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귀환 마교관
172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사흠은 내심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통 일이 아니야. 빨리 알려야 한다.’
그렇게 복잡한 내원을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향하면 군사가 머무는 혜성각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가면 등왕패가 머무는 벽력당이 있었다.
천안각주가 혜성각의 협업 조직인 것을 생각한다면 응당 그가 향해야 할 곳은 왼쪽 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가 막 길목으로 접어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슈욱, 탁!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지더니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이사흠이 후다닥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웬, 웬 놈이냐!”
“평소에 죄 지은 게 많소? 왜 그리 놀라시오?”
무뚝뚝한 어조로 물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암영대주 당이협이었다.
민망해진 이사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기분 나쁜 내색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나니 놀라는 것 아니오? 대체 이게 무슨 유치한 장난이오?”
“놀랐다면 사과드리겠소. 한데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길이시오?”
“흥,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알 바가 아니라… 본 감찰총국은 맹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감사할 의무와 권리가 있소만.”
“아무리 그래도 날 무슨 혐의로 감시한다는 거요?”
“흐음. 그렇게 나오시겠다… 알겠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당이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을 비켜 주었다.
이사흠이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윽고 걸음을 뗐다.
그런데 두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당이협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래도 천안각주이신만큼 생각이 꽤 깊으실 줄 알았는데. 단순한 건지, 용감한 건지. 후후.”
이사흠이 멈칫하고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뭐요?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요?”
당이협이 이사흠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국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소.”
당이협이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사흠의 눈이 차츰 커졌다.
‘저건…!’
일전에 사비강이 자신을 구출해 줄 때 강제로 쓰게 했던 것이 아닌가?
당이협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자필로 쓴 이 한 장의 서류만으로도 이미 당신의 직위는 해제하고도 남소. 아니, 어쩌면 이 내용으로 당신의 목을 칠 수도 있을 것 같군. 잘못이 분명하다면 죄목이야 만들어내면 그만인 것을.”
“이익…! 지금… 협박하는 거요?”
“아니. 경고해 주는 거요. 더 좋게 말하자면 조언을 주는 거요.”
“흥! 조언?”
“아무리 거둬 키운 개라지만, 집에 불이 났는데 주인 따라 같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겠소? 뭐, 선택은 당신 자유지만. 그 길로 불길에 뛰어들어 주인과 함께 타 죽을지. 물에 젖은 밧줄이라도 잡을지.”
“……!”
말을 마친 당이협이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사흠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개? 웃기지 마라. 그래도 나는 들개가 아니야. 적어도 거둬 준 주인을 섬길 줄은 안다!’
그가 몸을 휙 돌리고는 오른쪽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그 걸음은 그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둔해지고 있었다.
한편 먼발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당이협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당신 같은 부류는 충견도 될 수 없어. 불이 나면 제일 먼저 꼬리 말고 도망치는 쥐새끼일 뿐이지.’
**
구윤은 내심 놀랐다.
기다리면 제 발로 올 것이라고 했지만, 정말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도대체 사 국주는 무슨 재주로 천리 밖에서도 이자를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구윤은 눈앞에서 헛기침을 하며 서 있는 이사흠을 빤히 바라보았다.
**
구윤은 내심 놀란 마음을 숨기고는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보고… 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이사흠이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동안 그는 구윤을 노골적으로 무시해 왔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깍듯하게 대하려니 몸과 마음이 쉽게 따라가지 않았다.
구윤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각주께서 찾아오신 건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말에 뼈가 있었다.
본디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천안각과 그 정보를 집중 분석하고 혜안을 짜내는 혜성각은 한 형제 같은 기관이 되어야 했다.
즉, 왕래가 잦을 수밖에 없고, 누구보다도 이사흠은 총군사인 구윤과 가까워야만 했다.
한데 등왕패의 측근이 된 그는 거의 구윤을 찾지 않았다.
구윤은 지금 이에 대한 은근한 질책을 던진 것이다.
이사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볼 일도 없이 인사나 하려고 굳이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응당 오셔야겠지만.”
이사흠은 그저 슬쩍 고개만 숙여 보일 뿐이었다.
구윤이 책상을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일부러 이사흠에게 앉을 것을 권하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이때 ‘자리’란 직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실제 앉을 자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서서 보고하게 만드는 것.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던 이사흠을 바닥에 착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 압박하고 봐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정보라도 있소?”
“예, 중요한 일입니다.”
이사흠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다.
이젠 줄을 갈아타야 할 때다.
구윤이 이사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게 좋다.
“중요한 정보라… 혹시 동방세가에서 뭔가를 도둑맞았다거나?”
“……!”
“가령 엄청난 양의 금괴라거나.”
이제 이사흠의 표정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걸 군사가 어떻게…!’
불현 듯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설마…?”
무심결에 흘러나온 목소리에 구윤이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설마? 설마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이사흠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도 지자들을 통솔하는 천안각주였다.
구윤만큼 천재는 아닐지라도, 머리는 빨리 돌아가는 편이었다.
사비강이 동방세가에 들렀다가 떠난 그날, 금괴가 없어졌다.
그리고 오늘 자신 앞에 나타난 당이협.
그자가 등왕패로 향하던 걸음을 이곳으로 돌리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군사는 자신이 보고를 하기도 전에 이미 상당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그물망이 천천히 정도맹 전체를 덮어 오는 느낌이다.
그 촘촘한 그물망이 노리는 것은 바로 등왕패와 그의 측근들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사흠은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오늘 자신이 등왕패에게 바로 향했다면, 그 그물망에 꼼짝없이 걸렸으리라.
그리고 이 그물망을 설계한 것은 구윤과 사비강이리라.
이사흠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갈등을 했다.
지금 이순간도 여전히 고민했다.
사비강에게 약점이 잡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섰지만, 그동안 손을 잡은 등왕패를 배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대충의 상황이 눈에 보인다.
어디로 튈지 모를 사비강과 철저한 계산으로 움직이는 구윤.
이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이사흠이 모종의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찰나,
휘리리릭! 차아앙!
허공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그림자가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검신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이사흠이 주춤 물러서다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자신에게 시퍼런 칼날을 들이민 자는 다름 아닌 비령이었다.
그녀는 이사흠이 품으로 손을 가져가자 혹시라도 암기를 꺼낼까 싶어 나선 것이다.
꿀꺽.
이사흠이 침을 삼키니 바짝 다가선 검신에 목이 베이면서 선혈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비령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아주 천천히. 품에서 손을 뺀다.”
차디찬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을 베겠다는 의지가 다분하게 느껴진다.
이사흠은 다른 시간 속에 갇힌 사람처럼 느릿느릿 움직여 손을 꺼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비령이 그 종이를 낚아채듯 뺏더니 검을 거두고는 구윤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이사흠이 안도의 숨을 탁 내쉬었고, 구윤은 종이를 펼쳐 들고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시녀가 들어와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잠시 후 구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봤습니다. 한데 이 서신은 내게 와야 할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원래 가려던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사흠이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구윤의 말대로 그 서신은 원래 등왕패에게 가려던 것이었다.
‘질책을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구윤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으로 다가왔다.
구윤이 그 혼란한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툭 터놓고 말씀드리지요. 이제 이 각주님은 등 당주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행동하시면 됩니다. 단, 앞으로 그쪽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내게 낱낱이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중… 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혹시 자신 없습니까?”
“…아닙니다.”
“명심하십시오. 오늘 이곳에 들어온 순간 이 각주께서는 새 동아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동아줄을 끌어당기는 것도, 잘라 버리는 것도 오직 제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번만 더 나를 기만하는 짓을 했다가는 이제 모른 척하지 않을 겁니다.”
구윤이 말을 마치는 순간, 시녀가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그때 구윤이 불렀다.
“잠깐.”
“네?”
시녀가 당황해서 돌아보는데, 구윤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비령, 처리해.”
찰나,
쒸에에엑! 푸욱!
한 줄기 빛이 날아들면서 시녀의 심장을 뚫어 버렸다.
시녀는 그 자리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고 말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비령이 검을 뽑아내자, 시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이사흠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구윤이 이사흠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
“저 시녀가 이 각주께서 심어 놓은 간자라는 것을.”
이사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턱이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용, 용서를….”
구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새로운 관계 형성의 의미로 지나간 일은 덮어 드릴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꿀꺽.
이사흠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총군사가 원래 이런 자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