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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182화 (182/670)

# 182

귀환 마교관

182화

“흑랑대주 함천석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제가 방을 잘못 찾은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포권을 하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함천석이 휙 몸을 돌리더니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과 구윤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추량이 재빨리 쫓아가 함천석을 막아 세우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대주님! 너무 빡빡하게….”

[닥쳐! 이 새끼야! 지금 장난해? 넌 내가 어떤 줄을 잡고 있는지 알면서도 나한테 이런 짓을 해?]

함천석이 눈을 부라리며 전음을 보냈다.

추량이 예의 그 실없어 보이는 미소를 배시시 지으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알죠. 아니까 더 이러는 겁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몸보신이라고요. 대주님도 이제 몸보신하셔야지요. 처자식도 있으신 분이….]

[시끄럽다. 넌 나중에 두고 보자. 네가 아무리 제멋대로인 놈이라지만, 오늘 일은 용서가 안 된다.]

[아이참, 정말 왜 이렇게 답답하십니까? 제가 대주님한테 나쁜 일이면 이런 곳에 데려왔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할 짓이 따로 있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압니다! 안다고요! 그만큼 형님한테 중요한 일이라고요! 집에 있는 애랑 형수님 생각도 하셔야죠!]

[너, 이씨….]

함천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추량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온 발길입니다. 일각을 머물든, 한 시진을 머물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일단 대화나 나눠 보시란 말입니다.]

[싫다.]

추량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것까지 쓰진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무슨 말이냐?]

[형님이 절 흑랑대로 데려오실 때 그러셨죠? 내가 흑랑대원이 되면 언젠가 내 부탁 하나는 무조건 들어주겠노라고.]

[…….]

[지금 그걸 쓰지요. 들어가서 대화나 나눠 봅시다. 어차피 내친걸음 아닙니까?]

함천석이 추량을 빤히 바라보았다.

추량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사뭇 낯설게 느껴질 정도.

항상 장난기 많고 매사에 건성인 녀석이었건만.

“후우, 이걸로 네 부탁은 들어준 거다.”

“물론입니다, 대주님.”

그제야 추량이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함천석을 돌려세웠다.

함천석이 다시 나타나자, 사비강이 빙그레 웃었다.

“두 분 대화가 정리됐소?”

함천석은 대답 대신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그 곁에 추량이 앉았다.

추량이 얼른 술잔을 채워 주었다.

함천석이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는 다시 한 잔을 더 받았다.

그렇게 연거푸 세 잔을 마신 함천석이 비로소 잔을 내려 두고는 사비강과 구윤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술을 마시러 왔을 뿐입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렇더라도 다시 돌아와 앉은 건 잘 선택하신 거요. 아니었다면 지금쯤 시체가 되었을 테니까.”

사비강의 거침없는 발언에 함천석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뿐만 아니라 구윤과 추량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하지만 사비강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서로 간에 짐작한 바가 있을 테니, 굳이 빙빙 돌려서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얘기하시지요.”

함천석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말했다.

사비강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쪽으로 넘어오시오.”

“무슨 말씀인지?”

함천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모른 척하자,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빙빙 돌리지 말자니까. 좋소, 더 명확하게 말하지. 함 대주가 등왕패 당주의 측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소. 이번에 동방세가와 북명신문에 파견된 것도 금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함천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빙빙 돌리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저런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함천석이 눈을 부라리며 추량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추량은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윤이 나섰다.

“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들입니다. 내 생각에 함 대주는 상황을 직시할 줄 아는 분입니다. 현재 기울어져 가는 배에 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만큼.”

“내게 한 번 섬긴 주인을 배신하라는 거요?”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에는 어딘지 조소가 서려 있었기에 함천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군사가 저런 웃음을 다 짓는군.’

곧이어 떨어진 구윤의 대답은 더욱 뜻밖이었다.

“이미 한 번 배신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두 번이 어렵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타앙!

함천석이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성질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는 여기까지였다.

그래도 상대는 총군사였다.

그 곁에는 감찰총국주가 있다.

경거망동해서 좋을 건 없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함천석에게 구윤이 차갑게 말을 이어 갔다.

“함 대주께서는 본맹에 충성을 맹세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본맹의 주인은 바로 능운파 맹주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함 대주께서는 맹주님을 섬기는 겁니까, 등왕패 당주를 섬기는 겁니까?”

함천석의 표정이 흔들렸다.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구윤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형세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그나마 흑랑대는 아직까지 본맹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기에 이렇듯 회유라도 하는 겁니다.”

말을 마친 구윤이 사비강에게 눈짓을 보내 왔다.

사비강이 탁자 아래에서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를 꺼내 올렸다.

구윤이 상자 덮개를 열어 보였다.

“어려운 선택을 하는 대가입니다. 돈이 많이 필요하신 걸로 압니다.”

순간 함천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에 채워져 있는 것은 금괴였다.

평생 놀고먹기만 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었다.

구윤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함천석이 흠칫거리고는 구윤을 보았다.

그 표정에 불쾌감이 역력했다.

“몹쓸 병에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요. 맹에서 그 아이를 책임지고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함천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그가 등왕패에 충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 때문이었다.

하나 뿐인 아들이 불치병을 앓으면서 막대한 치료비가 필요했던 것.

등왕패는 그 점을 잘 파악하고서는 돈으로 그의 충성을 샀다.

한데 지금 구윤이 제시한 돈과 조건은 훨씬 더 파격적이다.

금괴는 금괴대로 줄 것이고, 아이의 치료에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은 맹에서 해결해 주겠다니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이쯤 되자 추량이 함천석의 옆구리를 툭 쳤다.

받아들이라는 신호였다.

아마도 추량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리라.

‘몸보신 어쩌고저쩌고 하던 게 이거였군.’

얕게 한숨을 내쉰 함천석이 사비강과 구윤을 가만히 번갈아 보았다.

사실 마음을 흔드는 조건이다.

하지만…

‘지금도 아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돈은 충분히 받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실 그 이상의 돈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거절한다면?”

“죽일 거요.”

순간 사비강이 싸늘한 살기를 흘려 내며 대꾸했다.

함천석은 그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냈다.

‘하긴. 이런 상황까지 와서 내가 거절한다면 살려 둘 수 없겠지.’

구윤이 넌지시 물었다.

“이쪽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돈이라면 이미 아이를 돌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자 사비강이 살기를 거두고 피식 웃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아이의 치료를 위해 돈을 대주겠다고 하는 말이 아니오.”

“하면…?”

“말 그대로 책임지고 치료를 해주겠다는 거요. 완치.”

“무슨 말을…!”

함천석이 미간을 팍 구겼다.

기분이 나빴다.

아들이 처한 환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떠드는 이들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데 이어진 사비강의 말은 그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병을 앓고 있지 않소?”

“그걸 어떻게…!”

아들이 나환자라는 사실은 가족 외에는 추량밖에 알지 못한다.

[너…!]

함천석이 추량을 돌아보는데,

“아아, 감찰국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좀 해서 알게 된 거요. 뭐, 추량을 통해서 확인은 했지만. 이미 그전에 파악해 두었단 말이지.”

그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처음 당이협으로부터 보고를 전해 들었을 때는 사비강조차도 놀랐다.

함천석 대주의 아들에 관해서는 어떠한 기억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한데 당이협의 말대로 기연이라면 기연인 걸까?

그의 아들이 걸린 병명은 정확히 나병이 아니라, 당이협이 걸렸던 ‘질탄의 통곡’이었다.

그걸 확인한 사람이 바로 당이협이니, 틀림은 없을 터.

“대주의 아들은 ‘질타인’이라는 독에 당한 거요. 뭐, 생소한 이름일 거요. 어떤 연유로 그 독에 당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독되었을 때의 증세는 나병과 매우 흡사하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까 말했잖소. 대주의 아들을 치료해 주겠다고.”

“지금 장난하십니까? 제 아들을 입에 올리면서 함부로 절 농락했다간….”

“이미 같은 증상의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면 어쩌겠소?”

“대체 누가…!”

“나요.”

문득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함천석이 얼른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당이협이 서 있었다.

“국주님의 말씀은 사실이오. 그리고 대주의 아들, 내가 치료할 수 있소. 겉보기에는 나병처럼 보이지만 조금 다른 종류거든. 내가 앓았던 병이기도 하고.”

함천석은 너무 놀라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날 놀리는 거라면….”

“그럴 이유가 없지. 시간 아깝게 왜 우리가 대주를 놀리겠소? 이제 정할 시간이오. 길게 끌지 맙시다. 넘어오겠소? 아니면 여기서 죽겠소?”

역시 사비강의 언행은 거침없었다.

함천석은 짧지만 깊은 고뇌에 빠졌다.

아들을 완치할 수 있다니.

한 번쯤 꿈꿔 본 적이 있다.

아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뛰노는 모습을.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진다니?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함천석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사비강을 응시했다.

“정말… 제 아들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물론이지. 단, 내가 아니라 당 대주가 치료하겠지만.”

“그렇게만 되면 여기 있는 분들을 은인으로 모시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농락이라면, 내 모든 것을 걸고 필히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겁니다.”

사비강이 웃었다.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그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지 않아도 되겠군. 대주의 아들은 치료될 테니까. 그리고 난 은인이 될 테고.”

어느새 사비강의 말투가 바뀌었지만 함천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해서, 제게 바라는 게 뭡니까?”

이번엔 구윤이 나섰다.

“언젠간 등 당주가 함 대주를 찾을 겁니다. 지금은 예민한 시기인 만큼 꾹 눌러 참고 있을 뿐이지요. 만약 그때가 되면 함 대주께서는 우리의 지시대로 움직여 주면 됩니다. 아마 그 즈음에는 이게 필요할 겁니다.”

구윤이 탁자 위로 서신 한 장을 밀어냈다.

함천석이 그것을 받아들고 읽었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건…!”

“추량의 재주가 좋더군요. 제가 봐도 정말 설백 장로가 쓴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지요. 적절하게 쓰일 순간이 올 겁니다.”

구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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