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귀환 마교관
183화
정도맹 북동쪽에 위치한 장로원.
그곳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무화전(武花殿) 후원에는 꽃향기가 진동했다.
오색찬란한 꽃이 만발한 가운데 후원 깊은 곳에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뒷짐을 쥔 채 근엄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보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무화전의 주인이자 장로회주인 설백이었다.
하얀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오셨는가?”
“설 회주님을 뵙습니다.”
정자 아래까지 다가와 인사를 올린 사람은 바로 등왕패였다.
그는 감히 정자 위로 오를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설백의 대답을 기다렸다.
설백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나오는 반응이었다.
등왕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자신이 하는 일마다 전부 엎어지거나 비틀어졌으니까.
더구나 이번에는 북명신문이 내란까지 일으켰다가 실패했으니 엄중한 질책이 이어질 터.
하지만 등왕패도 억울한 부분이 없진 않았다.
‘어째서 북명신문에서 그 금괴가 나온 거지?’
북명신문에서 금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만 알았다.
게다가 동방세가의 적무대가 북명신문에게 당했다니.
북명신문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미 한 배를 탄 조직끼리 서로 금괴 때문에 치고 박고 싸우면 침몰할 일만 남았다는 건 바보 천치가 아니고서야 잘 알 텐데.
결국 북명신문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지시가 내려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자라면 역시….’
등왕패가 고개를 슬쩍 들고 설백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자신의 배후에 설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북명신문주와 동방세가주 밖에 없다.
마침 설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일을 저질렀더군.”
설백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 은근하게 스며 있는 노기를 읽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등왕패가 고개를 숙였다.
설백은 여전히 등왕패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쯤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맹주께서는 아주 강건하시더군. 이번 사건으로 소란스러워진 본맹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순방까지 준비 중이시라고.”
“…죄송합니다.”
“순방을 가는데 감찰국도 포함되었더군. 아마 안정을 핑계로 여기저기 들쑤시며 불순 세력을 제거하겠다는 심산이시겠지.”
“…….”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전태수 단주가 죽었네. 자칫하면 자네까지 위험할 뻔했지.”
“죄송….”
“자네답지 못하군. 언제부터 자네가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곧 좋은 소식 들려 드리겠습니다.”
등왕패의 말에 설백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마침내 그가 등왕패를 돌아보았다.
“요즘 자네 하는 걸로 봐서는 믿음이 가지 않아. 피라미 한 마리를 잡지 못해서 물장구만 치는 꼴이 아닌가?”
등왕패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설백의 질책이 계속됐다.
“손아래 사람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야 어찌 맹을 이끌 수 있겠는가?”
“주의하겠습니다.”
“저기 건물이 보이는가?”
설백의 시선이 저만치 맹주전을 향했다.
이곳에서는 맹주전의 지붕 끄트머리만 겨우 보였다.
“내가 자네를 저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네.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자네의 감각과 수완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였지. 하지만 정사대전의 대패, 감찰총국 신설 저지 실패, 이번 북명신문의 내란까지. 요즘 해온 것들을 보면… 쯧쯧.”
“…….”
“아무래도 내 눈이 틀렸던 게 아닌가 싶군. 실망을 넘어 분노가 느껴질 정도야.”
설백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때가 정말로 화가 난 순간이라는 걸 등왕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등왕패로서도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다.
‘역시…!’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의심이 점점 짙어졌다.
‘설백 장로가 가지치기를 한 걸지도….’
최근 자신이 도모한 일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설백으로서는 은근한 심리적 부담을 느꼈으리라.
하니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북명신문에게 금괴를 취하라고 명을 내린 것일 지도 모른다.
자신과 동방세가를 정리하기 위해서.
따지고 보면 북명신문보다는 동방세가가 좀 더 자신과 가까운 문파였던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아니지, 설마 그러려고. 망상이겠지.’
그래, 아직은 어떠한 증거도 없다.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기분이 영 찝찝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설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동방세가와 북명신문을 구제할 방도를 찾을 겁니다.”
“말은 쉽게 하는군.”
“적어도 절 따르던 문파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실수도 제가 안고 가야 할 문제이지요.”
말 속에 뼈를 심었다.
‘누구처럼 따르던 자를 쉽게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하지만 설백은 냉소를 지었다.
“맹주가 건재하고 총군사는 아예 순방 계획까지 세워 우리 쪽 세력을 소탕하려고 하네. 거기에 감찰국주까지 함께 설쳐대지. 이런 상황에서 그 두 문파를 안고 가시겠다? 갈수록 실망스러운 말만….”
“그 셋을 모두 무력화 할 방도를 모색 중입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 안겨 드리지요.”
처음이었다.
설백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든 것은.
그만큼 등왕패의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고, 계속된 추궁에 은근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설백 장로. 난 아직 죽지 않았소. 그리고 과거에 당신이 키우던 애송이가 아니오. 이제 와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면 안 되지!’
등왕패가 입을 한 일 자로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설백이 껄껄 웃었다.
“등 당주가 독이 바짝 오른 모양이군. 뭐, 지금 모습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더 이상의 실패는 위험할 걸세.”
설백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등왕패 역시 표정을 굳혔다.
이것은 충고가 아니라 경고라는 것을 알았기에.
만약 한 번만 더 실패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쳐내겠다는 뜻이리라.
등왕패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한 가지만 명심하게. 피라미보다 더 중한 자가 바로 지금 저 건물에 앉아 있네. 상대를 분명히 바라보게나. 자꾸 피라미만 쫓다 보면 대어를 낚을 기회도 사라지고 마는 법이니.”
“명심하지요.”
고개 숙인 등왕패가 설백의 발끝을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후원을 벗어나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설백의 심복인 무영(無影)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등 당주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개와 인간은 길들이기 나름이지.”
“하지만 너무 풀어 놓으시면….”
“그러니 우선은 조용히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무영의 대답을 끝으로 설백의 눈이 차츰 가늘어졌다.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이라면….’
**
쒸이이잉!
강기가 날아갔다.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던 잎사귀들이 정확히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바닥에 내려앉았다.
누군가 이를 보았더라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의 면적이 자로 잰 것처럼 균일했기에.
우우웅. 우웅.
사비강의 손에 들린 베르타스가 모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후우우.”
사비강이 길게 숨을 내쉬며 베르타스를 고쳐 잡았다.
턱 끝에 맺힌 땀이 뚝 떨어졌다.
오랜만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수련했다.
‘이 정도면 대략 팔 할에 가깝군.’
회귀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의 전투력이다.
지금 그는 마나와 내공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수련하고 있었다.
일반 무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련 방식이었는데, 강기에 마나를 섞었다.
즉, 마나로 이루어진 오러와 내공으로 만들어진 강기가 절묘하게 섞인 것이다.
이 방법으로 마계에서는 대공의 자리까지 오른 그였다.
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내공이 좀 부족하군.’
드래곤 하트를 복용했지만 회귀 직전과 비교하면 아직도 팔 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공기 중에 마나가 넘쳐나는 마계에서는 오러에 내공만 살짝 섞어도 됐다.
하지만 지금은 내공을 기반으로 마나를 섞어야 한다.
반대의 상황인 것이다.
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오로지 수련이다.
쒸익! 쒸잉! 쒸이잉!
다시 베르타스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원래 마왕의 검이었던 베르타스는 이제 사비강의 손에서도 꽤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검을 부렸을까?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
매설란과 구윤이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이 봐도 상관없었다.
훔쳐본다고 해서 흉내 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자신하기에.
한편 매설란은 사비강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는 넋을 놓았다.
‘이럴 땐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네.’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본 적은 드물었다.
지금의 눈빛과 호흡, 행동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
구윤이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처음 봤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비강은 때로 나비처럼 우아하고 부드럽게, 때론 벌처럼 날쌔고 거칠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더 검을 부리던 사비강이 마침내 베르타스를 거두고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기다리게 했군.”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처음 봤어요.”
매설란의 말에 구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강이 매설란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 내가 좀 멋있다는 건 알고 있어.”
“아니, 아니.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어요.”
“말 하지 않아도 아는 게 있지.”
매설란이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빛나던 눈동자와 진지함이 뚝뚝 묻어나던 표정은 금세 온 데 간 데 없다.
두 사람의 묘한 대화를 듣던 구윤이 쿡 웃었다.
사비강이 그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길은 아니었을 듯한데. 군사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그러자 매설란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드디어 등왕패가 설백 장로를 만났어요.”
“그 말은 등왕패가 압박을 받았다는 뜻이겠지?”
“아마도요.”
이번에는 구윤이 나섰다.
“이제 순방 날짜를 공표할 생각입니다. 등 당주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분명 조급함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때 순방 날짜가 공표된다면 필시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움직일 겁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우리가 가진 말을 하나씩 움직일 차례군. 군사께서는 먼저 이사흠을 움직여 주시오. 나도 준비하겠소.”
**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이사흠의 말에 등왕패가 미간을 구겼다.
지금 이사흠이 하는 말은 매우 엄중한 것이었다.
혹여 누군가 엿듣는 이가 있다간 강호에서 온갖 비난을, 아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등왕패가 침음을 흘리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맹주를… 죽이자는 건가?”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역풍은 더 심해질 걸세. 아마도… 그 역풍은 피바람을 몰고 오겠지. 내 목숨까지도 앗아갈 만큼 거세게 불걸세.”
“당주님만큼이나 저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이사흠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곧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모종의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당주님께서 저에게 신의 한 수가 없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신의 한 수는 그것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때가 됐습니다. 정도맹 복판에 거주하는 맹주를 암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순방 중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흐음.”
“이번 순방을 계획한 사람은 총군사입니다. 거기에 순방조에 감찰총국이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당주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가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