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귀환 마교관
177화
연못가에 선 등왕패는 한 식경이 다 지나도록 말이 없었다.
미간에는 내천(川) 자를 깊이 새긴 채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예?”
뒤에 서 있던 이사흠이 눈치를 보며 반문했다.
최근 그는 이중 간자 역할을 하면서 등왕패를 대할 때면 늘 가슴을 졸여왔다.
때문에 등왕패가 의미 모를 말을 할 때면 괜히 불안해지곤 했다.
등왕패는 여전히 시선을 연못에 던진 채 말을 이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지금 이 상황이 좀체 정리가 안 돼. 뭔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단 말이지.”
“…….”
“그래서 결정했네.”
등왕패가 뒷짐을 진 채 돌아섰다.
모종의 결심이 선 표정이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늘 뭔가 엄청난 음모를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언제나 이사흠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복잡할 때는 제일 먼저 걸리적거리는 것을 제거하고 보는 성격이지.”
“하면….”
“그래. 그들을 제거해야겠네.”
“……!”
“이 기회에 감찰국주와 천멸대를 없애 버려야겠어.”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그러니 잘 해야겠지.”
“무슨….”
“사 국주와 천멸대는 겁도 없이 항산에 뛰어들었어. 거기에는 흑랑대가 있네. 뭔가를 제거하고 새로운 흔적을 만들어내기에는 최적의 상황이 아닌가?”
이사흠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추종술에 뛰어난 흑랑대는 어떠한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뛰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들은 누군가를 쫓는 것뿐만 아니라, 가짜 흔적을 만들어 적을 교란시키는 작전도 줄곧 수행하곤 했다.
즉, 등왕패는…
“북명신문으로 감찰대를 치고, 흑랑대로 흔적을 만들어내는 걸세. 그리고 흉수를 혈사련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지. 어떤가? 제법 괜찮은 생각이지 않은가?”
“성공만 한다면… 판세를 크게 뒤집을 수 있겠군요.”
등왕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혈사련의 입장으로서는 이번 정사협정으로 인해 사비강에게 은근한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게야. 하니 그들이 사비강을 죽일 동기는 충분하지.”
“만약 그렇게 되면, 정사대전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도 크겠군요.”
“후후. 그걸 노리는 걸세. 그때는 강경파인 우리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으니.”
확실히 묘수라고 할 만하다.
잘만 된다면.
만약 얼마 전의 자신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작전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과연 사비강 국주가 그대로 당할까?’
묘한 회의감이 밀려든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실패하지 않았던가?
속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사비강과 구윤의 생각을 넘을 수가 없다는 좌절감만 들 뿐이었다.
이 사실을 구윤에게 알리면 사비강은 즉각 그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이다.
만약 알리지 않는다면?
정말 그 사비강이 제거될까?
모든 계획이 등왕패의 뜻대로 흘러갈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수이긴 하지만, 신의 한 수까지는 아니다.
‘이 판을 뒤집으려면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닌 이상 어렵다.’
어쩐지 이런 등왕패의 계책 따위는 이미 사비강과 구윤이 염두에 두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등왕패가 입을 열었다.
“북명신문으로 밀서를 보내게.”
**
“이게 뭔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원상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생뚱맞게 적무대가 항산에서 죽은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상황인데, 북명신검에 당한 흔적이라니.
감찰국도 신경 쓰이는 마당에 흑랑대의 눈치까지 봐야 하지 않나?
게다가 사비강의 그 안하무인한 태도란….
‘시건방진 새끼.’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설된 감찰국의 국주가 최근 화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진 지단에서 머물렀던 사비강과 천멸대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었다.
강진 지단의 부패를 파헤치기는커녕 실컷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해서, 그들이 온다고 해도 잘 접대만 하면 그만이리라 생각했다.
한데 자신을 향한 사비강의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쌀쌀하기 짝이 없다.
‘혹시… 환영식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마침 곁에 선 복일룡이 넌지시 한 마디 붙였다.
“우선 비위 거스르지 않도록 잘 대접하라고 조치해 두었으니 좀 더 지켜보시지요.”
“제길, 한낱 생도들이나 가르치던 교관 따위가 감히….”
이를 뿌드득 갈던 원상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감정적으로 나설 일이 아니다.
우선은 걸리적거리는 천멸대를 무리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급선무다.
“묘안이 없을까?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개할 묘안이 필요해… 묘안이….”
때마침 총관이 실내로 다급히 들어섰다.
“문주님, 맹에서 밀서가 왔습니다.”
“맹에서?”
원상이 흠칫거리고는 총관이 내미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점점 사악한 미소로 변해 갔다.
복일룡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후후후. 등 당주께서 우리에게 묘안을 제시하셨다.”
“묘안…요?”
**
북명신문에는 병기고가 두 군데 있다.
묘조각(猫爪閣)과 호조각(虎爪閣).
묘조각은 주로 연습용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이고, 호조각은 살상용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때문에 호조각은 번을 서는 무인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지만, 묘조각은 특별히 입구를 지키는 자가 없었다.
밤이 깊은 시각, 사비강은 묘조각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라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그는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그대로 묘조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묘조각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희미하지만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워낙 밤바람이 거세게 부는지라, 어지간하면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소리였다.
잠시 후, 사비강이 묘조각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번에도 주변을 한 차례 살펴보고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사비강이 떠난 묘조각 입구에 그림자 하나가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사비강이 걸어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추량이었다.
추량은 밤중에 산책을 하던 중 멀찍이 지나가는 사비강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몰래 뒤따라온 것이었다.
호기심이 가는 상대의 뒤를 밟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그런데….
‘흐음. 이 시간에 수색이라도 한 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그가 잠시 갈등했다.
사비강을 쫓아가 볼 것인가?
아니면 묘조각 안에 들어가 볼 것인가?
이대로 자리를 뜨기에는 조금 전에 들린 소리가 영 신경 쓰였다.
다소 희미하긴 했지만 분명 뭔가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였다.
결국 그는 묘조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묘조각에 비치되어 있는 목검과 목도를 보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옛날 생각 나는군.”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때, 목검을 휘두르며 초절정 고수가 되겠다고 떠들던 시절이 떠올랐다.
‘뭐, 날 그렇게 만들어 줄 만한 스승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지만. 그나저나… 여긴 왜 온 거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생각과 달리 묘조각은 멀쩡했다.
뭔가 깨진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묘조각을 벗어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한쪽에 작은 고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고리를 잡아당기니 덮개가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하가 있었군.’
보통 병기고에서 이런 지하는 잡동사니를 쌓아 두는 곳으로 이용된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여전히 뭔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신경이 쓰였던 것.
바닥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추량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가 입을 척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깨진 물건은 없었다.
대신 그보다 더 엄청난 광경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어둠 속을 채우고 있는 그것들은 누런 금괴들이었다.
**
어두컴컴한 숲속.
사비강이 라겔의 주머니에서 고철 덩어리를 하나 꺼내더니 깊이 파 둔 구덩이에 집어던졌다.
철그덩!
구덩이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고철더미와 함께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 라겔의 주머니에서 꺼낸 것들이었다.
마침 맞은편에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왔나?”
사비강이 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검은 무복을 입은 자는 귀영단의 일영, 홍염이었다.
그가 구덩이에 쌓인 고철과 잡동사니를 보고는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뭐, 청소 좀 대신 해줬지. 쓸모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홍염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더 이상 캐묻진 않고 보고를 이어 갔다.
“혜성각에서 등 당주가 북명신문으로 밀서를 보낸 걸 확인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다른 건?”
“모든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그래. 그럼 적절한 시기는 다시 알려 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홍염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취를 감췄다.
사비강이 라겔의 주머니에서 마지막 고철더미를 꺼내 구덩이에 던지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슬슬 입질이 오겠군.”
**
다음날, 천멸대는 본격적으로 북명신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면적 목적은 적무대의 죽음과 북명신문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었다.
때문에 온갖 서류까지 꼼꼼히 훑어보느라 생각보다 진척이 더딘 편이었다.
한편 그 모습을 멀찍이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가 있었으니….
“신경 쓰이는 것들 투성이군.”
함천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가장 의심스러운 자는 북명신문의 장문인, 원상이다.
동방세가의 금괴를 알고 있는 자.
그리고 시체들의 검상에서 발견된 북명신검의 흔적들.
마지막으로 적무대 조장이 가지고 있던 금괴.
이 세 가지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을 할 만하다.
한데 눈앞에서 자꾸 알짱거리는 저 천멸대가 또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번 금괴 사건은 절대로 천멸대가 알아서는 안 될 일.
하지만 적무대의 죽음이 금괴와 뗄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흑랑대로서는 함부로 나서서 조사하기도 껄끄럽다.
물론, 흑랑대원의 입단속은 철저하게 시켰으니 상관없겠지만.
‘역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군.’
다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곁에 쪼그려 앉아 있던 추량이 불쑥 입을 열었다.
“대주님. 지금 저 사람들, 뭐하는 거죠?”
함천석이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 천멸대 말이에요. 지금 뭐하는 거죠?”
“보면 모르겠나? 수색 중이잖아.”
“역시 그렇죠? 수색하는 거 맞겠죠?”
“그럼, 네 눈에는 저게 집 구경이라도 하러 다니는 것처럼 보이냐?”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흐음. 거참, 이상하네.”
추량이 이마를 긁적이며 어젯밤에 겪은 일을 떠올렸다.
‘내가 귀신이라도 본 건가?’
분명 어젯밤 묘조각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사비강이 아닌가?
그런데 그 금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물론, 사비강과 천멸대는 금괴의 존재 여부조차 모른다지만, 그래도 그만한 양의 금괴가 지하에 있는 걸 발견했다면 그냥 넘어가진 못할 텐데.
지금쯤 묘조각부터 바로 수색하러 가야 하지 않나?
‘설마… 정말 못 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