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귀환 마교관
184화
등왕패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흠의 말은 백번 일리가 있다.
북명신문에서 금괴가 발견된 후 총군사가 느닷없이 순방계획을 세웠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는 정도맹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아니다.
맹주와 함께 순방조로 편성된 감찰총국주와 천멸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안정 추구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진짜 목적은….
“이 기회에 불순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속내겠지. 그렇지 않다면 맹주의 건강이 온전치 않음에도 이런 무리한 일정은 잡지 않았을 테지.”
등왕패가 입매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겁니다. 지금 동방세가와 북명신문의 사건으로 당주님의 측근 세력들이 심리적 동요를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때 맹주님과 감찰국이 순방하게 되면….”
“결국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다는 뜻인가?”
“인간이란 간사한 법이니까요. 죽기보다는 맞기를 원하겠지요. 자칫 힘겹게 쌓아 오신 세력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신의 한 수…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있는가? 아무리 기가 막힌 한 수라도 성공 가능성이 없다면 악수에 불과하네. 자네에게 묻지. 기울어진 이 형국을 되돌릴 만한 신의 한 수가 있나?”
이사흠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당주님의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외부 사람을 이용해야 합니다.”
“외부 사람이라 하면?”
“최근 천안각에서 살막에 접선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살막?”
등왕패의 표정에 이채가 서렸다.
살막은 수많은 신비 조직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살수 조직이다.
다만, 사파의 영역인데다 그 접선 방법을 파악하기가 까다로워 이용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던 곳이다.
정도맹에 속한 당주가 살막에 접선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소문이라도 나는 날엔 여간 곤란해질 일이 아니기에 더욱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한데 천안각에서 접선 방법을 알아냈다니….
“과연 이 각주가 결정적일 때 큰 역할을 해주는군.”
등왕패의 표정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과찬이십니다.”
“하면 구체적인 계획은?”
이사흠이 눈을 빛내고는 대략의 설명을 이어 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맹주는 순방하던 도중 살막의 암살을 받아 살해당한다.
만약을 대비해서 등왕패는 측근 무인들을 이번 순방에 대동한다.
그들은 암살이 시작되면 맹주를 호위하는 척하겠지만, 실은 적극적으로 살막을 도울 무인들이다.
맹주가 살해당하고 나면 흑랑대를 투입해서 증거를 조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를 혈사련의 소행으로 만드는 겁니다. 만약 이때 사비강 국주와 천멸대가 죽어 버리면 더 없이 좋을 것이고,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책임을 엄중히 물어 감찰국을 무력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후에는 혈사련과의 전쟁으로 이어 가면서 내부 감찰을 아예 무마할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맹 내의 시선을 대외로 돌려 버린다면 감찰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겠지요.”
등왕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묘책이다.
게다가 흑랑대가 흔적을 조작한다면 없는 귀신도 만들어 내리라.
하물며 혈사련의 짓으로 조작하는 것쯤이야.
정사대전에서 사실상 패배한 혈사련이라면 맹주를 살해할 동기는 충분하지 않은가?
‘잘만 된다면….’
이 기회에 맹주를 제거하고 감찰국의 피라미 녀석들도 밟아 버릴 수 있으리라.
더구나 이번 순방을 계획한 총군사 구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
“후후후! 이것이야 말로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 사조는 되겠군! 하면 이번 순방에 참여시킬 자들은 어찌 구성하는 게 좋겠는가?”
“우선 믿을 만한 측근 무인들을 추려서 순방에 합류시키고, 흑랑대도 포함하십시오. 흑랑대는 감찰국을 돕는다는 명목이면 충분할 겁니다. 이후 사건이 벌어지면 측근 무인들은 사파의 짓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될 겁니다.”
한 마디로 증인과 증거를 완벽하게 조작한다는 뜻.
“과연.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살막이 의뢰를 받을까? 맹주를 암살하는 건 꽤나 큰 작업이 될 텐데….”
“그들이라면 아마 맡을 겁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아니, 그렇게 진행할 일은 아닌 것 같군.”
“하면…?”
“내 직접 살막과 만나봐야겠네.”
“당주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이사흠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묻자 등왕패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네. 그들이 믿을만한 자들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네.”
신의보다는 실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살막뿐만 아니라 모든 살수 조직이 청부자 간의 신의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실력이다.
이번 일은 그만큼 까다롭고 또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 부분은 자네에게 맡기지. 우리에겐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걸세.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 말고 말하게. 자네도 이제 혜성각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후후.”
“감사합니다, 당주님.”
이사흠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하나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만 머물러 있었다.
**
숲속 호젓한 곳에 오래된 가장이 있었다.
등왕패는 정문에 멈춰 서서는 이사흠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곳이 틀림없는가?”
“예, 분명합니다.”
이사흠이 허리를 숙였다.
그 역시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등왕패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낡아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문짝.
살막에서는 만남의 장소로 이곳을 지정했다.
등왕패가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이사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등왕패가 손을 저었다.
“아닐세. 혼자 들어가겠네.”
“하지만….”
“그들의 조건이지 않았던가?”
살막은 등왕패에게 혼자만 오라고 일렀다.
그것이 막주가 직접 등왕패를 만나주는 조건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이사흠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게.”
등왕패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표정의 이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신비 조직의 수장을 만나는 자리.
어찌 긴장이 되지 않겠는가?
방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공간에 두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혼자 오라더니….’
등왕패는 내심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언제나 아쉬운 쪽은 먼저 연락을 취한 쪽이니까.
지금은 살막의 요구에 철저하게 따라줘야 한다.
탁자 너머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맞은편에는 의자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등왕패는 어중간한 위치에 멈춰 섰다.
“나를 보자고 하셨다지.”
왼쪽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낯선 음성.
사실 그는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예전에 카피 보이스를 이용해서 메모라이즈해 두었던 복리추의 음성을 이용한 것이다.
게다가 복면까지 쓰고 있으니 등왕패는 그가 사비강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다만 살막의 주인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알 거라고 생각하오.”
등왕패가 사비강을 보며 말했다.
복면 위로 드러난 사비강의 눈이 웃음을 그렸다.
“그런데 왜 굳이 보자고?”
“한 번쯤 보고 싶었소. 강호에서 제일가는 신비 조직의 수장이 어떤 분인지.”
“크크크. 같잖은 소리.”
사비강은 일부러 무도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가 짐짓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실력을 의심한 모양이군.”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 청부는 쉬운 일이 아니외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쉬운 일만 했다는 건가?”
사비강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댔다.
그 바람에 낡은 창문과 천장이 후루루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살기.
보통 정파의 무인들이 내뱉는 살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어딘지 더 끈적이면서도 기분 나쁜 이질감이 든다.
그럼에도 등왕패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도 강호 밥을 먹은 세월이 있지 않던가?
한참이 지나서야 사비강이 살기를 거두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면 그 대가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겠지.”
“얼마를 원하오?”
“얼마나 준비했는지?”
등왕패가 미간을 팍 구겼다.
시종 자신에게 하대하는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은 저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오백만 냥. 일시불로 드리겠소.”
과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시불이라 하면, 선수금과 완수금을 따로 두지 않고 단번에 지불하겠다는 뜻.
사비강이 내심 웃었다.
‘확실히 속이 타긴 타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비강이 아니었다.
뽑아낼 수 있을 때 확실히 뽑아내야 한다.
“크하하하!”
사비강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등왕패가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왜 웃소?”
“크크크.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이번 청부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한데 오백만 냥이라. 직접 나를 찾을 만큼 절박했으면서 배포가 그것밖에 되지 않다니 실망이 크군. 어려운 청부를 들고 왔지만, 정작 우리는 쉽게 보인 모양이야.”
“오백만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들어 볼 것도 없겠지.”
사비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왕패가 얼른 말을 붙였다.
“하면 얼마를 원하시오?”
“천만 냥.”
사비강이 딱 잘라 말했다.
등왕패의 안색이 굳었다.
‘이 미친놈이… 천만 냥이라니! 천만 냥이 어디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사실 오백만 냥도 많이 부른 것이다.
중대사를 앞두고 돈 몇 푼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게 싫었기에.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오백만 냥을 부르면, 상대는 자신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잡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오산이었다.
“너무 많소. 조금 조정해 주시오.”
“그럼, 천오백만 냥.”
“뭣이?”
“조정해 달라고 해서.”
사비강의 눈빛이 조소를 머금었다.
등왕패가 입매를 씰룩였다.
금액을 낮춰 달라고 한 말인데 오히려 올려?
그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억누르고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좋소. 받아들이겠소.”
“크크크. 아니지. 받아들이는 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지. 여기에 오백만 냥을 추가로 내놔야겠어. 도합 이천만 냥.”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본막을 시험한 대가라고 하면 답이 되려나?”
말을 가로지른 사비강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피융!
한 줄기 지풍이 등왕패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갔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솟구친 지풍이 천장의 한 부분에 작렬했다.
퍼억!
“크욱!”
천장에서 검은 인영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가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타앗!
이번엔 오른쪽에 앉아 있던 복면인이 쏜살 같이 달려 나가더니 손에 든 비수를 내질렀다.
푸욱!
“끄억!”
천장에서 떨어진 인영은 그 자리에서 심장이 꿰뚫린 채 즉사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등왕패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이천만 냥을 준비해 줘야겠어. 그럼 당신이 원하는 자리는 조만간 공석이 될 테니.”
사비강의 말에 등왕패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노기가 치밀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일종의 희열이다.
자신의 복심 중에서도 은신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대동했다.
호위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살막의 능력을 검증하려는 차원이었다.
만약 이들이 수하의 은신을 끝내 눈치 채지 못했다면 청부는 취소할 생각이었다.
한데 막주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등왕패는 시체가 되어 쓰러진 수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가능하다. 이들이라면…!’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맹주도 제거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뺨을 스친 지풍은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막주가 직접 수하를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일부러 살수를 시켜 제거하게 만들었다.
살수의 능력도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사실 그 살수는 바로 진짜 막주인 악천괴였다.
만약 등왕패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하지만 복면을 쓰고 있으니, 등왕패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등왕패가 포권을 취했다.
“곧 이천만 냥을 준비해 드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