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93화 (193/670)

# 193

귀환 마교관

193화

등왕패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럼에도 여길 혼자 왔단 말인가?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감이 아닌가?

아니, 이건 명백한 자만이다.

그래, 그래야 할 터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만을 이용해서 설백을 제거해야만 한다.

등왕패가 표정을 굳히고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알면서도 나오셨소?”

그의 말투와 표정, 기도가 좀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설백의 기도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우러나오는 살기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설백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자네를 키웠네. 내 자네를 모를 줄 아는가?”

등왕패가 아랫입술을 쿡 씹었다.

‘제기랄! 이 늙은 여우가!’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가면 따위는 쓰고 있을 이유가 없다.

“당신은 나를 너무 내몰았소.”

“아니지. 아니야. 자네 스스로 그리 달려간 걸세.”

“당치도 않는 소리! 날 이용만 하지 않으셨소?”

“흐음. 하면 자네에게 한 번 물어보지.”

“뭐요?”

“자네는 날 이용하지 않았나? 내 지위와 내 힘을. 내 권력을.”

“그건….”

“그걸 탓하자는 게 아닐세. 이 세상은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당연한 곳이네.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이 없는 곳일세. 그 오랜 세월을 살고도 아직 깨닫지 못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나한테 그래서는…!”

“안 될 이유가 뭔가?”

“……!”

“세상 이치가 그런 걸세. 쓸모없어진 검은 버려야 하고, 병에 걸린 짐승은 묻어야 하는 법이지. 이치를 거스르게 되면 살아남기 힘들어. 그게 자연의 섭리일세.”

“그래서 나를 버리려고 한 거요?”

“허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네 스스로 그 길을 간 걸세. 버려지는 길을 선택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

스르르릉!

등왕패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신을 따라 검기가 맺혔다.

그것을 신호로,

슈슈슈슈슉!

등왕패의 배후로 복면을 쓴 무인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설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훌륭한 자들이로다. 기도가 남다르구나. 자네가 키웠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설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여유가 등왕패를 조금씩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백이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정이 들면 낡고 무뎌진 검이라도 갈고 닦아서 다시 날카롭게 벼르기 마련이지. 나는 자네를 그렇게 다듬을 생각이었네. 하지만 자네 스스로 거부했지.”

“죽기 싫어 변명을 하는 거라면….”

“등 당주.”

설백이 가만히 불렀다.

큰 소리를 친 게 아님에도 그 목소리에서 심후한 내공이 느껴졌다.

때문에 등왕패가 말을 삼키고는 설백을 조용히 마주보았다.

설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자네는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가?”

“흥!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군. 설 장로. 당신의 비열함이 오늘 이 순간을 만든 거요. 쳐라!”

등왕패가 소리쳤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죽기 싫으면 멈춰라!”

천둥벼락 같은 고함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먼 곳에서 밤새가 떼를 지어 후드득 날아올랐다.

복면인들이 멈칫거리는 순간,

“등 당주. 내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믿을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뭔 개소리를 하려고….”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발끝에서부터 잔잔한 진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곧 지축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히히히힝!

시커먼 철갑을 두른 기마무인들이 사방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등장한 그들은 순식간에 등왕패와 복면인들을 빙 둘러쌌다.

등왕패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 이것들이 어떻게?’

철갑의 무인들은 철마단(鐵馬團)이었다.

총 삼백 명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설백이 직접 창단한 조직이었다.

때문에 설백의 직속 정예단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어째서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반면 설백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나?”

등왕패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뱃속부터 뜨거운 분노가 들끓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가!’

등왕패가 몸을 가늘게 떨며 물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소?”

“나는 주인을 무는 개새끼를 키우지 않네.”

“언제부터 계획한 거였소?”

“허허. 계획은 자네가 세우지 않았던가? 나는 대비를 한 것일 뿐.”

“이익…!”

“자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좀 더 지켜볼까도 생각했지만, 자네가 북명신문주를 죽였을 때 확신했지.”

순간 등왕패는 눈이 뒤집혔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짓을 만인 앞에서 공공연하게 낙인을 찍다니!

역시나 이사흠이 했던 말대로다.

“시끄럽소! 북명신문주는 당신이 죽인 게 아니오! 애초에 비자금을 동방세가에서 빼돌리고 그 책임을 내게 물으려고!”

“역시 예상대로 나오는군. 내 모를 줄 아는가? 자네가 금괴를 빼돌리고 나를 배신하려 했다는 것을. 내 직접 북명신문주에게 이미 들었노라.”

“크크. 웃기는 소리. 그를 죽이면서 환청이라도 들었소?”

“쯧쯧. 끝까지 부인하는군. 모든 증거와 증인이 있는 데도 그렇게 나오시겠다?”

“흥! 그 증거와 증인은 당신이 조작한 것이겠지! 나는 죽이지 않았어!”

“우습군. 조작은 자네가 하지 않았나? 애초에 혈사련주의 밀서라니. 허허허!”

설백이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리자, 등왕패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아까부터 나직이 울어대는 하늘만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밀서가 가짜라는 건 어찌 알았을까?

설백이 웃음을 거두고는 등왕패를 빤히 보았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으니 알려 주지. 모습을 보이시게.”

설백이 고개를 돌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철마단 사이에서 한 사람이 말을 몰고 터벅터벅 나타났다.

등왕패가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내 말 위의 남자가 투구를 벗었다.

그 얼굴을 본 등왕패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떴다.

“너, 너 이 개새끼…!”

“말씀이 거치십니다. 등 당주님.”

차분하게 대꾸한 사람은 놀랍게도 천안각주 이사흠이었다.

이쯤 되자 등왕패는 뒷목을 붙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설백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잘 듣게. 모든 정보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게 되어 있네.”

결국 등왕패가 분통을 터뜨리듯 소리쳤다.

“이익…! 뭣들 하느냐? 저 능구렁이 영감탱이를 치지 않고!”

다시 복면인들이 움직이려고 하자, 설백이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 누구든 내게 대항하면 개죽음을 당할 것이고, 항복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엉거주춤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등왕패가 악을 썼다.

“이 멍청한 것들! 당장 치지 못할까!”

하지만 그의 재촉은 오히려 실이 되고 말았다.

챙그랑.

복면인들이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자 등왕패는 눈알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천안각주 이사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더욱 뱃속이 뒤집혔다.

“이 망할 박쥐새끼가…!”

등왕패가 이를 뿌득 갈더니 곧장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이사흠을 향해 빗살처럼 날아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사흠은 설백보다도 미운 존재였다.

“죽여 버린다!”

찰나, 그림자 하나가 훅 날아들더니 등왕패의 옆구리를 향해 일장을 날려 왔다.

“방해 마라!”

등왕패가 몸을 뒤틀면서 상대의 일장을 막아냈다.

퍼엉!

기가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이 주르륵 밀려났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등왕패가 상대를 노려보았다.

설백이었다.

설백이 손을 가볍게 털어내고는 등왕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의 무공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시게.”

“흐흐흐. 항복하면? 날 살려 주시겠소?”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네. 능 맹주를 제거해 준 보답일세.”

“크하하하! 나를 철저하게 이용한 다음에는 배신자로 몰아세우고 버리시겠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싫다! 내가 죽어가는 마당까지 네놈에게 쓰일 줄 아느냐!”

파바밧!

등왕패가 경신법을 펼치며 단숨에 설백에게 날아들었다.

“어리석은지고.”

설백이 혀를 차고는 양손을 불쑥 뻗었다.

콰앙!

검과 손에서 기의 폭발이 일어나며 이번에도 두 사람이 주룩 밀려났다.

하지만 등왕패가 중심을 잡기도 전에,

“쓸모없이 버려지는 게 더 비참한 것을 모르는구나.”

바로 곁에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퍼억!

설백의 발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등왕패가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콰다앙!

등왕패가 부딪친 나무는 그대로 부서지며 쓰러졌다.

“크익!”

등왕패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설배액!”

그가 이번에는 강기를 일으키며 설백에게 날아갔다.

그럼에도 설백은 여전히 검조차 뽑아 들지 않았다.

대신 착 가라앉은 눈으로 등왕패를 응시하다가 슬쩍 보법을 밟았다.

슈카아앙!

꽈자앙!

설백을 지나치며 그대로 날아간 강기가 관제묘의 문짝을 부서뜨렸다.

설백이 다시 혀를 찼다.

“조급하네. 그래서야 어찌 나를 상대하겠는가?”

“닥쳐라, 설백!”

등왕패가 곧장 몸을 돌리고 설백을 쫓아갔다.

쉭쉭쉭쉭!

그가 어지럽게 검을 내질러 갔다.

그 움직임이 가히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허공에 잔상이 새겨지면서 등왕패가 여러 명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다웠다.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수준.

하지만 같은 초절정의 영역일지라도 그 수준 차이는 극명했다.

원래 산도 높은 곳에 오를수록 경사가 심해지는 법이다.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설백과 등왕패가 떨어져 있는 거리는 겨우 몇 걸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몇 걸음의 높이 차이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시퍼런 검강이 연신 날아드는데도 불구하고 설백은 보법 하나로 그 모든 맹공을 피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등왕패가 격분하면서 평정심을 잃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쨌거나 한참 동안 회피만 하던 설백이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곧이어,

슈우우웃!

그가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등왕패의 품으로 파고들며 일장을 뻗어 냈다.

꽈앙!

“커억!”

등왕패가 피를 토해내며 뒤로 붕 날아갔다.

우당탕탕!

바닥을 한참이나 구른 그가 관제묘에 부딪치고는 겨우 멈췄다.

“그 자리에 머물러 만족하고만 있으니 발전이 없는 걸세.”

냉랭하게 말을 뱉은 설백이 주저앉은 등왕패에게 다가왔다.

등왕패는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끝 모를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좌절이 그의 눈동자에서 스며들었다.

“한심한지고.”

바로 앞에 다가온 설백이 그를 내려다보며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등왕패가 그 시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물어지듯 양손을 바닥에 짚었다.

“크윽. 살려…주십시오.”

“지금 목숨을 구걸하는 겐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등왕패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설백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이리 될 것을 어찌 그리 미련하게 굴었단 말인가? 기억하게. 오르지 못할 나무는 함부로 쳐다볼 일이 아니네.”

등왕패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생각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차라리 베어 버리겠노라!’

찰나,

“죽어라아앗!”

그가 기합을 터뜨리며 모든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갔다.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푸욱!

섬뜩한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하나, 그가 내지른 검은 허공에 멈춰 있을 뿐이었다.

대신 날카로운 검신이 등왕패의 가슴에 꽂혔다.

어느새 설백이 발검과 동시에 그의 가슴을 내찌른 것이다.

“설…백…!”

등왕패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촤아아악!

설백이 검을 뽑아 내자 등왕패가 비틀거리며 물러나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설백… 당신을… 당신을…!”

다음 순간,

푹푹푹푹푹!

수십 자루의 검이 그의 몸을 사방에서 찔러 왔다.

철마단원 중 일부가 날아와 등왕패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 놓은 것이다.

그들이 검을 뽑아내자 전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츄아아아아!

털썩!

등왕패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쯧쯧. 그러게 주제를 알아야지.”

설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였다.

짝짝짝!

느닷없는 손뼉 소리.

설백이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복면인 중 한 명이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복면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자, 여러분. 여기까지입니다. 잘 보셨습니까?”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복면을 벗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설백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네놈은… 사비강?”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설백의 귀를 찔렀다.

“오랜만입니다. 설 장로님.”

설백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뜻밖의 존재가 복면을 벗은 채 서 있었다.

“능…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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