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귀환 마교관
196화
복면인 하나가 대답 대신 설백을 대충 어깨에 둘러매고는 몸을 날렸다.
“어딜!”
사비강이 곧장 뒤쫓아 가려고 하자,
쑤아아앙!
다시 한 번 강기가 날아들면서 사비강 앞을 휙 지나쳤다.
콰콰앙!
커다란 나무 기둥에 강기가 작렬하면서 나무 수십 그루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날카로움과 힘이 함께 실린 강기였다.
후우웅!
추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복면인에게서 살을 엘 것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예사롭지 않은 기도!
“뭐냐? 네놈들은.”
사비강이 손을 쑥 뻗자,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베르타스가 휙 날아왔다.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녀석들은 설백을 상당히 거칠게 다루었다.
점혈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건 보호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들이 적어도 그의 수하는 아니라는 뜻.
아니, 놀랍게도 지금 나타난 이들의 기도는 설백보다도 강하다.
게다가 조금 전에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던 강기.
그것은…
“너, 아까 그 공격 다시 해봐.”
사비강이 베르타스로 복면인을 가리켰다.
복면인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하면서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강기를 쏘아 보내려는 기수식은 아니었다.
사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해보라니까 뭐하는 거냐?”
타앗!
복면인이 대답 대신 사비강을 향해 쇄도했다.
쒸에에에엑!
‘빠르군!’
까아앙!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부딪치면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사비강의 몸이 뒤로 훅 밀려났다.
“까불지 말고 다시 해보라니까!”
사비강이 고함을 치면서 베르타스를 내질렀다.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는 일격!
그런데…
파앗!
“……!”
사라졌다?
복면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비강이 눈을 부릅뜨고는 몸을 휙 돌리는데,
쑤아아아아앙!
등 뒤에서 강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베르타스를 들어 막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찰나지간 사비강은 온 힘을 다해 실드와 호신강기를 동시에 일으켰다.
퍼콰아앙!
강기가 작렬하면서 사비강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쿨럭!”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뱉자, 시커먼 핏덩이가 나왔다.
급작스러운 공격에 내상을 입은 탓이다.
하나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 내상쯤은 가볍게 치료할 수 있다.
그보다…
‘방금 그건…?’
사비강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바닥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파바밧!
그의 신형이 질풍처럼 복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복면인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 역시 사비강의 무공이 예상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의 일격은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앗!”
쑤아아아앙!
사비강이 모처럼 기합성을 터뜨리며 강기를 날려 보냈다.
복면인이 그 자리에서 검을 대각선으로 내려치며 맞부딪쳤다.
쑤아앙!
꽈앙!
두 강기가 부딪치면서 다시 한 번 기의 폭풍이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촤아아아아!
쏟아져 내리던 비가 잠시 동안 두 사람을 두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르르르릉! 꽈광!
벼락이 치면서 다시 한 번 천둥이 울렸다.
파바밧!
사비강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여세를 몰아 복면인을 압박했다.
쒸에에에엑!
베르타스가 빗줄기를 뚫으며 빛살처럼 뻗어나가는 순간,
파밧!
“……!”
이번에도 사라졌다!
촤아아앗!
사비강이 미끄러지듯 멈추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쑤우우우웅!
이번엔 강기를 머금은 검이 통째로 그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사비강이 당황하지 않고 베르타스를 들어 올려 막았다.
쩌엉!
베르타스의 옆면을 때린 검이 요란한 소리를 터뜨리더니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검신의 파편이 조각조각 흩어지면서 다시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타다다다다다당!
반사적으로 일으킨 실드에 파편이 마구 부딪치면서 기름 튀는 소리가 울렸다.
촤아아아아!
한 바탕 소란이 끝나자 주변은 다시 쏟아지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사비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틀림없군.’
복면인이 조금 전 눈앞에서 사라진 방식은 분명 블링크 마법이었다.
게다가 먼저 날아들었던 강기.
그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오러에 더 가까웠다.
아주 잠깐 복면인이 마계에서 건너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벌써 나타났을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싸우는 방식을 미루어 보면 상대는 내공도 사용할 줄 안다.
반면 마나를 다루는 것은 다소 미숙해 보인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앞서 설백이 사용한 스크롤처럼 주문완료형 마법 아이템을 사용했을 경우다.
그것은 스크롤의 형태일 수도 있고, 반지나 목걸이 등의 장신구 형태일 수도 있다.
‘뭐, 블링크를 쓴 걸 보면 장신구 형태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다만 지금은 상대가 복면을 쓴데다가 장갑까지 끼고 있기 때문에 장신구를 확인하기가 힘들다.
“하나 물어보자.”
사비강이 불쑥 입을 열자, 복면인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냐?”
블링크를 두고 한 말이다.
마치 자신은 그런 걸 생전 처음 본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먼발치를 힐끔 보더니 곧 몸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남동쪽에서 빠르게 접근해 오는 기척을 느낀 탓이리라.
사비강 역시 접근해 오는 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맹주 능운파다.
아마 한참이나 떨어진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투 중인 이곳의 기운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라!”
사비강이 몸을 날리려는데,
슈슈슈슈슈슉!
숲속 곳곳에 대략 쉰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빽빽하게 내려섰다.
‘제길 귀찮게 하는군!’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쥐고 기도를 끌어올렸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앞을 막은 이들은 누구도 복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
그건 곧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윗선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리라.
“비키라고 해도 말을 들어 처먹지 않겠군!”
사비강이 고함을 지르며 바닥을 찼다.
앞을 가로막은 무인들도 동시에 사비강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쒸쒸쒸에에엑!
수십 자루의 검이 사비강에게 쏟아졌다.
따당! 까앙!
“크아악!”
빛이 번쩍일 때마다 빗물은 핏물로 변했고, 천둥소리는 비명소리와 뒤섞였다.
촤촤촤앗!
서컥! 서컥! 따앙!
사비강은 빗속에서 검무를 펼쳤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빗방울이 비수처럼 튕겨 나가며 적들을 강타했다.
퍼퍼퍽!
그들은 물방울에 맞아서도 살이 관통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렇게 얼마나 신들린 마냥 싸웠을까?
“이놈들!”
갑자기 노호성이 터져 나오더니 한 인영이 사비강 곁으로 내려섰다.
퍼펑!
그림자가 쌍장을 뻗어내자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튕겨 나갔다.
그가 곧 검을 뽑아 들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능운파였다.
“늦어서 미안하이.”
“괜찮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 하지.”
타앗!
찰나, 두 사람은 자신들을 포위한 무인들을 향해 양 방향으로 흩어지며 쇄도해 갔다.
**
푸욱!
섬뜩한 파육음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크우욱!”
무인이 울컥 입으로 핏덩이를 토해냈다.
촤아악!
능운파가 검을 뽑아 내자 피가 흩뿌려지면서 무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능운파가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에서 사비강이 마지막 무인의 목을 베고 있었다.
츄아아아!
마침내 마지막 적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사비강이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 강한 자들은 아니었다.
다만 사비강은 설백과 정체불명의 복면인과 연달아 싸우면서 제법 많은 공력을 소모한 직후였다.
게다가 복면인에게 약간의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때문에 이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의 맹공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능운파가 제때 나타나 주어서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능운파가 사비강에게 다가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이자들이 누군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비강이 말을 뱉고는 한쪽 구석에 쓰러져 신음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긴 했지만, 양팔이 절단된 상태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모른다.”
사내가 퀭한 시선으로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능운파가 혀를 찼다.
“고얀 지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끝내 정체를 숨기겠다는 건가?”
“크크크. 정말 모르는 걸 어찌 말한단 말이냐? 우리에게 누가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건지, 어째서 우리를 이만큼 키웠는지. 아는 게 전혀 없다. 다만… 거역하면 죽임을 당할 뿐이라는 것만 알지.”
“누구에게?”
“모른다.”
사내가 힘겹게 웃어보였다.
마치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비강과 능운파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비강은 사내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짐작한 바였기에 그리 분하지도 않았다.
사비강이 무심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고생했다.”
퍽!
한 줄기 지풍이 날아가 그의 이마를 뚫어 버렸다.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절명했다.
능운파가 시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설백 장로는 놓친 건가?”
“예, 죄송합니다. 갑자기 방해물이 생기는 바람에.”
“아닐세. 그래도 자네는 제대로 쫓아오지 않았나? 그나저나 이런 자들이 설백을 보호한다면….”
“보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
“글쎄요. 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용이라… 대체 이만한 조직을 키울 자가 누구란 말인가? 설마….”
능운파가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알아봐야 할 일이긴 합니다.”
혈사련주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진짜 혈사련주가 저지른 짓일까?
의심할 정황은 있으나, 뭔가 이상하다.
한 차례 겪었던 전생을 떠올려 본다면, 혈사련주는 이번 일과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하지만 자신이 여러 가지 상황을 바꾼 만큼 미래도 바뀌었을 수 있으니 알아볼 필요성은 있다.
그때 먼발치에서 기척이 빠르게 달려오더니 곧 두 사람 곁으로 내려섰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당이협이었다.
사비강이 물었다.
“거긴 어떻게 됐나?”
“철마단이 전멸했습니다.”
당이협의 보고에 능운파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항복한 자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모두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자는?”
“자멸단을 깨물고 죽었습니다.”
“지독한지고….”
능운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걸로 맹 내의 불순분자가 어느 정도 정리 된 셈이다.
하지만 짐작도 하지 못했던 배후가 있었다는 것이 여간 충격적인 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끝내 사로잡지 못하고 놓쳐 버린 것은 뼈아픈 실수다.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정도맹은 좀 더 깨끗하고 투명해질 것이다.
가장 크게 곪은 부분을 터뜨리고 짜냈으니,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손쉽게 제거되리라.
휘이이잉.
어느새 비는 그치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피냄새가 묻어났다.
능운파는 시선을 돌려 사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생각에 골몰히 집중하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자로다.’
썩어 가던 정도맹을 바로 세운 것.
그 신의 한 수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총군사 구윤이 일개 교관에 불과한 사비강을 찾아간 것이리라.
고개를 드니 짙은 구름이 서서히 걷혀 가면서 별이 총총 떠올랐다.
‘이제는 별을 볼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