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귀환 마교관
180화
북명신문의 장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명전 지붕 위.
추량이 그곳에 바짝 엎드려서 천리경으로 지객당의 안마당을 훔쳐보다가 감탄을 터뜨렸다.
“크아아! 완전 멋있어!”
검무를 가장해서 복일룡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을 때, 사비강이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걸 젓가락으로 막아내다니!
어디 그뿐인가?
문주 원상의 검공을 술잔으로 튕겨 내지 않았나?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광경은 처음 봤다.
‘역시 내 생각보다도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어!’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은 자라고 여겼다.
사비강을 둘러싼 뭔지 모를 분위기.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데,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 본 자처럼 여유가 넘치는 고수의 모습이랄까?
아무튼 이건 느낌이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 있는 특징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느낌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하냐?”
문득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곧이어 시커먼 그림자가 그를 덮었다.
얼음처럼 굳어 버린 추량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에 우뚝 선 노인.
그의 가슴팍에는 검은색으로 ‘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헉! 살…막?”
악천괴가 씨익 웃더니 순간 손가락을 튕겼다.
퍽!
한 줄기 지풍에 혈을 직격당한 추량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
원상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수준의 무위를…!’
게다가 천멸대 역시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생도였던 아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북명신문에서 자랑하는 뇌검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것도 정예 중의 정예들이 기습 공격한 것을.
‘우연으로만 볼 수는 없을 터….’
찰나,
콰당!
안마당으로 들어오는 대문이 떨어져 나갈 듯 벌컥 열리더니 느닷없이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가히 백 명은 될 듯했다.
곧이어 사방의 담벼락 위에서도 무인들이 새카맣게 나타나더니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를 본 사비강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북명신문은 검무의 규모도 엄청나군. 검무 두 번 췄다가는 사람이 남아나지도 않겠소.”
그러자 원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흥! 되지도 않는 농은 그만 집어치우시지!”
이윽고 사비강이 깊어진 눈으로 원상을 바라보았다.
원상이 싸늘한 조소를 그렸다.
“국주께선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주셔야겠소!”
차차차차앙!
지금껏 사태를 예의 주시하기만 하던 천멸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천멸대주 단리정이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는 원상을 겨눈 채 차가운 목소리로 일렀다.
“원 문주. 돌이킬 수 없는 짓은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당장 무릎을 꿇고 국주님께 사죄하시오.”
“너, 이 오만방자한 새끼가….”
복일룡이 어금니를 뿌득 갈면서 단리정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단리정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평소 유순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다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에 어울리는 기백이 그에게서 넘쳐흘렀다.
원상이 피식 웃었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세상 흉흉한 줄 모르고 설치는구나. 네놈은 지금 상황이 어떤지나 알고….”
패애앵!
쒸에에엑!
단리정이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두 번의 경고는 없었다.
깜짝 놀란 복일룡이 얼른 원상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따앙!
“크웃!”
촤촤촤아아악!
아슬아슬한 차이로 화살을 튕겨 냈지만, 그 막중한 힘에 떠밀려 복일룡이 삼 장 가까이 밀려났다.
돌바닥에 그의 발자국이 길게 새겨졌다.
‘뭔 놈의 화살이 이렇게나 세단…!’
미간을 팍 구긴 그가 단리정에게 달려들려다가, 이내 멈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단리정은 두 번째 시위를 당긴 채 원상을 조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뭐가 저리 빨라?’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데, 사비강이 싸늘하게 변해 버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뭔가 크게 잘못한 게 있긴 있나 보군.”
“그렇다면 어쩔 거요?”
원상이 놀란 마음을 수습하고는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단리정의 무위가 자못 놀랍긴 하지만, 이미 이백오십 명이 사비강과 천멸대를 포위한 상황이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흐음. 그럼 당신 말대로 되지도 않는 농은 이제 그만 집어치워야지.”
다음 순간,
스스스스스스슷.
원상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숨 막힐 듯한 살기에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복일룡을 비롯한 다른 무인들 모두 휙 돌아섰다.
놀랍게도 주변 전각의 지붕 위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가득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언제 이렇게 많은 자들이…!’
최대한의 인력을 지객당으로 집중시켰다.
해서 장내의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장내에 스며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얼핏 보이는 인원만 해도 복일룡이 준비한 정예들의 두 배는 됨직했다.
그 중 동쪽의 높은 전각에서 달빛을 등지고 있는 자가 포권 하며 소리쳤다.
“섬검목가의 질풍단주(疾風團主) 강소군(康小君), 가주님의 명을 받고 사비강 국주님을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어서 남쪽의 전각 위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포권 하며 소리쳤다.
“섬검목가의 흑무단주(黑武團主) 노독명(魯獨明)이 가주님의 명을 받고 사비강 국주님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각각의 전각 위에서 저마다 불쑥불쑥 나타나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창천문주 호요범! 사비강 국주님을 지원 왔습니다!”
“일성검문의 단리추! 사비강 국주를 돕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왔소!”
“사천당문의 독비단주(毒匕團主) 당고륜(唐古倫)이 문주님의 명에 따라 사비강 국주님을 돕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우렁찬 신고식이 끝나자, 원상은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도대체….’
저들이 왜 북명신문에 있단 말인가?
이쯤 되자 등왕패가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잔잔하게 울리는 진동.
그 떨림이 점점 격하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두두두두두두!
마침내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곧이어,
콰다앙!
안마당의 문짝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시커먼 말을 타고 쏟아지듯 들어섰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내를 포위하면서 기다란 창을 앞세우고는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철혈대가 국주님을 뵙습니다!”
그 기백이 어찌나 대단한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이쯤 되자 북명신문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사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우우웅!
살기가 실린 바람이 장내를 한 차례 휩쓸었다.
원상이 검을 쥔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선택해라. 여기서 검무를 추면서 장렬하게 뒈지든가, 어디 한 번 바짝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해 보든가.”
“크익…!”
원상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검을 부린들 그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생을 사익만 추구하면서 살아왔다.
작금에 이르러서 갑자기 비장함 따위가 생길 리 없었다.
뎅그렁.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살려…주시오.”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 정도로 되겠어? 더 간절함을 보여 봐.”
**
짹짹. 짹.
난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함천석이 눈을 떴다.
길게 기지개를 켠 그가 난간 쪽으로 걸어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이지만 거리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랜만에 숙면이군.’
보통 어제처럼 거사가 치러지는 날은 쉽게 잠들기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오히려 그런 날 철저하게 숙면을 취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관여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길 수 있으므로.
‘그나저나 아침부터 뭔 사람들이 이리 많아?’
그때 문이 열리면서 수하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대주님! 큰일 났습니다!”
이미 상황을 짐작한 함천석이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호들갑 떨지 말고 얘기해라.”
“그게… 북명신문에서 천멸대가….”
“몰살당했나보군. 그럼 이제 우리가 나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 그게 무슨 소리냐?”
그제야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함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 북명신문주가 감찰국주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현재 원상 문주는 내란죄로 붙잡혀 뇌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지금 북명신문이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북명신문이 겨우 스물한 명의 천멸대에….”
“천멸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하가 간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
함천석은 충격으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등골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만약 사비강이 이 모든 것을 예견한 것이라면….
‘자칫하다간 본대도 엮일 뻔했군.’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겉옷을 걸쳤다.
“추량은?”
“그게…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 이 또라이는 이 중요한 시기에 어디에 있는 거야?”
그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
북명전.
사비강 앞으로 의식을 잃은 추량이 털썩 쓰러졌다.
그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부린 악천괴가 싸늘하게 웃음 지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서 지켜보더군.”
사비강이 추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만 가 봐도 돼.”
악천괴가 종적을 감추고 나자, 사비강은 바닥에 쓰러진 추량에게 다가갔다.
찰싹! 찰싹!
그가 거침없이 추량의 뺨을 후려쳤다.
뺨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얻어맞고 나서야 추량이 부스스 눈을 떴다.
“으음… 여긴 어디… 난 누구….”
“정신이 좀 드냐?”
“음? 당신은… 헉!”
깜짝 놀란 추량이 앉은 채로 후다닥 물러나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 사비강 국주…!”
“국주?”
“님?”
“그래, 나다. 추량.”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느닷없이 추량이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순간 추량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잊을 수가 없지.”
“그 정도로…!”
“북명전 지붕 위에서 뭐하고 있었나?”
사비강이 본론을 꺼냈다.
찰나,
쿵! 쿵! 쿵! 쿵…!
느닷없이 추량이 넙죽 엎드리면서 머리를 바닥에 찧는 것이 아닌가?
어찌나 세게 찧는지 이마에서 피가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사비강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일단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목숨 구걸이 아닙니다! 구배지례(九拜之禮)를 하는 것입니다!”
구배지례란, 제자가 스승을 섬길 때나 하는 예법.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추량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소리쳤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사부님! 한눈에 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