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귀환 마교관
176화
북명신문의 문주 원상(元常)이 미간에 주름을 팍 새기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탁자 앞에 놓인 다과가 자리를 잃고 흐트러졌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검상이 북명신검으로 보인다니!”
“저 역시 놀랐습니다만, 틀림없는 북명신검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럼 우리가 적무대를 말살했다는 소리잖나?”
“아무래도 덫에 걸린 듯합니다.”
뇌검대주(雷劍隊主) 복일룡(卜一龍)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자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원상은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북명신문에서 최정예 타격대를 거느리고 있는 복일룡은 실력만큼은 확실한 자였다.
실제로 직위와 무관하게 그는 문주 다음으로 실권이 막강한 자이기도 했다.
복일룡이 예상한 답을 내놓았다.
“몇 번씩이나 확인했습니다만… 상거악 대주를 비롯한 몇몇 시체들은 북명신검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허어.”
원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이 꼬여도 참 더럽게 꼬였다.
“혹시 정말로 우리 애들이 한 짓일 가능성은?”
“그렇잖아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만, 그런 짓을 한 자는 없었습니다.”
“끄음.”
원상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좋지 않다.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건 정말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다.
“곧 흑랑대가 도착할 텐데… 그들이 알아낼 가능성은?”
“그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겁니다. 게다가 적무대를 죽인 흉수는 북명신검에 대해 이해가 깊은 자입니다. 놀랍게도 말이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원상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지금까지 북명신검은 외부로 그 절기가 유출된 적이 없다.
한데 누가 감히 북명신검을 흉내 냈단 말인가?
원상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아예 시체를 훼손하는 건 어떤가?”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자칫 섣불리 행동했다간 더 큰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겠지요.”
“골치 아프군. 곧 흑랑대가 도착하면 분명 우리가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의심할 수도….”
그때였다.
시종 하나가 들어와서 알렸다.
“문주님, 흑랑대가 도착했습니다. 흑랑대주님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원상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벌써 도착했다고? 하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 지금 어디에….”
“몸소 나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마침 무뚝뚝한 목소리가 불쑥 들리더니 실내로 함천석이 들어섰다.
그의 곁에는 추량도 함께였다.
두 사람을 본 원상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가 속내를 애써 감추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함 대주, 오랜만이오. 이리 바쁜 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오.”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뭣들 하느냐?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어서 숙소로 안내….”
“그럴 것 없습니다.”
함천석이 불쑥 끼어들더니 말을 이었다.
“곧 감찰국이 도착할 테니 그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거침없는 태도에 원상이 내심 불편한 표정으로 복일룡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복일룡이 나서며 말했다.
“발견된 시체는 본문에서 남서쪽으로….”
“거긴 이미 보고 왔소.”
‘벌써…?’
복일룡이 흠칫거리고는 다시 원상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함천석이 불쑥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요?”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함천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정 그렇게 나오시겠습니까? 사체의 몸에 새겨진 검상은 분명 북명신검에 당….”
“오해요!”
갑자기 끼어든 자는 복일룡이었다.
“오해?”
“누군가 파놓은 덫에 걸린 거요!”
“덫이라고 하기엔 북명신검이 굉장히 정교해 보였소.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니었소만.”
“단지 그런 걸로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
복일룡이 발끈해서 소리치는데, 원상이 그를 제지하며 나섰다.
“실은 나도 답답한 노릇이오. 혹여나 내 지시도 없이 수하들이 저지른 잘못일까 싶어서 자체적으로 조사도 했지만, 도통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소. 애초에 우리가 왜 적무대를 멸살하겠소?”
그때 불쑥 튀어나온 또 다른 목소리.
“뭐, 토사구팽일 수도 있죠.”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함천석 곁에 서 있던 추량이 어느새 쪼그려 앉은 채 먹다 남았던 다과를 집어 들고 우적우적 씹고 있는 게 아닌가?
복일룡이 기가 찬 표정으로 따졌다.
“토사구팽이라니 그 무슨…!”
“동방세가의 금고에 막대한 금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순간 흠칫거린 원상이 함천석을 바라보았다.
이런 정보까지는 한낱 대원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함천석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믿어도 될 놈이오. 어느 정도는 알아야 추적하기도 수월해서 말이오.”
사실 함천석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추량에게 금괴에 관련된 간략한 내막을 전해 주었다.
한데 의외로 추량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 듯했다.
조직의 수장이 누굴 섬기든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저 눈앞에 놓인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에만 흥미를 보이고 있을 뿐.
원상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그렇네. 동방세가의 금괴는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추량이 여전히 다과를 깨물어 먹으며 답했다.
“뭐, 적무대를 시켜 금괴를 훔쳐오게 한 후, 그에 대한 대가를 주지 않는 대신 입막음으로 죽여 버리면… 금괴도 얻게 되고, 뒤탈도 없겠지요. 한데 사후 처리가 영 아쉬웠지만.”
이쯤 되자 듣고만 힜던 복일룡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발대발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네놈은 뭔데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내뱉으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느냐!”
“아아,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익…!”
복일룡이 주먹을 쥐고 당장이라도 쳐 죽일 듯 바르르 떨었다.
추량의 도발 아닌 도발 때문에 실내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그때였다.
시종 한 명이 다시 급하게 달려왔다.
“문주님, 지금 막 감찰국주님과 천멸대가 도착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원상이 눈을 지그시 감다가 피곤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내 하나만 분명히 해두겠소. 적무대의 죽음은 우리와 일절 상관없다는 것. 그러니 감찰대 앞에서는 언행에 좀 더 신경 써 주셨으면 하오. 특히 멋모르는 강아지가 함부로 짖지 않도록.”
말을 남긴 그가 휑하니 실내를 나가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량은 마치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다과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느라 바빴다.
“에이, 이건 껍질을 까다 말았네. 난 껍질이 아예 없는 게 좋은데.”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덜미를 함천석이 낚아채듯 잡고는 끌고 갔다.
**
북명전(北明殿) 안마당의 분위기는 굉장히 오묘했다.
사비강을 비롯한 천멸대가 출입구 쪽에 도열해 서 있었고, 북명전을 등진 원상과 복일룡 그리고 그 옆에는 흑랑대원들이 마주 서 있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조직이 한자리에 모이니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했다.
문주 원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감찰총국주님을 이렇게 뵙는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제가 그렇게 유명해졌습니까?”
“아무렴요. 이곳 항산에서도 국주님의 명성이 자자합니다. 게다가 천멸대의 활약도….”
“천멸대가 아닙니다.”
“예?”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입니다.”
“아… 예. 그… 감찰국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저쪽은….”
사비강의 시선이 흑랑대주 함천석에게 향했다.
흑랑대주가 가늘게 눈을 여미는데,
“넵! 안녕하십니까? 흑랑대원 추량입니다!”
추량이 방실방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함천석이 말없이 추량의 뒤통수를 딱 때렸다.
그러고는 울상을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추량을 무시한 채,
“흑랑대주 함천석입니다.”
하고는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아, 흑랑대가 여기에 와 있었구려. 미처 몰랐소. 그나저나 흑랑대가 이곳에 왔다니, 참 잘 됐군. 혹시 그쪽도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거요?”
“뭐, 그런 셈입니다.”
“오오, 그거 잘 됐군.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겠소. 혹시 그럼 사체는 확인하셨소?”
“아직….”
그 순간, 다시 눈치 없는 추량이 불쑥 나섰다.
“넵! 확인했습니다!”
함천석이 눈을 부라리며 추량을 노려보았지만, 추량은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 발견한 거라도 있소?”
이번만큼은 함천석이 얼른 대꾸했다.
“아뇨. 현재로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렇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사비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날고 긴다는 흑랑대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니. 참 대단한 자가 저지른 일인가 보오.”
“…….”
분위기가 묘하게 식어가자 이번엔 원상이 얼른 나섰다.
“하하하. 그럼 인사는 모두 나눈 것 같으니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사비강의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식었다.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원상이 흠칫거리고는 반문했다.
“예?”
“아니, 그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우린 이곳에 놀러온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사비강의 표정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차갑게 말을 이어 갔다.
“오늘부로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는 북명신문의 모든 전각을 조사할 것이며, 북명신문은 이에 일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협조해야 할 거요. 만약 조사를 방해하는 그 어떠한 짓이라도 있을 경우, 감찰총국주의 권한으로 즉결심판이 가능하다는 것도 명심해 주시오.”
원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갑자기 바뀐 말투는 그렇다 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시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비강이 히죽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뭐, 물론 문주님께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흑랑대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참, 흑랑대의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시체만 확인하면 뭔가 딱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었소. 그래서야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소?”
함천석이 어금니를 꾹 깨무는데,
“넵! 분발하겠습니다!
추량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추량이라. 원래 저런 녀석이었군.’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먼 미래에 추량은 마계의 군단을 추적하는 무림 일인자가 된다.
한편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멀어져 가는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추량의 눈은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사비강 국주라….’
그가 함천석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사람인데요?”
“퍽이나.”
함천석은 냉랭하게 말을 뱉고는 걸어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량은 왠지 들뜬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쩐지 여기서… 엄청난 일이 마구 마구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란 말이야.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