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귀환 마교관
187화
등왕패의 시선이 비어 있는 태사의에 머물렀다.
마침 태사의 옆에 서 있던 군사 구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두 자중해 주십시오. 흉수가 밝혀졌다고는 하나, 우선은 침착하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등왕패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며 소리쳤다.
“흥! 군사께서는 이번 사건에 책임이 없는 줄 아시오? 애초에 맹주께서 몸이 성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번 순방 계획을 무리하게 잡은 것 역시 군사가 아니었소?”
구윤이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등왕패가 여세를 몰아 한쪽에 서 있는 사비강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감찰국주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도대체 뭘 한 겁니까? 맹주님을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이곳에 얼굴을 들이밀다니!”
“감찰국이 호위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뭐, 뭣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물론 최선을 다해 맹주님을 지켜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살막을 쫓던 과정에서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리어 투덜거리듯 대꾸하는 사비강을 보면서 등왕패는 어이가 없었다.
‘내 맹주가 되면 반드시 저놈부터 처리하리라.’
이를 뿌득 간 등왕패의 시선이 이번에는 입구 쪽에 부복하고 있는 다섯 명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등왕패가 순방조에 포함시킨 벽력당의 무인들이었다.
모두 스무 명이었지만 열다섯이 죽고 다섯 명만 겨우 살아온 것이다.
“네놈들은 맹주님의 호위 임무를 맡았으면서도 어째서 살아 돌아온 것이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섯 명의 무인들이 바닥에 이마를 쿵 찧었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놈들은 어둠 속에서 기습을 해왔습니다. 적의 수는 대략 쉰 명이 넘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저희가 곧바로 맹주님을 호위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들은 맹주님과 호신위들까지 해하고 화골산을 뿌려대는 바람에… 크흡!”
무인이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장내에 서 있던 수뇌 인사들의 표정이 침통함으로 젖어들었다.
한편 증언을 했던 무인이 슬쩍 시선을 옮겨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그래야지 네 뱃속에 들어 있는 폭약이 얌전히 잠들 테니까. 후후.’
그때였다.
수뇌 인사 한 명이 서래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분통이 터져서 못 참겠습니다! 당장 저 사파의 개잡년을 찢어 죽여 버립시다!”
“옳소! 우선 저년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시작합시다!”
“본맹이 이대로 당하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무인들이 너도나도 동의하며 소리쳤다.
“자자, 다들 침착합시다.”
근엄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술렁거림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딱히 큰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에서 심후한 내공이 느껴진 탓이다.
사람들이 바라본 곳에는 설백 장로가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여자는 본맹의 유일한 인질이오. 섣불리 처리하면 혈사련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어질 거요. 하니, 우선은 감정을 갈무리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 봅시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이 고개를 숙이며 동의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로들이 그에게 동조하자, 다른 수뇌 인사들도 숨을 죽였다.
그만큼 설백이 내뿜는 기도는 남달랐다.
설백이 구윤과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우선 군사께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이 크오. 맹주님의 순방을 계획했다면 응당 그 호위에 신경을 썼어야 했소.”
“송구합니다.”
“송구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우리 장로회는 군사에게 일 년간의 근신 처분을 내리겠소. 받아들이겠소?”
구윤이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비강 국주.”
“…….”
“국주는 호위대가 아니라고는 하나, 맹주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하지만 역시 맹주님을 지키지 못했으니 군사와 마찬가지로 일 년 간의 근신 처분을 내리겠소.”
“뭐, 알겠습니다.”
사비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후 설백은 순방조에 포함되었던 흑랑대에게도 삼 개월의 근신 처분을 내렸다.
대략의 정리가 끝나자 수뇌 인사들은 당장이라도 혈사련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이사흠이 슬며시 나섰다.
“그전에 한 가지 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설백이 묻자, 이사흠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쟁을 하더라도 조직을 이끌 자가 필요한 법이지요. 급한 대로 임시 맹주를 추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옳은 말이로군.”
설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왕패가 내심 기대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맹주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자신은 지금까지 줄곧 대외강경파이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혈사련을 친다면 임시 맹주로서 자신보다 어울리는 자도 없다.
마침 등왕패의 시선을 받은 측근 한 명이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는 등왕….”
그 순간, 장로 한 명이 불쑥 끼어들며 소리쳤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설백 장로께서 임시 맹주가 되셔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회주께서 임시 맹주로서 맹을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임시 맹주로서는 설백 회주님이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장로를 비롯한 여러 수뇌 인사들이 동의하고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등왕패의 측근들은 감히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도 힘든 분위기였다.
일이 뜻밖으로 흐르자 등왕패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반면 설백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지가 오래요. 이제 와서 맹주 자리에 앉는다면 세간에서 욕심이 많다 하여 흉을 볼까 두렵소.”
하지만 장로들의 끈질긴 설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이건 정식 맹주 자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간 맹이 안정될 때까지 회주께서 기둥이 되어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강호의 그 누구도 회주님을 흉볼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위중한 시기에 무거운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아 저희들이 송구할 따름이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등왕패의 최측근들은 말 한 마디도 꺼내기 힘들어졌다.
등왕패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야? 뭐하는 겁니까? 거절하지 않고!’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설백을 바라보았다.
그 불길함은 적중했다.
설백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졌다.
“정 그렇게들 원하신다면 내 잠시 맹주 자리를 맡겠소. 하나 어디까지나 본맹이 안정될 때까지만 임시로 맡을 생각이외다.”
“어려운 결정 내려 주셔서 저희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로들과 몇몇 수뇌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설백을 향해 찬사를 보냈다.
등왕패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런 엿 같은…!’
그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설백을 노려보았다.
잠깐 눈을 마주친 설백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사람들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
“본맹은 혈사련과 전쟁을 재개하도록 하겠소. 당장 최대한의 무인들을 소집하여 혈사련과 접경 지대인 개평(蓋平) 지단으로 향하겠소!”
“명 받들겠습니다!”
장내의 무인들이 일시에 포권하며 소리쳤다.
한편 고개 숙인 등왕패의 표정은 흙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
“소탈하군. 지나치게 소탈해.”
침소를 둘러보던 설백이 툴툴 웃으며 가구들을 손으로 쓸어 만졌다.
시비들이 부지런히 청소를 해온 탓인지 먼지 하나 없었다.
다만 맹주의 침소라고 보기에는 무척 소박한 환경이었다.
침상과 옷장, 탁자와 벽에 걸린 동경이 가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흔해빠진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방.
그가 픽 웃고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어떻게 보이나?”
“검소하군요.”
무영의 대답에 설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소하지. 하나 이런 모습이 존경은 가져올지라도, 권위를 가져오진 않는 법이네.”
사람을 다스리려면 우선 권위가 있어야 한다.
존경보다 움켜쥐기 쉬우면서도 아랫사람을 찍어 누르는 힘이 바로 권위다.
그리고 설백은 그 권위를 얻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방을 새로 꾸미도록 해야겠어. 최대한 화려해야 해. 고가의 그림을 사들이고, 최고급 비단으로 바꾸도록. 희귀성 있는 자기와 황금 장신구들도 추가해야겠어.”
“전하겠습니다.”
“화려해야 하네. 이곳에 들어선 사람은 입이 딱 벌어지다 못해 주눅이 들 정도로. 결코 내가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설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자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정말이지 맹주전에 이런 소박한 탁자라니.
이러니 아랫사람들이 무시할 수밖에.
설백이 혀를 찼다.
“분에 넘치는 자리였던 게지.”
그가 창가로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사비강 국주는?”
“짐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감찰국을 비울 것 같습니다.”
설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으니, 더 이상 그가 정도맹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곱게 보낼 수도 없지.’
설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비강은 신경 쓰이는 자다.
결국 일이 제대로 풀려서 다행이지만, 등왕패가 거사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 사비강이라는 자였다.
“최대한 빨리 놈을 제거해야겠네.”
“그가 맹을 나서는 대로 즉시 처리….”
“아니, 그전에 처리해야겠어.”
“하지만 맹 내에서 그를 처리했다간 자칫 이목이 쏠려….”
“노괴(老怪)를 풀게나.”
무영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지. 사파에 대한 분노를 부추길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무영의 기척이 사라졌다.
**
감찰총국의 국주전.
사비강이 술병과 잔을 들고 탁자에 앉았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가 잔에 술을 채우다가 문득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나서는 술이라도 훔쳐 마시려고 그러나?”
그러자 출입구 쪽에서 고운 자태의 인영이 스르르 나타났다.
서래향이었다.
그녀가 사비강을 향해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쏠리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에요. 그러다 보니 기척을 숨기는 것도 습관으로 굳었고요.”
“덕분에 은신술은 저절로 연마하겠군.”
서래향이 실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네요.”
“뭘?”
“늘어나는 줄을 잡았다가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다는 것을요.”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내가 내민 줄은 탄성이 좋아서 금방 다시 튕겨 올라올 거요. 걱정하지 마시오.”
“이보세요. 난 오늘 회의장에서 죽을 뻔했다고요.”
“하지만 죽진 않았지.”
“고수 수십 명이 일시에 쏟아내는 살기를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원래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오. 후후.”
서래향이 입술을 꾹 씹으며 사비강을 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반응을 보니 대충은 감이 오는군요.”
“무슨 감?”
서래향의 눈빛이 깊어졌다.
“솔직히 말해 주시죠. 능 맹주. 정말 죽었나요?”
“흐음. 왜 그런 질문을?”
“아무리 생각해도 탄성 있는 줄이 다시 튕겨 올라갈 방법은 그 가설밖에는 없는 것 같아서요.”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확실히 줄을 잡은 거요?”
“이제 와서 갈아탈 줄도 없어요. 아직 당신에 대한 확신도 없지만.”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납장으로 걸어가서는 술잔을 하나 더 챙겨 왔다.
그가 잔에 술을 채웠다.
“앉으시오.”
“지금 뭐하자는 거죠?”
“우리끼리 정사지간의 이차 협정을 맺어볼까 해서. 아주 은밀하게 말이오.”
사비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서래향이 미간을 슬쩍 구기고는 자리에 앉으려는데,
“히야,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출입문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 왔다.
이번에는 사비강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