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귀환 마교관
181화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은… 확실히 또라이 기질이 있군.’
하지만 별로 놀라진 않았다.
추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먼 훗날, 마계 군단을 추적할 때 발군의 재능을 보였던 추량.
사비강은 회귀를 준비하면서 추량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조사해서 메모라이즈 해두었다.
원래 추량의 성격은 자유분방하다 못해 방만해 보일 정도다.
그런 자가 어떻게 정도맹의 흑랑대에 편성되었을까?
바로 한 동네에서 살았던 함천석 대주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함천석은 어려서부터 추량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흑랑대주가 되었을 때, 일부러 추량을 찾아가서 수하가 되어 달라고 설득한 것이다.
삼고초려 끝에 추량을 얻어낸 함천석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원들보다 추량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녀석인 건 확실하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내게 사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거냐? 넌 소속이 있잖아?”
“소속이 있다고 해서 사부를 모시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흑랑대원 모두 각자 사부는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없어?”
“예, 아직 제가 진정으로 모실만한 사부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 국주님이라면 제가 사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정말 반해 버렸습니다!”
“뭐, 좋아. 네 사부가 되어 주지.”
“헉!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추량은 사비강이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 몰랐던지라 다시 머리를 쿵쿵 찧으며 인사를 올렸다.
“단, 조건이 있다.”
“예…?”
“네가 좀 해줘야 할 일들이 있어.”
“그게 뭡니까?”
“차차 알게 될 거야.”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다시 한 번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북명신문이 내란죄를 일으켰다는 것은 정도문파 사이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요즘 떠오르는 감찰국을 상대로 저지른 짓이니, 사람들은 북명신문에 대해 실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당장 북명신문이 멸문지화를 당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정도맹에서의 감찰국 권한은 이전보다 한층 더 강화됐다.
이러한 소문은 사파에도 퍼져 나갔다.
그 때문일까?
혈사련에서도 정도맹처럼 유망한 후기지수를 양성해서 천멸대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맹으로 돌아온 사비강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북명신문의 모든 죄를 낱낱이 밝히겠다고 천명하며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대로 끝이 아니야. 부패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사골처럼 우려먹어야 한다.”
사비강이 천멸대에게 전한 말이었다.
그가 국주실로 돌아오자마자, 당이협과 매설란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그동안 사비강의 지시에 따라 등왕패 주변을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하던 중 매설란 각주께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그 제기에 당 대주도 동의했고요.”
사비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등왕패에게 배후가 있나?”
순간 당이협과 매설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애써 조사한 결과와 추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뜻밖이어서 그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한데 저리 쉽게 말할 줄이야.
“설마…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나요?”
“뭐, 대충은.”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는 이미 한 번 미래를 겪은 적이 있었기에, 등왕패의 배후에 누군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그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마계가 침공했을 당시, 등왕패를 두고 그런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등왕패가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는.
한데 그 소문이 사실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사비강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 배후가 누구지?”
“설백(雪白) 장로예요.”
매설란이 또박또박 말했다.
사비강이 미간을 좁혔다.
“설백 장로라면 장로회의….”
“네, 회주(會主)죠.”
“그건 뜻밖이군. 물적 증거는 있나?”
“그건… 없어요.”
매설란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녀가 곧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 대주가 직접 조사했고, 제가 검증해 본 거예요. 확실해요. 물적 증거는 아니지만, 모든 정황 증거들이 설백 장로를 배후로 지목하고 있어요. 저도 많이 놀랐어요.”
매설란의 말에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백 장로는 비교적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자로 알려져 있다.
훗날 마계가 침공했을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딘가에서 마계인들과 싸우면서 장렬히 죽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겠군. 어쩌면 혼자만 살겠다고 어딘가에 숨어 있었거나….’
당이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지시하신 흑랑대주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아, 그렇지. 그쪽은 어때?”
“그게…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이것도 기연이라면 기연일까요?”
“기연?”
“저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서 말입니다.”
당이협이 찬찬히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비강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일단 군사를 만나야겠군.”
**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구윤이 찻잔을 들며 칭찬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뭘, 이 정도로. 이제 시작일 뿐이오.”
“하지만 이걸로 북명신문과 동방세가를 엮어서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마 다시는 이전과 같은 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되겠지요.”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사비강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사비강이 훔친 금괴를 어찌 사용할까 내심 걱정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한데 북명신문을 이렇게 엮어 버릴 줄이야.
세간에는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모은 금괴를 두고 동방세가와 북명신문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사고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
북명신문에서 동방세가의 적무대를 회유한 다음 토사구팽했으며, 이 과정에서 감찰국이 개입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것처럼.
물론, 북명신문은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때문에 동방세가주와 북명신문주는 옥살이 신세를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소.”
사비강의 말에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머리를 찾으시려는 거겠지요?”
사비강이 구윤을 보고는 내심 감탄했다.
자신이야 미래를 겪어서 등왕패의 배후가 있으리라 짐작했다지만, 구윤은 이 모든 현상을 처음 겪는 중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등왕패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분석력이었다.
“알고 있었소?”
“아닙니다. 그저 최근 들어서 떠올린 생각일 뿐입니다.”
구윤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등왕패만 척결하면 맹 내의 불순한 세력은 모두 정리가 될 거라고 봤다.
한데 최근 들어 생각이 달라졌다.
사비강이 활약을 펼치면서 등왕패의 반응은 눈에 띌 만큼 조급해 보였다.
적어도 자신이 알던 등왕패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흘러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반대의 상황이 되자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등 당주는 머리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 그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생각이 맞았소. 등왕패의 뒤에 또 한 사람이 있소.”
“누굽니까?”
아무리 구윤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적의 정체를 듣는 순간이다.
물론, 혜성각과 천안각이 지금처럼 강성했다면 이미 밝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구윤은 눈을 가리고 귀를 덮은 군사이지 않았던가?
사비강이 입을 뗐다.
“설백 장로요.”
“설백? 그게 정말입니까?”
구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놀라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설백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아니던가?
사비강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군사께서 감찰국의 조사 내용을 불신한다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소.”
“하, 하지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러니 숨은 세력이 될 수 있었겠지.”
그러고도 구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사비강은 말없이 차를 음미하며 기다려 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오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구윤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와 등왕패가 관련되어 있다는 확실한 물적 증거는 있습니까?”
“없소. 하지만 난 수하들의 판단을 믿소.”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론 신중해야겠지. 그래서 작업을 해볼까 싶소.”
“작업을? 어떤 작업입니까?”
“아주 큰 규모의 작업이 될 거요. 제대로 사기를 쳐야 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은근히 겁나는군요. 그동안 했던 작업도 규모가 작진 않았으니까요. 성공 가능성은 있겠지요?”
“모든 조각이 잘 맞아 들어간다면 말이오.”
“그 조각을 끼워 맞추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저군요.”
사비강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군사는 이해가 빠르시군. 그렇소. 군사께서 그 조각들을 각각의 자리에 끼워 주셔야 하오.”
“판은 국주께서 짤 테고요.”
“그렇소.”
구윤은 뭔가 역할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에 대한 대비도 충분히 해뒀소.”
“반대로 성공한다면….”
“설백 장로와 등왕패 당주 모두를 제거할 수 있을 거요. 어떻소? 그 작업… 한 번 해보시겠소?”
구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빈 잔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그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뗐다.
“새삼스러운 질문이군요. 이미 제 답을 알지 않습니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니까.”
“그 작업에서는 누가 주연입니까?”
“맹주님이오.”
“맹주님?”
구윤의 눈동자가 또 한 번 커졌다.
사비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소? 판이 좀 크다고.”
“끄음. 작업의 순서는 어찌 됩니까?”
“먼저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 말을 구해야 하지. 그 다음은 이간지계(離間之計)요.”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고로 싸움 붙이기보다 재미있는 것도 없거든.”
**
“어딜 데려가는 거냐?”
“요즘 대주님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여서 말입니다. 몸보신을 해드릴까 싶어서요.”
“후우. 그래도 나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암요. 제가 그래도 형님을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너 또….”
“아, 대주님. 대주님.”
함천석이 눈을 부라리자 추량이 얼른 호칭을 정정했다.
함천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픽 웃어 버렸다.
워낙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던 아우였기에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자신이 억지로 붙들다시피 데리고 있는 녀석이니, 좀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이 고쳐지질 않았다.
사실 추량의 말대로 최근 함천석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 북명신문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등왕패는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책임을 흑랑대에게는 일절 묻지 않았다는 것.
한 번쯤 화풀이 대상으로 부를 만도 하건만, 흉흉한 분위기 때문인지 등왕패는 지금까지 흑랑대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민감한 시기에 왕래가 잦으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리라.
어쨌거나 등왕패는 흑랑대마저 내란죄에 연루되지 않은 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만, 함천석으로서는 뭔지 모를 찜찜함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흑랑대주로서 가지는 특유의 직감일까?
왠지 잘 짜여진 판 위에서 굴러다니는 말이 된 기분이다.
그러다 보니 안색이 어두울 수밖에.
함천석이 긴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걷던 추량이 등을 토닥였다.
“자자, 우리 대주님 너무 근심하지 말고 갑시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래,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게 술이나 퍼마시자. 네가 사는 거냐?”
“에이, 우리 함 대주님께 돈을 내게 할 수는 없죠. 처자식도 있으신 몸인데.”
“평소에 그렇게 좀 생각해라.”
“하하하. 얼른 들어가자고요. 다 왔어요.”
두 사람은 정도맹 인근의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맹의 외원에도 여러 객잔이 있었지만, 추량이 기분 전환이라는 핑계로 이곳까지 나온 것이다.
점소이가 달려오자, 추량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삼 층에 예약해 뒀는데.”
“아,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점소이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안내했다.
함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다려…?”
“자자, 아무 생각 말고 갑시다.”
추량이 함천석의 등을 떠밀다시피 삼 층으로 올라갔다.
점소이가 문을 열어 주며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꽤나 호화로운 장식이 가득했다.
그곳에서도 식사를 하는 장소는 우측의 주렴 너머로 조금 더 들어가야만 했다.
그만큼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방이었다.
함천석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너 미쳤냐? 여기 엄청 비싼 방이잖아!”
“글쎄, 돈 걱정일랑 말고 들어가자고요.”
“너 설마 나한테 또 덤터기 씌우면 가만 안 둔다.”
“아참, 그럴 일 없다니까요.”
추량에게 떠밀리다시피 걸음을 옮긴 함천석은 막 주렴을 헤치고 들어서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등불 아래에 호화스러운 식탁.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두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또 보는군. 반갑소.”
사비강이 손을 들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 옆에 앉은 군사 구윤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함 대주.”
한참이나 얼어 있던 함천석이 추량에게 싸늘한 눈길을 던졌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