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귀환 마교관
197화
원래 강호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강호인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정신없는 날도 없었다.
이번엔 죽었던 자들이 살아 돌아왔다.
능운파 맹주가 살아왔고, 감찰총국주 사비강이 살아 있단다.
이 모든 것이 정도맹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호인들은 설백에 대한 분개를 감추지 못했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었던 만큼, 그 배신감은 더욱 컸기에.
결국 정사대전은 중단됐고, 능운파 맹주를 비롯한 수뇌 인사들이 모두 맹의 본단으로 복귀했다.
물론 구윤과 사비강 등에게 내려진 근신 처분 역시 취소됐다.
감찰총국은 빠르게 위상을 되찾았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불순분자의 최상위에 자리 잡고 있던 설백과 등왕패가 몰락했으니, 나머지 잔당을 처리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실제로 사비강은 단리정에게 천멸대를 이끌고 맹 내에 주둔하고 있는 불순분자들부터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천멸대가 선두에 나섰고, 암영대가 보좌를 하는 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설백과 등왕패를 따르던 무인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몇몇 무인들은 아예 본단을 벗어나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영락없이 맹 내에 갇힌 신세도 있었으니….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끄으으.”
공진철에 구속된 하태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뇌옥으로 들어선 자를 바라보았다.
“사비강…!”
“잘 지냈나?”
“네놈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만 있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나보군.”
“닥쳐라. 날 아무리 고문해도 네가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할 것이다!”
“등왕패 당주가 죽었다.”
순간 하태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코웃음을 쳤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내 말을 안 믿나보군.”
“믿은 안 믿든 등왕패 당주의 생사와 나는 아무런 관련이….”
“설백 장로는 중상을 입고 실종된 상태다. 뭐, 흑랑대가 쫓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지.”
“그런…!”
이번에야말로 하태상은 심리적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사비강의 입에서 설백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꽤나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비강이 하태상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물어볼 건 금괴의 출처 따위가 아냐. 그거야 어차피 온갖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긁어모았을 것이고. 네 머리 위에는 등왕패와 설백이 있었겠지.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자는 너와 북명신문주밖에 없을 테고.”
구구절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하태상은 입을 척 벌리고 꿈쩍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정말 등 당주가 죽었단 말이냐?”
“왜? 이제 좀 절망이 느껴져? 관심도 없다며? 너랑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후후.”
“대답해라! 그게 정말이냐!”
빠악!
순간 하태상의 뺨이 휙 돌아갔다.
어찌나 아픈지 왼쪽 뺨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크으읍!”
하태상이 어금니를 씹으며 고통을 참았다.
주먹을 휘두른 사비강이 하태상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이. 잘 들어. 너는 내가 성인군자로 보이냐?”
“크윽…!”
“네놈이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냐. 알겠어?”
“으윽…!”
“다시 말하지만 등왕패는 죽었다. 설백은 중상을 입고 실종된 상태지. 하지만 내상이 깊어서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냐?”
하태상은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두 사람이 어떤 자들인데.
지금도 정도맹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크윽…! 거짓말이… 분명하니까!”
사비강이 머리채를 놓고는 일어서더니 문 쪽을 돌아보았다.
“당 대주, 가져와.”
“예, 국주님.”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당이협이 뭔가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비강의 턱짓에 그가 하태상 앞으로 그것을 휙 집어던졌다.
툭, 데굴데굴.
다음 순간 하태상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등… 당주님이…!’
그의 눈앞으로 굴러온 것은 다름 아닌 등왕패의 머리였다.
사비강이 쪼그려 앉았다.
“알겠냐? 이제 네놈은 몰락한 권력에 갇힌 신세야. 건질 지푸라기도 없다고.”
“이럴… 수가….”
사비강이 고개를 떨어뜨린 하태상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무척이나 치욕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하태상은 그러한 것을 깨달을 정신도 없었다.
그저 모든 희망이 송두리째 날아갔다는 사실에 끝없는 허탈감만 몰려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나를 왜 찾아왔소?”
금괴의 출처와 배후를 밝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사비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사비강이 싸늘한 미소를 짓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탁.
“자, 우리 이것에 관해서 얘기 좀 해보자.”
“개문주…?”
“그래, 넌 이걸 ‘개문주’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이게 어디에서 났지?”
“오래전에 보부상에게서 구입했소.”
“보부상? 어디의?”
“보강현(保康縣) 근처의 마을에서 만났소.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마을 이름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소.”
모든 것을 체념한 하태상은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어차피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재차 물었다.
“그 보부상이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 특이한 것은 없었나?”
“잘 모르겠소. 뭐, 그자가 서역에서 건너온 물건을 좀 가지고 있다는 말은 했소. 다만, 날 만날 때는 그게 전부였지만.”
“설백이 이 구슬에 대해 알고 있었나? 그러니까 금괴를 보관했던 창고 말이야.”
하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소. 그는 유독 그것에 관심을 드러냈으니까. 그러고 보니 설백 장로도 그 보부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군.”
“어떤?”
“당신과 비슷한 것들이오. 어디에서 만났는지, 무엇을 팔고 있었는지 등.”
“혹시 설백 장로도 그 구슬과 비슷한 기물을 가지고 있었나?”
“거기까진 나도 모르오. 설백 장로를 직접 만나본 건 두세 번에 불과했으니까.”
“흐음.”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설백은 그때부터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매직 큐브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진 스크롤과 연관성이 있을 것임을 판단했으리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뭐요?”
“설백이 대외 세력과 손을 잡고 있나?”
하태상이 실소를 했다.
“설백 장로가? 그럴 분이 아니오. 그는 철저히 자신만을 신뢰하는 부류요. 맹 내의 인간도 믿질 못하는 분이 대외 세력과 손을? 어불성설이지.”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깨를 으쓱인 사비강이 몸을 일으켰다.
하태상이 다급하게 소리쳐 물었다.
“나는? 이제 나는 어찌 되는 거요?”
“글쎄. 평생 뇌옥에 갇히거나, 죽겠지. 최종 결정은 맹주님이 하실 테니까. 뭐, 적어도 예전처럼 호사스러운 생활은 못할 거야. 후후.”
끼이이익…! 철컹!
뇌옥의 문이 닫히자 하태상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든 게… 끝났다.’
꿈도 희망도.
뒤늦은 후회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
“축하해요.”
서래향이 집무실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 왔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이젠 맹 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나보군.”
“이전보단 확실히 자유로워졌네요. 뭐, 따지고 보면 나도 설백과 등왕패를 제거하는데 한몫 거든 셈이니까요.”
“앉으시오. 그렇잖아도 물어볼 게 있었으니까.”
“그래요? 우리끼리 나눈 이차 협정에 관해서인가요?”
“후후. 그건 아니고.”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꾸려는 건 아니겠죠? 이차 협정 따위는 모른다는 식으로….”
“걱정 마시오.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좋아요. 질문은 뭐죠?”
“알다시피 설백 장로가 달아났소. 깔끔하게 제거하진 못한 셈이지.”
“그건 그쪽의 부주의죠.”
“그렇게 정곡을 찌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소.”
“그런데?”
“제법 체계를 갖춘 세력이 그를 도왔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데려갔소.”
“납치란 말인가요?”
“글쎄. 좀 애매하오.”
“설마 지금….”
서래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구겼다.
“나로선 의심해 볼 수도 있지 않겠소?”
“아니에요. 우린.”
서래향이 딱 잘라 말했다.
사비강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련은 정파 나부랭이나 구하기 위해 그렇게 고급 인력을 쏟아 붓지 않는답니다.”
따박따박 대꾸하는 그녀의 음성에서 진심이 읽혔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거라 생각은 했소. 다만, 그 정도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혈사련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뿐.”
“이상하긴 하군요.”
“어쩌면 혈사련 내에서도 당신이 모르는 힘이 있을 지도 모르지.”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제가 모른다는 건 련주님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본맹에서도 맹주님이 설백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소.”
“호호. 우리를 귀맹과 같은 취급은 하지 말아 주시죠.”
“뭐, 알겠소.”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두 명의 복면인.
그들은 분명 마계의 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부분이다.
만약 그들이 마법 도구들을 이용할 줄 안다면….
‘역시 둘 중 하나겠지.’
그 힘을 옳은 일에 쓰거나, 악용을 하거나.
하지만 보통 막강한 힘은 사악한 생각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혹시 이상한 물건을 파는 보부상에 대해 들은 적 있소?”
“보부상이요? 글쎄요, 보부상은 원래 다들 이상한 걸 팔지 않나요? 호호.”
서래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사비강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대체로 이상한 것들을 팔지.”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매설란이 들어왔다.
그녀는 다소 못마땅한 시선으로 서래향을 힐끔 보더니 사비강에게 다가왔다.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일이야?”
“불순분자들이 규합을 했네요.”
“어떤 식으로?”
“적하성을 쳤어요.”
이건 뜻밖이었다.
적하성을 치다니.
현재 적하성은 혈사련이 차지한 상태였다.
사비강이 서래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누가 있소?”
“환살단주인 요신이 있어요. 하지만 그가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정사협정을 맺고 있으니 방심했을 수도 있고.”
서래향이 불쑥 끼어들며 매설란에게 물었다.
“본련의 무인들은 어찌 됐죠?”
“거의 전멸한 것 같아요. 현재 본맹을 이탈한 불순분자들이 적하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확인됐으니까요.”
“그럴 수가…! 적하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일 텐데….”
“정도맹의 사절단인 척하면서 손쉽게 입성한 것으로 파악됐어요. 그 후에 분위기를 보고 뒤통수를 노린 거죠.”
매설란의 말에 서래향의 표정이 굳어졌다.
매설란이 사비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현재 본맹의 정사협정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예요. 아무래도 설백과 등왕패와 동조했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 이 같은 짓을 벌인 것 같아요. 동시에 대외 강경 세력을 끌어 모으려는 수작이겠죠.”
사비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얌전히 협조하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것을.”
그가 서래향을 돌아보았다.
“유감스럽게 됐소. 하지만 이는 본맹의 뜻이 아님을 련주께 알려 주시오. 적하성에 모여든 잔챙이들은 곧 정리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