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귀환 마교관
173화
이사흠이 알던 총군사는 앳된 외모에 머리 좋은 것 하나만 믿고 세상 물정 모른 채 설치는 애송이였다.
한데 언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 발톱을 숨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사흠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구윤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 각주님은 등 당주님과 어울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사흠이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걸어가려는데,
“각주님?”
“예? 예!”
“이거 가져가셔야지요.”
구윤이 서신을 던지자, 이사흠이 얼른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들고는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비령이 구윤을 돌아보았다.
“변하셨군요.”
“변할 수밖에. 그래서 싫으냐?”
“아뇨. 보기 좋습니다.”
“사람을 죽이도록 지시한 걸 두고 보기 좋다는 사람은 비령 말곤 없을 거야.”
“그만큼 군사님이 강해지셨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윈 별로 관심 없습니다.”
구윤이 피식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에게 배운 모양이다.”
사비강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비령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천안각주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요.”
“그래야지. 그래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런 일은 없길 바라야지.”
구윤이 쓴 웃음을 지으며 시체가 된 시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퐁!
연못 위로 잉어 한 마리가 힘차게 뛰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정도맹 장원에 있는 후원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곳.
바로 등왕패가 거주하는 벽력당의 후원이었다.
제법 너른 연못 한쪽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는데, 등왕패는 그곳에서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똑.
마침 백돌이 바둑판에 놓였다.
그러고도 등왕패는 한참이나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치밀한 암산과 고민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을 하는지 옆에서 칼을 들이밀어도 모를 것만 같았다.
“흐음.”
그는 침음을 흘리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예전부터 마음이 심란할 때면 이렇게 홀로 바둑을 두곤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만두었는데, 이제야 다시 바둑판을 찾은 것이다.
등왕패가 혀를 끌끌 찼다.
“너무 성급했군. 백돌답지 않게. 근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바둑을 두다 보면 이렇듯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최근 자신은 굉장히 성급했다.
원인 모를 불안감에 일을 서둘렀고, 그 바람에 중요한 수하까지 잃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한심했던가?
상대가 예기치 못한 수로 나올수록 더욱 치밀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을.
그저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섣불리 대응하면서 더 큰 것을 잃고 만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인 것을.’
나직이 한숨을 내쉰 등왕패가 흑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 두었다.
똑.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리하니 생로(生路)가 보이지 않는가?’
그가 바둑판을 내려다본 채 불쑥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급하신가?”
마침 벽력당 건물을 돌아 나오던 이사흠이 먼발치에서 멈춰 서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집무실에 계시지 않아서 한참을 찾았습니다.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그것이 급히 보셔야 할….”
이사흠이 달려오며 말을 잇자, 등왕패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 서두르지 말게. 급할수록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서두르다 보면 바로 목젖에 와 닿은 칼날도 보지 못하는 법이야.”
이사흠이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하지만 당주님 그전에 먼저 이 서신을 보셔….”
“이리 와보게.”
등왕패가 여전히 바닥판을 내려다본 채 손을 까딱이며 불렀다.
이사흠이 얼른 다가가 서신을 내밀었다.
“급히 확인하셔야 합니다.”
“쉿.”
등왕패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며 주의를 주었다.
이사흠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이 영감은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어울리지 않게 여유를 부리는 등왕패를 보고 있자니, 내심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이제 이중 간자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버린 시녀가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등왕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형세가 어떤 것 같나?”
“현재로서는 맹주님의 측근들이 득세를 하고….”
“아니, 아니. 그것 말고 이것 말일세.”
등왕패가 턱짓으로 바둑판을 가리켰다.
이사흠이 미간을 좁히고는 바둑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흑이 유리합니다.”
“그렇지.”
등왕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차기 군사답군.”
예전 같았으면 그 칭찬에 어깨춤이라도 출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차기 군사는커녕 목숨이나마 멀쩡히 부지하면 다행인 상황입니다.’
이사흠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등왕패는 자신의 말만 이어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네. 한데 백이 조금 서둘러 버렸어. 그리고 그 틈을 타서 흑이 절묘한 한 수로 형세를 뒤집었지. 침착한 대응이 최고의 한 수를 생각해낸 걸세. 자, 이제 백돌의 차례일세. 자네라면 어디에 둘 텐가? 한 번 두어 보겠는가?”
이사흠이 가만히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백돌을 주워 들었다.
잠시 후, 그가 백돌을 내려 두었다.
등왕패의 표정이 뜨악해졌다.
“호오! 대단하군. 다시 형세가 뒤집어졌군. 백의 형세로 완전히 기울었어! 놀랍군, 놀라워.”
이사흠이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침착한 대응으로 일순간의 위기를 면할 수는 있겠으나, 전체적인 형세를 한 번에 뒤집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걸로 흑의 세력은 많이 약해졌으니… 신의 한 수를 찾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겁니다.”
등왕패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분위기가 백으로 완전히 기울었어.”
‘그렇지요. 분위기가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저쪽으로 말입니다.’
이사흠의 표정은 썼다.
그제야 등왕패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보고하게.”
“동방세가의 금고가 털렸습니다.”
순간 등왕패가 흠칫거렸다.
“가만. 지금 뭐라고 했나?”
이사흠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주면서 다시 한 번 말을 덧붙였다.
“동방세가의 금고가 털렸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등왕패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신을 받아들고 읽어 내려갔다.
이내 글귀를 읽어 가는 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콰앙!
그의 주먹이 바둑판을 거칠게 내려쳤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바둑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등왕패가 벌떡 일어나서는 이사흠에게 따졌다.
“아니, 이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당주님께서 급할수록 돌아가라….”
“돌아갈 때가 따로 있고, 신속할 때가 따로 있지! 이런 제기랄!”
등왕패가 제 속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온 데 간 데 없었다.
“니미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등왕패가 이를 빠득 갈고는 다시 한 번 서신을 훑어보았다.
이윽고 눈을 지그시 감은 그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니다. 침착하자. 그래, 급할수록… 침착하게… 제기랄! 도대체 이 병신 같은 녀석들은…! 후우… 아니지, 아니야. 침착하자. 성급하게 움직이면 또 일을 그르치고 만다.’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한 등왕패가 겨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여기서 섣불리 단언할 수 있는 사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감찰총국의 사비강과 천멸대가 다녀갔고, 적무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네. 과연 이게 우연일 것인가?”
“그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지자들의… 첨언을 수용해서 최대한 빨리 흑랑대(黑狼隊)를 파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랑대는 정도맹에서 최고의 추종술(追蹤術)을 지닌 조직이었다.
오죽하면 흑랑대가 나서면 솔밭에서 바늘도 찾아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일까?
그들이 나선다면 이번 일의 흉수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등왕패가 다시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랑대를 파견하도록 하게. 혹여나 주변의 시선에 주의하도록 하고. 그저 적무대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으로 보여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이사흠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
강진 지단에 머물고 있는 사비강과 천멸대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있었다.
매일 같이 차려지는 진수성찬에 생도들은 끼니마다 산해진미를 맛보았고, 날마다 뜨끈하게 데운 물로 목욕을 즐길 수 있었으며, 밤마다 연회를 베풀어 음주가무를 즐기기까지 했다.
몇몇 생도들은 감찰대로서 이렇게까지 흥청망청 즐기기만 해도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다신 누리지 못할 영화일 수도 있으니까.”
라는 사비강의 무서운 한 마디에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감찰총국의 방문으로 바짝 긴장을 하고 있던 강진 지단주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편 사비강은 숙소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몇 술 뜨던 그가 볶은 쇠고기를 입에 넣더니 불쑥 물었다.
“잘 처리했나?”
누구에게 건넨 말일까?
곧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튼 기감 하나는 귀신처럼 밝다니까.”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살막의 새 주인 악천괴였다.
사비강이 여전히 젓가락을 놀리면서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자신 있다면 한 번쯤 살수를 써 보던지.”
“아서, 한 번 죽어 봤으면 됐지, 뭘 또 죽으라고.”
악천괴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일은?”
“적무대 조장 한 놈을 세가의 북쪽 철괴산(鐵塊山)에 던져 두고 왔네.”
“산 어디?”
“버려진 사당에 두었지.”
“물건은?”
“물론 그놈 품에 고이 넣어 두었다. 저승길 노잣돈으로는 넘치다 못해 환생이라도 할 지경이겠어.”
사비강이 음식을 입에 가져가며 다시 물었다.
“다른 자들의 사체는?”
“걱정 붙들어 매라고. 멀쩡하게 잘 보관해 두었으니까. 상태가 아주 좋아.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다니까. 클클.”
악천괴 나름의 농이었지만, 사비강은 웃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잘했군. 그림은?”
“그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것 말인가? 그것도 원하는 곳에다 고이 놓아 두었다. 뭐, 그런 거야 우리 애들에게는 일도 아니지.”
“어느새 우리 애들이 됐군.”
“클클. 어디서든 장수하려면 변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 해서 장수하다 못해 회귀했듯이.
“수고했어. 아, 이래저래 고생해 줬는데 이거라도 먹고 갈 거야?”
사비강이 먹던 음식을 가리키자, 악천괴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사비강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농담이었어.”
그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휙 집어던지는 게 아닌가?
악천괴가 얼른 낚아챈 것은 다름 아닌 금괴였다.
“회포 풀기에는 충분할 거야.”
악천괴가 픽 웃어 버리더니 금괴를 품에 갈무리하고는 돌아섰다.
그가 곧 자취를 감추어 버리자, 사비강은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이제 슬슬 북명신문을 낚을 차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