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귀환 마교관
202화
목단화가 지금까지 버틴 것도 한계를 한참 넘어선 정신력 덕분이었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자 사비강이 재빨리 한 줄기 공력을 주입한 후 번쩍 안아들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잇!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예기!
분명 주변의 모든 적을 섬멸했는데도 느닷없이 튀어 나온 살기였다.
게다가 그 기도가 가히 예사롭지 않다.
위기의식을 느낀 사비강이 얼른 호신강기를 펼치며 돌아서는데,
퍼캉!
푹!
“큿!”
사비강이 신음을 뱉으면서 미간을 팍 구겼다.
호신강기가 깨져 나가면서 그대로 검강이 날아들어 옆구리를 관통한 것.
사비강이 눈살을 와락 구겼다.
“네놈은…?”
“크크크! 잘도 이런 짓을 저질렀구나! 애송이!”
놀랍게도 상대는 막충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검을 쑤욱 뽑아 내더니 그대로 사비강의 목을 향해 내질러 갔다.
쒸에에에엑!
**
“안 돼애앳!”
목단화가 비명처럼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열린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들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침상의 휘장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여긴…?’
주변을 잠깐 둘러본 목단화는 이곳이 감찰총국의 숙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갑자기 맥이 탈 풀리면서 온몸의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바람에 등줄기를 타고 축축하게 흐른 땀이 느껴졌다.
몸 여기저기에 베인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날 밤엔 미처 깨닫지도 못했는데….
‘이제 보니 상처를 많이도 입었구나.’
“후유.”
긴 숨을 토해 내며 털썩 드러누웠다.
‘의식을 잃어버렸어. 바보 같이.’
목단화는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날 밤의 사투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생애 최초로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싸웠으며, 생애 최초로 누군가의 손에 붙들린 채로 무공을 펼쳤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싸우다가 기절까지….
문득 마지막 사비강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근.
‘뭐야?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데?’
당황한 목단화가 얼른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며 휙 돌아누웠다.
하지만 두근거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마지막 사비강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괜히 얼굴도 발그레 달아올랐다.
지난 번 전투 이후로 자신의 무공은 확실히 달라졌다.
새삼스럽게 무공을 펼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뭔가 깨달음이 왔음을.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비강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인정해 오던 지금까지와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존경심….’
아, 모르겠다.
사술에라도 걸려 버린 건가?
아니, 이건 분명 성취에 대한 두근거림과 기분 좋은 깨달음일 뿐이리라.
그나저나 맹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절해 있었다니….
‘나도 어지간히 무리했었나 봐.’
부스스 몸을 일으킨 목단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랜만에 깨어나는 것일 텐데도 몸이 별로 찌뿌둥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가벼워진 기분이다.
이 역시 깨달음으로 인해 몸이 강해진 덕분이리라.
“읏차!”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두 발을 침상 아래로 내려 걸터앉았다.
그때,
끼이이익.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 각주님.”
실내로 들어선 사람은 매설란이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목단화가 얼른 일어났다.
“각주님, 적하성은 어떻게….”
짜악!
순간 목단화의 뺨이 휙 돌아갔다.
갑작스런 손찌검에 목단화가 멍한 표정으로 매설란을 돌아보았다.
“각주…님?”
“얘기 들었어. 너의 그 경솔한 행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던 것인 줄 알아?”
“아….”
그제야 목단화는 매설란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지 깨달았다.
사비강이 내린 명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막충을 죽이러 간 일 때문이리라.
매설란이 날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령이라는 건 생각할 건더기를 준다는 게 아니야. 그냥 무조건 따르는 거야. 그게 조직이야.”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로 네 잘못을 모두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해?”
목단화가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매설란이 몰아붙였다.
“넌 네 자존심을 동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
“그런 건 아니에요! 자신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아무 문제도….”
“철혈단 무인 일곱 명이 죽었다. 네게 죽었어야 할 그 막충에게.”
“…네? 지금 뭐라고…?”
목단화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막충에게 철혈단이 죽었다고 했나?
그것도 철혈단 무인 일곱 명씩이나?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목단화가 두 눈만 끔뻑이자 매설란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게 너의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 없겠지. 그리고 명령대로 문탁이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실패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했으니, 이 모든 책임은 네가 짊어지게 되는 거야.”
“잠깐만요. 정말이에요? 정말 철혈단 무인이 막충에게 죽었다고요?”
“그럼,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농이나 할 것처럼 보여?”
매설란의 표정은 어딜 보더라도 진지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막충이라니!
그는 분명 자신이 내지른 단검에 심장을 찔렸다.
물론, 즉사는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처라면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전투를 했다고?
“말도… 안 돼.”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혹시 그렇다면 그 꿈이…?’
목단화가 매설란을 보며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국주님은요? 혹시 사비강 국주님은….”
“막충에게 당하셨어.”
“그럴 리가…!”
다리에 힘이 풀린 목단화가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윗사람 앞에서 그렇게 주저앉는다는 게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지금은 도저히 일어서 있을 힘이 없었다.
‘꿈이 아니었다니. 꿈이 아니었다니…!’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때 매설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행히 치명상은 피하셨지만, 결코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지. 아랫배 쪽을 완전히 관통당하셨으니까.”
“그럼 국주님은 무사한…?”
“그래.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끝났을 거야.”
“아….”
목단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매설란이 돌아서면서 차갑게 일렀다.
“내 생각 같아서는 널 제명시키고 싶다. 중요한 실전 임무에서 그렇게 제멋대로 설쳐댄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국주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구나.”
목단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전 계속 감찰대에 머물 수 있나요?”
“그래. 그의 마지막 뜻이었으니까.”
“마지막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국주님은 무사하시다면서요?”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무사하시지. 하지만 이제….”
매설란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떠나실 거야.”
“네? 떠나다니… 어디로….”
매설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왠지 목단화 때문만이 아닌 듯했다.
**
“보부상… 말씀입니까?”
“그래.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물건을 팔고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제는 활동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동방세가주 하태상은 분명 보부상으로부터 매직 큐브를 구입했다고 했다.
물론, 그는 그것이 매직 큐브인 줄도 모르고 구입했지만.
어쨌거나 그걸 설백에게 말했고, 설백은 그 보부상을 찾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보다 마법 도구가 많이 나왔어.’
설백과 친분이 두터웠던 막충도 마법 도구를 사용했다.
우선 그는 최상급 힐링 포션을 이용해서 단시간에 생명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했다.
그것만도 놀랄 일인데, 그 역시 스크롤을 이용해서 오러를 사용했다.
그 바람에 철혈단 무인들이 일곱 명이나 죽었다.
자신 역시 큰 부상을 당할 뻔했다.
아니, 당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힐링 포션을 사용해서 몸을 빠르게 회복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마 막충을 상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막충이 사용한 스크롤은 설백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그를 죽이기 전, 설백에게서 받은 것이냐고 물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그 흔들리는 표정에서 사비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백이 그 보부상과 정기적으로 거래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설백의 행적을 추적하면 되겠군요.”
귀영단의 일영인 홍염이 말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무척 은밀히 움직였을 테니까.”
“중원 각지의 모든 보부상을 뒤져서라도 찾아내겠습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영단의 정보력이라면 아마 찾아낼 수 있으리라.
다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영의 기척이 지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국주님!”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목단화였다.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유독 숨이 가쁜 듯 보였다.
마침 그녀를 뒤따라 매설란이 날카롭게 외치며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네 마음대로 이렇게 돌아다니면…!”
“무슨 일이야?”
사비강이 불쑥 묻자, 매설란이 그를 돌아보고는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미안해요. 말렸는데 다짜고짜 찾아오겠다고 해서….”
매설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단화가 다그치듯 물었다.
“떠나신다는 게 정말이에요? 왜 하필 그런 곳으로?”
“뭐, 그렇게 됐다. 너도 알다시피 그동안 내가 저지른 일들이 그쪽의 협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후후.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냐?”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묻자, 목단화가 목까지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입술을 쿡 씹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다시 물었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군. 다음에는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새 국주님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사비강이 매설란을 힐끔 보자,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목단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뭐야…!’
오랜만에 깨어났더니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한참 만에 목단화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일부러 그러신 거죠?”
“뭘?”
“절 곧바로 구해 주지 않은 거요. 일부러 제가 한계까지 다다르게 한 다음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전혀.”
“뭐라고요?”
사비강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혼자 무슨 달콤한 상상을 한 거냐? 내가 그렇게 깊게 생각할 인간으로 보여?”
“하지만….”
“괘씸해서 구해 주지 않았다. 쌤통이다 싶어서 놔 둔 거였는데. 제대로 한 번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그런….”
목단화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사비강이 약을 올리듯 히죽 웃었다.
잠시 사비강을 노려보던 목단화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몸을 휙 돌리더니 방을 나갔다.
툴툴 웃어 버리는 사비강에게 매설란이 다가왔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마지막 순간까지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요? 진심도 아니면서.”
“우연이라도 의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게 버릇이 될 수도 있거든.”
툭 던지듯 뱉은 말에 매설란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비강이 웃으며 물었다.
“왜 좀 반했어?”
“아뇨. 더 모르겠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