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귀환 마교관
203화
“꼭 가야겠습니까?”
구윤이 마지못해 물었다.
사비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답이 된 거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구윤이 입술을 꾹 씹었다.
자신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좀 더 일찍 군사로서의 제 역할을 했더라면.
그러면 이렇게 사비강을 놓아 보내야 할 일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그랬다면 애초에 사비강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세상사라는 게 참 웃기다.
벼랑 끝에 몰리지 않았더라면 사비강이라는 사람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데 그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나니, 이제는 그가 떠날 차례가 됐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모든 걸 걸었는데, 막상 모든 일이 풀리고 나니 그의 존재감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맹주님도 원치 않으십니다.”
결국 구윤은 맹주까지 끌어들여 만류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다고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릴 수 있는 데까지는 말리고 싶었다.
사비강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아시지 않소? 이미 약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건 또 하나의 협약이었소.”
“협약이라는 건 언제든 깨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정도맹의 총군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한테 물들었나 봅니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설마 날 두고 하는 말이오?”
“뭐, 좋을 대로 해석하십시오.”
“아니지. 난 그래도 약속을 저버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감찰총국주로 임명될 당시, 국주님은 본맹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지요. 한데 이젠 떠난다고 하시니 그건 약속을 저버리는 게 아니고 뭡니까?”
“거참, 말은 바로 합시다. 애초에 군사도 동의한 바가 아니오? 내가 혈사련과 어떠한 거래를 하든, 불순분자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 제안을 해왔을 줄은… 게다가 그걸 또….”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었소. 혈사련이 요구하는 게 그거였으니까. 덕분에 우리는 설백의 정체를 밝혀냈고, 등왕패를 제거했으며, 그 잔당들까지 처리하지 않았소? 게다가 혈사련으로 가서 알아봐야 할 것도 있고. 이건 굳이 약속 때문이 아니오. 맹을 위한 일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될 거요.”
막힘없는 대꾸에 군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비강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서래향과 비밀리에 맺은 이차 협정이 떠올랐다.
그 은밀한 거래에서 서래향은 혈사련을 대표해서 정말이지 뜻밖의 제안을 꺼내 왔다.
“국주께서 본련의 교관이 되어 주세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비강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서래향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얼마나 유명한 지는 잘 알고 있겠죠? 특히 용천관의 생도들을 감찰대로 만들어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우리 사파 사람들에게도 큰 귀감이 됐죠. 그래서 혈사련에서도 이번에 후기지수를 양성하기 위해서 기관을 신설했어요. 그곳에서 생도들을 가르쳐 주세요.”
정말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물론, 혈사련도 후기지수를 양성하기 위해서 기관을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맹의 무인을 교관으로 불러들일 줄이야.
처음 사비강이 예상했던 것은 서래향이 혈사련으로 돌아가겠다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말 외로워했으니까.
서래향이 사비강을 보며 싱긋 웃었다.
“본련은 형식을 파괴하는 것에 익숙해요. 흑도의 본질이 그렇죠.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그게 련주님의 방식이죠.”
“하지만 반대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을 텐데.”
“물론이에요. 본련에서도 보수적인 사람은 꽤 많으니까요. 그러니 조심해야 할 거예요. 당신이 암살을 당해서 죽는다고 해도 우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게 조건이고요.”
“교관으로 써먹고 후기지수를 양성하면 좋은 일이고, 잘 안 된다고 해도 날 제거하면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는 건가?”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서래향이 사비강이 했던 말을 따라했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가 말했죠? 당신을 나와 같은 처지로 만들고 싶다고. 이제 당신이 결정할 차례예요. 어디 한 번 내 처지가 되어 보겠어요? 받아들인다면 본련은 이번 일이 정리될 때까지 절대 나서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리죠.”
결국 교관은 허울이다.
그저 볼모로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비강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마지못해서는 아니다.
혈사련을 회유할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언젠간 한 번은 가봐야 할 일.’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미래의 대처를 위해서는 한 번은 필요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자연스럽게 사파와 접촉할 수 있으니 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마계의 군대는 정파와 사파를 구분하지 않고 휩쓸어대니까.
“맹주님은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득 들려온 시종의 목소리에 사비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비강과 구윤은 맹주전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맹주님께서 몹시 아쉬워하실 겁니다.”
“뭐, 나도 아쉽소.”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꾸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후원에 도착했다.
마침 저만치 석류나무 앞에 서서 뒷짐을 진 능운파가 보였다.
구윤이 능운파를 보고 인사를 올리려는데, 사비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옆으로 비켜 있으시오.”
구윤이 곧 사비강의 뜻을 대충 알아듣고는 한쪽 옆으로 비켜났다.
맹주가 다 익지도 않은 석류 하나를 따더니 사비강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덕분에 몸이 꽤 회복됐네.”
“다행입니다.”
“몸이 가벼워지니까 모든 것이 더 분명해지는군. 자네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말이야.”
“가야 합니다.”
“가지 말게.”
“이미 약속했습니다. 혈사련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래도 가지 말게.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네.”
“그럴 수 없습니다.”
사비강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구결을 외워서 읊는 것처럼 무감한 표정이었다.
맹주의 표정이 굳었다.
“정 가야겠다면… 나를 꺾어 보시게. 그 정도는 되어야 그곳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드는군.”
“굳이 그렇게까지….”
팍!
찰나, 석류가 터져 나가면서 그 씨앗 하나하나가 사비강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순간 사비강이 실드를 펼쳤다.
타다다다다당!
석류 씨가 마구 부딪치며 붉게 터져 나갔다.
뒤이어,
쒸에에에엣!
강기에 휩싸인 무언가가 사비강에게 다시 날아들었다.
사비강이 손을 불쑥 뻗었다.
이번엔 실드보다 훨씬 강력한 호신강기를 펼쳤다.
꽈앙!
츠츠츠츠츳!
사비강이 뒤로 이삼 장 정도나 밀려났다.
지켜보던 구윤은 입을 척 벌리고 말았다.
사비강에게 날아든 것은 다름 아닌 풀잎이었다.
하나, 강기에 휩싸인 풀잎은 그야말로 도검 수준의 강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흔히 고수의 영역에서는 풀잎조차 무기가 된다는 그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사비강이 두 장이 채 안 되는 풀잎을 손으로 쥐었다.
후우우웅!
강기가 주입되자 풀잎이 칼날처럼 꼿꼿하게 일어섰다.
능운파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손에도 역시 풀잎이 쥐어져 있었다.
“한 수 배우겠네.”
“그럼, 가르쳐 드리지요.”
그야말로 오만방자한 대답.
이 세상에 정도맹주를 향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에 있으랴?
설마 그럴 수준이 된다고 하더라도 겸양의 뜻을 표현하기 마련이건만.
‘정말이지 사 국주는 어쩔 수가 없군.’
구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능운파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땅을 툭 차고는 가볍게 날아갔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고양이 발톱만큼이나 날카로운 것이었다.
쉬이이이잇!
풀잎이 허공을 가르며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과연…!’
사비강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얼른 뒤로 물러나자, 능운파의 풀잎이 사비강의 풀잎을 휘리릭 휘어감았다.
샤사사삭!
깔끔한 소리에 이어 사비강이 손에 쥐고 있던 풀잎이 조각조각 나뉘며 바닥에 흩어져 내렸다.
사비강은 내심 감탄했다.
보통 고수들이 풀잎에 강기를 입히면 금속처럼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세기를 이처럼 유연하게 조절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방금 능운파의 풀잎은 채찍처럼 자신의 풀잎을 휘어감았다.
그러면서도 예기를 잃지 않고 나름 단단하게 서 있던 자신의 풀잎을 조각조각 베어 버린 것이다.
사비강이 빙긋 웃었다.
“많이 회복하셨군요.”
“이제 팔 할 정도는 돌아왔네.”
“잘 된 일입니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풀잎 조각들이 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풀잎 조각 하나하나에 강기가 맺혀 가는 게 아닌가?
이는 텔레키네시스와 어검술을 조합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생소한 광경에 구윤은 물론, 능운파도 눈빛을 빛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슈슈슈슈슈슛!
풀잎 조각들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능운파를 향해 쇄도해 갔다.
찰나,
탓!
능운파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이어,
팍, 팍, 팍, 팍!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풀잎 조각들을 하나하나 밟으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일련의 동작들이 무척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구윤의 눈에는 굉장히 긴 시간 펼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화려한 무위였기에.
마침내 마지막 풀잎을 밟고 도약한 능운파가 사비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쉬이이이잇!
능운파의 풀잎이 꼿꼿하게 일어서면서 사비강의 목울대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만약 조금만 힘을 싣거나 기를 뿜어내도 그 예기에 사비강의 목이 베일 순간이었다.
구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맹주님이… 이기셨다.’
하지만 사비강의 무위도 엄청났다.
특히나 조각난 풀잎 하나하나에 강기를 입힌 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상상을 초월한 경지였다.
생각 같아서는 멋진 대련을 보여준 두 사람 모두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능운파는 풀잎에 맺힌 강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가 혈사련이었다면 아마 이 공격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을 걸세.”
그만큼 그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러니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하지만 사비강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다면 그자는 아마 지금쯤 바닥에 누워 있을 겁니다.”
“뭣이?”
“모든 비수가 그렇게 정직하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사비강의 눈길이 능운파의 가슴으로 슬쩍 향했다.
그제야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능운파가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어느 틈에?”
그의 가슴에는 풀잎 조각 하나가 붙어 있었다.
사비강이 말했다.
“가끔 정직한 공격들 사이에 숨은 약은 수가 있는 법이지요.”
“애초에 강기를 입힌 조각들은 눈속임이었군.”
능운파의 추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사실 사비강은 능운파에게 모든 풀잎을 날려 보낸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풀잎 조각.
그것은 마지막까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텔레키네시스 마법을 사용할 때도 손가락 사이에 끼워 감춰 두고 있었다.
그리고 능운파가 풀잎을 밟으며 날아와 자신 앞에 내려선 그 순간, 손에 든 풀잎을 튕겨서 날려 보냈다.
오로지 강맹한 공격에만 집중하고 있던 능운파는 그 숨은 공격을 미처 눈치 채지도 못한 것이다.
그만큼 사비강의 공격은 은밀했다.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맹주님. 얍삽하기로 따지자면 아마 제가 사파 녀석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음? 훗. 하하하! 하하하하!”
능운파가 모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구윤도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