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귀환 마교관
171화
“상 대주가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사 국주가 왔었다고?”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 주었느냐?”
비응각 무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대꾸했다.
“낮에 가주님께서 사 국주에게 얼마든지 이곳을 이용하라고 하신데다 예의를 다하라고 하셔서….”
짜악!
순간 무인의 뺨이 휙 돌아갔다.
하태상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예를 다하라고 했지, 언제 문을 벌컥벌컥 열어 주라고 했더냐! 그리고 이곳을 이용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나와 동행했을 경우에 한해서지!”
“하지만 밤이 깊은 시각에 가주님을 깨워서라도 다시 오겠다고 하니….”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열어 줘? 네놈들이 제정신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서 가져간 것은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비서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닥쳐라! 이 한심한 것들!”
하태상은 열불이 뻗치는 걸 참느라 연신 어깨를 들먹였다.
사실 번을 서는 무인들은 이곳에 비밀 금고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사태의 심각성을 알 리 없었다.
‘아무래도 불안해. 역시 확인해 봐야겠어!’
개문주는 자신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꾸만 불안한 이 기분.
하태상이 금괴를 확인하기 위해 비밀 서고로 막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시종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가주님.”
“또 뭐냐?”
하태상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시종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보고했다.
“손님들께서 이제 떠나신다고 합니다.”
**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하태상은 마을 어귀까지 배웅을 나왔다.
사비강이 웃으며 답례했다.
“이렇게까지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 맹의 정의를 위해서 애쓰시는 국주님이신데, 이 정도도 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그저 더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아, 그리고 이건 저의 작은 정성입니다. 국주님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하태상이 얼른 사비강의 손에 전표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사비강이 헤벌쭉 웃었다.
“오오, 이런 것까지!”
“옳은 일에 쓰인다면 얼마인들 아깝겠습니까?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하, 그거 참 저도 안타깝군요.”
“하하… 네… 뭐….”
하태상은 내심 욕지거리를 쏟아내면서도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사비강이 금고를 발견한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들키진 않은 것이리라.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슬쩍 떠보았다.
“아, 어제는 비밀 서고에 들러서 비서를 바꿔 가셨다고….”
“아참, 내가 말을 한다는 게 깜빡했습니다. 야밤에 가주님을 깨우기가 어려워 홀로 다녀왔지요. 혹시 실례였다면….”
“아닙니다. 앞으로도 편하게 생각해 주시고, 저희 가장에 자주 들러 주십시오.”
“물론이지요! 이젠 동방세가가 제 집처럼 편안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암요. 이리 편하게 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태상은 사비강과 덕담을 어렵게 주고받은 다음, 감찰국 일행이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후 그는 서둘러 가장으로 돌아와 비응각을 다시 찾았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어라!”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무인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쪽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비밀 서고로 들어선 하태상이 얼른 개문주를 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곧 구석진 자리에 푸른색 문이 나타났다.
등불을 들고 문 안으로 들어간 하태상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 이게 뭐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어떻게! 이게…!”
그가 발작처럼 외치며 비틀거렸다.
금괴가 가득해야 할 비밀 금고를 차지한 것은 그저 텅 빈 어둠뿐이었다.
**
콰장!
하태상의 주먹에 탁자 하나가 박살이 나버렸다.
곁에 서 있던 총관이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태상은 분노로 가득 찬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젠장할!”
그는 그야말로 미쳐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비응각에서 번을 서던 무인들은 분명 사비강이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아니, 한 권의 책을 가져가긴 했다.
혹시라도 잘못 본 게 아닌지 다그쳐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상검악은?
그 역시 빈손으로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금고에 가득해야 할 금괴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귀신이 훔쳐간 것도 아닐 진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태상이 총관을 향해 이를 빠드득 갈며 물었다.
총관이라고 사정을 알 리는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거리자, 하태상이 미간을 구겼다.
“귀신의 소행일 것 같소? 사람의 소행일 것 같소?”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총관이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더욱 우물쭈물 거리자, 하태상이 윽박을 질렀다.
“지금 내가 묻지 않소!”
“사, 사람의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총관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가주 하태상은 평소에 늘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 번 수가 틀리면 그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총관이 아는 한, 그의 진짜 얼굴은 악귀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다.
하태상이 실소를 흘렸다.
“사람의 소행.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니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간밤에 금고에 들어갔다고 의심되는 자는 두 명이오. 상검악과 사비강. 그 중에서 누가 더 확률이 높을 것 같소?”
총관이 다시 한 번 눈치를 살피다가 솔직한 심정을 꺼냈다.
“아무래도… 비밀 금고와 개문주에 대해 아는 상 대주가 아닐…런지요?”
“그렇지. 상 대주가 그 기관을 작동시킬 줄 알지. 개문주에 대해서도 알고. 한데 정말 상 대주가?”
자신이 누구보다 믿는 수하였다.
그런 그가 발등을 찍었을까?
하지만 개문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자신과 총관 외에는 상 대주가 유일하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수로 그 많은 금괴를 훔쳐갔을까?
번을 서는 무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금괴를 가지고 나올 정도면, 금괴를 품에 넣고 수백 번은 왕복해야 한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가장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필 그 직후 상 대주와 적무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초절정과 절정 고수로 이루어진 최정예 부대다.
그들이 자의로 사라지지 않고서야 이렇게 감쪽같이 종적을 감출 수 있을까?
‘제기랄!’
하태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총관이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가, 가주님. 지금은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십시오.”
가주가 상검악을 신뢰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총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의심을 할 때는 가장 가까운 자부터’라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결국 하태상이 고개를 들었다.
“전서를 띄우시오.”
“알겠습니다.”
“일급 기밀로 분류해야 할 거요.”
“물론입니다.”
총관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방을 나섰다.
콰자앙!
하태상이 다시 한 번 부서진 탁자를 내려쳐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상 대주…!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
푸드득!
발목에 서신을 묶은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들었다.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구윤이 얼른 다가가 둥글게 말린 서신을 펼쳐 보았다.
빼곡하게 적힌 글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모두 읽은 구윤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신을 촛불에 태웠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은 소식이구나.”
마침 허공에서 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비강 국주에게서 온 것입니까?”
“그렇다.”
“역시 그가 성공했군요.”
“너는 정말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그가 지금까지 해왔고, 해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지금 사 국주는 천멸대와 함께 공식 일정대로 강진 지단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천멸대가 강진 지단을 수색하지는 않겠지요?”
“그래. 거기에서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만 할 뿐. 어차피 강진 지단은 핑계거리에 불과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불순 세력들에게 시답지 않은 감찰총국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을 거야. 그들의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을 테고.”
구윤이 창가로 걸어가며 뒷짐을 졌다.
“그가 내게 부탁을 해왔구나.”
“부탁이라면…?”
“동방세가에서 축적해 둔 자금을 모두 잃었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테지. 그러니 내가 감찰국을 지원할 일은….”
“물밑에서 설쳐대는 물고기들을 낚을 차례군요.”
구윤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물고기를 낚아서 사 국주에게 던져 주어야겠지. 그래야 제대로 요리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혜성각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혜성각은 구윤의 직속 수하들로 이루어진 기관이다.
하지만 그 인원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입수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천안각을 움직여야겠군요. 하지만 천안각은 현재 이사흠 각주가….”
“기다리라고 하더구나.”
“예?”
비령의 반문에 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면 자연히 내게로 올 것이라 하더구나.”
“그자가 그러던가요?”
“그래. 사 국주가 그랬다.”
“그럼… 그리 되겠군요.”
비령의 읊조림에 구윤이 웃었다.
“하하. 그렇지. 그리 되겠지.”
**
천안각은 사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최상층인 사 층에서는 각지에 퍼져 있는 정보원들에게 임무를 하달하기 위해 전서구를 보내는 일을 한다.
그 아래층인 삼 층에서는 중원 곳곳에서 정보원들이 보내오는 전서구를 받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백 마리의 전서구가 오가는 이곳은, 백 명의 조직원들이 탁자에 앉아서 입수한 정보들을 분석한다.
삼 층으로 날아드는 최초의 정보들은 하잘것없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매우 중요한 내용까지 마구 뒤섞인 상태다.
이 중에서 정보의 경중을 따져 분석가들은 상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하여 이 층으로 내려 보낸다.
이 층에서는 다시 백 명의 분석가들이 상급 정보만을 추려내서 사실 관계를 검증하는 데에 주력한다.
이후 사실임이 확인되면 다시 정보의 경중을 따져 특상급과 상급으로 분류하여 일 층으로 내려 보낸다.
일 층에서는 열 명의 지자(智者)들이 정보를 확인하고 첨언을 추가해서 정리한 다음 천안각주인 이사흠에게 보고한다.
한데 일 층의 지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사흠의 수족들로 교체된 상태였다.
얼핏 보면 무력 조직이 아닌 만큼 자칫 보잘것없이 보일 수도 있지만, 정보의 독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강한 힘인지 안다면 쉽게 무시할 수 없으리라.
그토록 중요한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이사흠은 각주실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 지자 한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이사흠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고개들 들었다.
“무슨 일인가?”
“보셔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지자가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이사흠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서류를 든 이사흠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마침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