠는가?
천세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를 말이오? 나, 천세명은 여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소!”
“이 등 아무개도 마찬가집니다! 여협을 돕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돕겠습니다!”
“호호,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사내대장부로서 어디 말만 떠벌리겠소? 진심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천 부장님과 저는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부류가 아닙니다!”
그러자 여인이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재차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정말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천세명과 등부형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주변에서 시종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곧 신경 쓰지 않았다.
‘흥! 출세만을 위한다고 우릴 욕할 생각이냐? 웃기지 마라. 너희들도 다 이런 식으로 출세하지 않았더냐? 그 시선들에 굴할 우리가 아니다!’
마음을 다잡은 천세명이 포권을 하며 물었다.
“한데 여협의 유쾌함에 취해 아직까지 우리는 여협의 존함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됐다! 드디어 정도맹의 상위 권력에 줄을 댈 수 있게 됐어!’
천세명과 등부형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여인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내 이름은 서래향이에요. 다들 ‘홍묘’라고 부르죠.”
“아, 그러시군요. 홍묘, 서래… 음?”
그제야 천세명은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닫고 움찔 떨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못마땅한 시선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서래향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의 호의는 잘 기억해 둘 게요.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말. 무척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 그런…!”
천세명과 등부형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사파의 여인에게 알랑방귀를 뀌었으니 이 일을 어찌 수습하랴?
두 사람의 가슴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
화려했던 송별식도 끝났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다.
감찰총국의 모든 무인들이 정도맹의 외원을 나서서 사비강을 배웅했다.
특히 곡보옥은 배웅을 하러 따라 나오는 중에도 연신 훌쩍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물론, 그는 그저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콧물이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간신히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 참는 중이라는 것을.
그 기분이라면 천멸대원 중 누구도 다르지 않았기에.
매설란은 시종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배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데 이제 그를 배웅하니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함께 겪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 심경이 복잡하다.
더구나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마음을 줬던 사내가 아니던가?
“부디… 조심하세요.”
매설란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비강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외로워도 잘 참고.”
매설란이 픽 웃었다.
오늘만큼은 그 실없는 농담에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또 실없는 소리를.”
“보고 싶을 거야.”
“됐어요. 그만… 읍!”
순간 사비강의 입술이 매설란의 입술을 덮었다.
매설란은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항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 사비강을 안아 버렸다.
두 사람의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비강이 자세를 바로 잡고는 배웅 나온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새 국주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속 썩이면 내가 가만 안 둬.”
“존명!”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사비강이 씨익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비강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가 언덕길을 따라 한참 내려갔을 때 곡보옥이 느닷없이 소리 질렀다.
“으허어엉! 교관님! 몸조심하세요!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다른 대원들 역시 울먹이며 저마다 소리쳤다.
“건강하십시오!”
“몸조심하십시오!”
사비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은 흔들 뿐이었다.
한편, 목단화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 알아요. 그날 밤 일부러 구해 주지 않은 거. 그 뜻 잘 새길 게요.’
지금 이 순간, 천멸대원들은 그저 어린 생도에 지나지 않았고, 사비강은 그들의 교관이었다.
**
“형님!”
쾅!
추량이 탁자를 두 손으로 짚었다.
함천석이 눈을 부라렸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 좀! 그냥 보내 달라고요!”
“안 돼.”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진지하게 요구한 적 있었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안 된다.”
“아시잖아요, 형님? 전 그분을 사부님으로 모시기로 했다고요!”
“그전에 넌 흑랑대 소속이다!”
함천석이 버럭 소리쳤다.
추량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늘 장난기가 많고 덜렁대는 모습과는 딴판이다.
하지만…
“난 널 보낼 수 없다.”
함천석은 확고했다.
추량도 물러나지 않았다.
“갈 겁니다! 보내주셔야 합니다! 무조건 갈 거라고요!”
“이게 떼쓴다고 될 일이냐?”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형님도 그분만큼은 진심으로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함천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부정할 수 없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사비강, 그는 아들을 살려 준 자다.
사실상 시체만도 못한 삶을 살던 아들이 그 덕분에 새 삶을 얻었다.
추량이 그를 사부로 모신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너무 위험하다.”
“강호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형님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 알지 않느냐? 그분조차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분이 널 받아들일지 어떨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분은 분명 절 제자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따라가겠다고 하면 마다할 분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안 돼. 거긴 혈사련이다.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갈만한 곳이 아니란 말이다.”
“형님! 형님 눈에는 제가 지금 마실 나갈 기분으로 조르는 것 같습니까?”
추량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함천석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 고집을 어찌 꺾겠나?
지금까지 추량의 고집을 꺾은 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다.
그를 흑랑대로 데려올 때.
그게 자신이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추량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이 절 막겠다면, 전 형님과 싸워서라도 갈 겁니다.”
“너 이 새끼…!”
함천석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추량이 담담하게 그 눈빛을 받아냈다.
‘이 녀석… 도대체….’
실소가 나왔다.
추량이 이렇게 진지한 적이 언제였던가?
그래, 그러고 보면 참 오래도 옆에 있어 줬다.
딱 한 번 고집을 꺾었지만, 그 한 번으로 추량은 오랫동안 자신에게 얽매여 있었다.
‘이젠… 놓아 줄 때인가?’
정말 위험할 거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어쩌면…
함천석이 추량을 빤히 바라보았다.
추량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함천석이 혀를 찼다.
“한 대 치겠다?”
“쳐야 한다면 칠 겁니다.”
“미친 놈. 감히 대주에게 대들어?”
“죄송합니다.”
“넌 제명이야, 새끼야.”
“그런다고 해도 저는… 음? 예?”
“제명이라고 새끼야. 대주에게 대드는 새끼를 어떻게 거두고 있겠어? 가슴이 아프지만 넌 오늘부로 흑랑대원이 아니다.”
“형…님. 그 말은 혹시…?”
“뭐하냐? 어서 꺼지지 않고. 방금 제명당한 새끼가 왜 여기서 어슬렁거려?”
“형님…!”
추량이 함천석에게 와락 달려들더니 꽉 껴안았다.
함천석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굳게 안았다.
“몸조심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형님! 건강하십시오!”
추량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더니 곧장 달려 나갔다.
함천석이 씁쓸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녀석, 저리 좋을까? 매정한 놈.”
말은 그리하면서도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