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귀환 마교관
167화
‘흠… 저기군.’
사비강은 저만치 보이는 비응각(飛鷹閣)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곳이다.
간밤에 생도들은 장원을 샅샅이 수색한 다음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곳을 사비강에게 보고했다.
사비강은 가장 의심스러운 곳을 세 군데로 추렸다.
그 중에서 두 군데는 이미 확인이 끝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금괴를 넣어 두는 밀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저기만 남았는데….’
비응각은 동방세가의 서고다.
각종 무공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비응각이 지어진 것은 약 오 년 전.
저곳에서 밀실을 발견한 사람은 조문탁이었다.
“비응각 안으로 들어가면 책장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문이 하나 또 나타납니다. 책장으로 가려져 있긴 한데 자세히 보면 보입니다. 그곳에 무인 두 명이 항시 서 있고요. 아무래도 그 밀실이 좀 수상합니다.”
생도들 중에서는 은신과 경공이 가장 뛰어난 조문탁이었다.
비응각의 문지기들이 교대하는 사이에 그 안으로 잠입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허탕 치지 말아야 할 텐데.’
사비강이 비응각 입구에 다다르자 무인들이 호의적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국주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아, 그냥 장원을 좀 구경하고 있었소. 한데 여긴 뭐하는 곳이오?”
“이곳은 서고입니다.”
“그렇군. 한 번 구경 좀 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문지기들은 환하게 웃으며 사비강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확실히 호의적이군. 그만큼 떳떳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러한 호의에 어쩔 수 없이 가주에 대한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사비강은 이미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밀실에 금괴가 가득하다는 사실까지.
‘반드시 찾아낸다.’
사비강이 성큼성큼 비응각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 특유의 냄새와 짙은 묵향이 코끝을 스쳤다.
촘촘하게 진열되어 있는 책장을 자연스럽게 살피다가 안쪽 깊숙한 곳으로 가자, 과연 조문탁의 말대로 무인 두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뒤로는 책장이 세워져 있었는데, 조문탁의 말대로 자세히 보니 그 뒤로 쪽문이 보였다.
‘저기군.’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걸어갔다.
바깥의 문지기들과는 달리 그들은 사비강을 보고도 인사를 해오지 않았다.
사비강이 아무 책이나 하나 뽑아 들고는 그 쪽문 앞을 기웃거리며 힐끔거리니,
“용무가 있으십니까?”
눈앞에 자꾸만 알짱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무인 하나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사비강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딱히 용무는 아니고, 이런 곳에 문이 달려 있는 게 신기해서 말이오. 혹시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소?”
무인들이 서로를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사비강을 응시했다.
먼저 질문을 꺼냈던 무인이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외부인에게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흐음. 잘 모르나 본데… 난 맹에서 나온 감찰총국주요. 사비강이라고 하지.”
“죄송합니다.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무인들은 시종일관 냉랭한 태도였다.
사비강이 슬쩍 눈살을 구기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이 사람들 참 융통성이 없네. 이거 눈앞에서 자꾸 거절당하니까 왠지 오기가 생기는데?”
그러자 무인 두 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돌아가십시오.”
“싫다면? 저 안을 꼭 보고 싶소만. 내가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서 말이야.”
“아무리 국주님이라도 계속 이러시면 무력을 쓸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친 무인들이 허리춤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검이라도 뽑겠다는 건가?”
“마지막 경고입니다. 돌아가십시오.”
이윽고 검집에서 검신이 한 뼘 정도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 들겠다는 뜻.
‘절정 고수.’
사비강은 단숨에 둘의 기도를 파악했다.
확실히 수상하긴 하다.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많은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지만, 한낱 번을 서는 무인들이 절정을 초월한 고수라는 것은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는 뜻.
‘문탁이가 제대로 짚은 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당장은 들어갈 방법이 없다.
무력으로 제압해서 들어갔다가, 자칫 헛발을 디딘 거라면 곤란해진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고.
마침 무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정 안으로 들어가시겠다면 가주님께 허락을 받아 오십시오.”
“그것 참 곤란하네.”
그때였다.
“무슨 일로 그리 소란스러운가?”
마침 하태상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사비강이 반색하며 돌아보았다.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가주님!”
한편, 하태상은 무인들이 검을 한 뼘 정도 뽑아 든 것을 보고는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이놈들! 국주님께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무인들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건만, 가만히 검을 집어넣고는 고개만 꾸벅 숙일 뿐이었다.
하태상이 사비강을 돌아보며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수하들이 무례라도 저질렀는지요?”
“아암! 아주 무례했지요! 조금 전에 나를 노려보면서 칼을 뽑아 들더니,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아예 눈깔을 뽑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내 눈은 소중하다고 하니, 그 눈깔로 구슬치기를 한다나? 하! 자칫하면 이 자리에서 봉사가 될 뻔했지 뭡니까?”
사비강이 침을 튀어가며 떠들어대니 번을 서는 무인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의상 물어봤던 하태상 역시 잠깐 당황했다가 얼른 무인들을 다그쳤다.
“그게 정말이더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눈깔은….”
“닥쳐라! 네놈들은 이분이 누군 줄 알고나 있느냐?”
그러자 사비강이 다시 냉큼 끼어들었다.
“몰라도 알았을 겁니다. 내가 감찰총국주라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예전부터 감찰국주의 눈깔을 도려내 보고 싶었다고 하지 뭡니까?”
“그런! 당장 국주님께 사과드려라!”
무인들은 변명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말을 전했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씨근거렸다.
하태상이 좋은 말로 달랬다.
“아직 겉멋만 잔뜩 들어서 많이 부족한 녀석들입니다. 이해 좀 해주십시오. 그나저나 여기서 뭐하고 계셨습니까? 찾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훑어보다가 그저 저 안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저긴 도대체 뭐하는 곳입니까?”
“하하. 별 볼 일 없는 곳입니다. 잡동사니나 쌓아 두는 곳이지요.”
“흐음. 잡동사니나 쌓아 두는 곳을 수하들이 지키고 있다니 엄청 희한하군요.”
“하하하. 이들은 저 문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비응각에 상주하면서 이곳에 잠입하는 자들을 막기 위해 있는 겁니다.”
물론, 사비강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면 조문탁이 어젯밤 이곳에 잠입했을 때, 저들이 눈치를 챘으리라.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군요. 한데 잡동사니를 쌓아 두는 곳을 저렇게 책장으로 막아 두면 출입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흐음….”
문득 하태상이 침음을 흘리며 사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비강이 짐짓 딴청을 부리듯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하태상이 피식 웃었다.
“뭘 알고 싶으신 겁니까?”
“그냥 뭐 궁금한 건 못 참을 뿐입니다. 그저 저 안이 궁금할 뿐이지요.”
“혹시 본가를 의심하고 계신 건…?”
“의심? 무슨 의심 받을 짓을 하셨습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자꾸 저 문에 집착하시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냥 궁금한 건 못 참을 뿐입니다. 게다가 저 두 사람 때문에 오기도 좀 생겼고.”
하태상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저긴 잡동사니를 보관한 곳이 아닙니다.”
“하면?”
“지금껏 동방세가에서 모아 온 무공 비서를 보관한 곳입니다. 그 가치가 제법 중한 것이기에 외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지요.”
사비강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마침 이곳이 또 서고가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서 ‘아, 그렇습니까?’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사비강은 저 안을 보겠노라 마음을 굳힌 상태.
“아, 그렇군요. 그럼 그 무공 비서를 좀 구경해 봐도 되겠습니까?”
“무공 비서… 말씀이십니까?”
“예, 그냥 어떤 비서들이 있는지 표지만 훑어보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인으로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군요. 하하.”
사비강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하태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이런 꼴통이 다 있지?’
보통의 경우라면 무공 비서라는 말에 더 이상 결례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한데 이자는 마치 예의범절이라고는 집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놓고 다니는 파락호 같지 않은가?
이쯤 되니 정말로 상대가 무공 비서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자신을 의심해서 이러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 하태상이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보여드리지요.”
“으음?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사비강이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다.
저 안에 금괴가 있다면 이렇게 쉽게 나와서는 안 되기에.
‘설마 또 허탕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태상이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문을 열어 드려라.”
무인들이 움찔거리고는 하태상을 보았다.
“가주님…?”
“어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당장 문을 열라는 말을 못 들었느냐?”
무인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자, 이번에는 사비강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어허! 이놈들 가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결국 내 눈깔을 뽑고야 말겠다는 뜻이냐!”
결국 무인들이 마지못해 돌아서더니 책장을 옆으로 치우고는 자물쇠를 풀었다.
하태상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자, 들어가시지요.”
“흐음. 고맙습니다.”
쪽문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금괴가 없군.’
하태상의 말대로 이곳은 그저 무공 비서만 잔뜩 쌓여 있었다.
정공의 비서도 있었지만, 마공이나 사공에 관한 비서도 있었다.
‘젠장, 결국 또 허탕이군.’
사비강이 내심 실망을 하는데, 하태상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비꼬는 것처럼 느껴져 불쾌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원하는 무공 비서 한 권을 선물로 드리지요. 어차피 이곳에 있는 것은 필사본이기도 하니.”
“음… 그럼 한 권 골라 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하태상이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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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서책 한 권이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벽에 부딪쳤다.
그 바람에 표지가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사비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탁이가 본 곳은 무공 비서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결국 세 군데 모두 내가 찾는 곳이 아니었어.”
사비강의 말에 생도들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사비강이 단리정에게 물었다.
“마을은 어땠나?”
오늘 하루 동안 생도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밀실로 파악되는 장소를 수색했다.
하지만 특별히 수상한 곳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에는 밀실이라고 볼 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흐음, 이거 이젠 살살 약이 오르는데?”
사비강이 미간을 좁혔다.
능글맞게 웃는 하태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때마침 곡보옥이 불쑥 질문했다.
“그런데 그 밀실 안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온갖 부정과 비리가 들어 있지. 금괴의 형태로.”
“예에? 금괴요?”
생도들 모두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때 한쪽에서 능소소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어… 그럼 제가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찾을 수 있다는 거냐?”
“물어보려고요.”
“물어? 누구에게?”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묻다니.
이게 무슨 용변 급할 때 찾는 뒷간도 아니고.
묻는다고 가르쳐 줄 장소인가?
한데 능소소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사비강을 충분히 놀라게 만들었다.
“실프에게 물어보면 알려 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