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귀환 마교관
194화
설백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사비강과 설백을 번갈아보았다.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살아서 나타났다.
“이건 대체….”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군. 후후.”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마침 뒤에 서 있던 무인들도 저마다 복면을 벗었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설백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일그러져 갔다.
“당신들은…!”
“설백 장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 했던 말들이 모두 사실이오?”
복면을 쓴 자들.
그들은 모두 정도맹의 수뇌 인사들이었다.
개중에는 장로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충격이 심한 탓인지 설백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대신 입 꼬리를 부르르 떨며 사비강을 노려보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타박타박.
마침 앞으로 조금 나서 있던 이사흠이 말을 몰고 수뇌 인사 측으로 다가갔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정보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게 되어 있다고. 아무래도 내가 당신보다 힘이 있는 모양이야.”
말을 마치자 이사흠이 설백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사흠 네놈이 감히…!”
설백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 등왕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등왕패의 세가 기울어 가는 것을 깨닫고 제 발로 찾아온 이사흠이었다.
물론, 이사흠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한 번 등을 돌린 자는 언젠간 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만, 등왕패를 제거할 때까지는 그를 이용하겠노라 마음먹었다.
한데…
‘오히려 당하다니!’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당신이 그랬지.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역할에 충실해 줘서 고맙군. 덕분에 깔끔하게 정리가 됐어.”
“노옴!”
우렁찬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비강의 배후에 서 있던 수뇌 인사들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설 장로! 지금 큰 소리를 칠 상황으로 보이오?”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니, 변명은 필요 없소! 이미 스스로 모든 걸 까발렸으니! 처벌만이 남았을 뿐!”
수뇌 인사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끌어올렸다.
설백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던가?
겨우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저 멍청한 녀석 때문에!’
그의 시선이 죽어 나자빠진 등왕패에게 향했다.
하나 이미 죽어 버린 자를 원망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
기회도 살아 있어야 다시 찾아오는 법.
이 세상에 명예로운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명예로운 죽음도 되지 못하겠지만.
고오오오.
설백이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기도가 점점 변하는 것을 깨달은 수뇌 인사들이 살짝 긴장하며 투기를 끌어올렸다.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며 타일렀다.
“설 장로. 무모한 짓은 하지 맙시다.”
“흥, 무모한지 어떤지는 두고….”
“갈!”
순간 능운파가 천둥이 쩌렁쩌렁 울리듯 노호성을 터뜨렸다.
땅이 흔들리고, 말들이 놀라 울부짖었으며, 숲속 어딘가에서 새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설백의 수하들 역시 사자후에 실린 막강한 공력을 견디지 못해 귀를 틀어막았다.
설백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크익…!”
몸이 성치 않다고는 하나 맹주는 맹주다.
그의 무공은 결코 가볍게 여길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동안의 인자한 모습과는 달리 능운파가 차갑게 힐난했다.
“이깟 자리가 뭐라고 그간 그 더러운 이빨을 감추고 지내셨소? 추악한 본성 숨기고 사느라 고생 꽤나 하셨겠소.”
“끄음.”
가만히 침음을 흘린 설백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전부 쓸어 버려라!”
지금껏 남몰래 키운 무인들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에게 충성하게끔.
상대가 수뇌 인사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명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상대가 맹주라고 하더라도.
“존명!”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철마단이 일제히 수뇌 인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놈들! 감히 어디에 칼을 들이대느냐!”
수뇌 인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도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설백이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타앗!
누구보다 빨리 달려간 그는 사비강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러 갔다.
쒸에에엑!
사비강이 얼른 베르타스를 들어올렸다.
쩌엉!
공기가 뒤흔들리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촤르르르륵!
사비강이 선 채로 한참이나 밀려났다.
그 순간,
파바바밧!
설백이 그대로 사비강을 지나치면서 숲속으로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수뇌 인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엇! 놈이 달아난다!”
그 바람에 철마단이 잠깐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곧 철저하게 주인의 명을 이행했다.
“우와아아아!”
삼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수뇌 인사들을 덮쳐 갔다.
“이놈들! 죽고 싶으냐?”
수뇌 인사들이 저마다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철마단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관제묘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곳곳에서 금속성과 비명이 차올랐고, 섬뜩한 예기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그림자 하나가 능운파를 향해 매섭게 치고 들어갔다.
그는 바로 무영이었다.
쒜에에엑!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능운파의 몸 상태가 온전치 않다고 하더라도 무영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능운파가 가볍게 무영의 검을 피하고는 그대로 손을 툭 내밀었다.
뻐억!
“크아아악!”
그저 툭, 하고 쳤을 뿐인데 무영은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능운파는 그에게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는 그대로 설백이 달아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사비강 역시 능운파를 따라 내달렸다.
**
탓!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한 인영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숲속을 빠른 속도로 관통하는 자는 바로 설백이었다.
그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쫓아오는군.’
상당한 속도였다.
기감이 익숙한 것으로 보아 정도맹주 능운파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잠깐.
‘한 명이 더 있군!’
능운파와 거의 대등한 속도로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달아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공력 소모가 극심할 터.
그는 내달리는 와중에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매우 얇은 망토였는데,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기물이었다.
순간, 그가 망토를 머리까지 둘러썼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모습을 감춘 설백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잠시 후 인근의 나뭇가지 꼭대기.
사뿐.
한 인영이 부드럽지만 민첩한 동작으로 그곳에 올라섰다.
능운파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흐음. 사라졌다?”
분명 설백의 기척을 따라 전속력으로 질주해 왔다.
한데 이쯤에서 갑자기 기척이 지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잠시 후, 바로 옆의 나무 꼭대기에 또 다른 인영이 멈춰 섰다.
사비강이었다.
“사라졌군요.”
“면목이 없군. 놓치고 말았네.”
“곧바로 쫓아왔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사비강은 말을 뱉으면서도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은신술을 이용해서 기척을 감췄다고는 해도 너무 완벽하다.
물론 설백의 경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달리는 와중에 갑자기 은신술을 펼쳐 이렇게 완벽하게 몸을 숨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마….’
한 가지 의구심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때 능운파가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흩어지도록 하지. 내가 남쪽으로 가보겠네.”
“알겠습니다.”
능운파는 사비강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사비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훑었다.
그가 손을 슬쩍 뻗어 내고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서치!”
순간 푸른빛의 파장이 사방으로 훅 번져 나갔다.
물론, 이는 마나로 이루어진 것으로, 마법을 익힌 사비강에게만 보이는 빛이었다.
다른 고수가 느끼기에는 미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것쯤으로 인식될 것이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숲속 한 곳에 멈췄다.
저만치 푸른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물론, 이 역시 서치 마법을 사용 중인 사비강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카인의 망토였군.’
카인의 망토.
매우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마법 도구인데, 기척을 숨기는데 탁월한 성능을 보인다.
카인의 망토를 덮어쓰면 눈으로 볼 수 없고, 체내의 공력을 숨겨 주기도 한다.
다만, 은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마법 도구들이 그러하듯, 서치 마법을 시전하는 자가 카인의 망토를 만든 제작자보다 높은 서클일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쿠르르르릉! 콰앙!
하늘이 번쩍였다.
그럼에도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탓!
천둥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사비강이 나뭇가지를 차며 날아갔다.
**
‘어째서!’
우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놈…! 설마 내가 어디 있는 줄 아는 건가?’
설백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사비강이 쫓아오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기척은 감쪽같이 사라졌을 텐데, 정확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능운파를 떨쳐냈다는 것이다.
설백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놈은 혼자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않은가?’
한참을 달리던 그가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에 다다랐다.
몸을 훌쩍 날린 그는 계곡 복판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착지했다.
여전히 망토는 벗지 않았다.
혹시라도 사비강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쩌면 우연히 이곳으로 온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하지만 사비강은 정확히 자신을 마주 보며 물가에 멈춰 섰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리 멀리 오진 못했군.”
이쯤 되자 설백도 망토를 벗어 버렸다.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을 어떻게 알았나?”
“숨소리가 워낙 크게 들려야지.”
“건방진!”
쿠르르르릉! 꽈과앙!
설백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하늘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툭, 툭. 투둑.
쏴아아아아!
기어코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일전에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다.”
노괴를 두고 한 말이다.
설백 역시 그 뜻을 알아듣고 미간을 팍 구겼다.
“명줄 하나는 질긴 놈이로다. 하나, 네놈 혼자 나를 쫓아온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다.”
“후후후. 몰랐나 보군. 나는 실수로 사람을 잘 죽인다는 걸.”
“입만 살았구나!”
찰나,
타다다다닷!
설백이 물 위로 수상비를 펼치며 달려갔다.
쒸이이이잉!
빗줄기를 뚫으며 검이 사비강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따앙!
금속성과 함께 설백의 검이 튕겨 나갔다.
다음 순간,
파밧!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설백의 뒤로 돌아간 사비강이 곧장 베르타스를 휘둘렀다.
쒸에에엑!
“흥! 잔재주 따위!”
쩌엉!
베르타스와 설백의 검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돌아선 설백이 검으로 베르타스를 쳐낸 것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츠파아아아!
동시에 설백이 일장을 내뻗었다.
퍼엉!
파바바바밧!
사비강이 보법을 밟으며 빠르게 물러섰다.
설백이 그대로 검을 대각선으로 올려 베었다.
쒸아아아앙!
강기가 사비강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 역시 방향을 틀어 사비강을 향해 날아갔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의 싸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경지였다.
현재 사비강을 향해 튕기듯 날아가는 빗방울들은 하나하나가 암기나 다름없었다.
쩌엉! 타다다다당!
강기를 막아내고 나자, 수많은 빗방울들이 기름 튀는 소리를 내며 베르타스를 두드려댔다.
한참이나 뒤로 밀려난 사비강은 수상비까지 펼치며 원래 설백이 서 있던 바위에 착지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서로 위치가 바뀐 것.
두 사람 모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생각보다 훨씬 강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