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65화 (165/670)

# 165

귀환 마교관

165화

총군사 구윤이 머무는 집무실.

등불 하나를 켜 두고는 두 사람이 탁자에 마주 앉았다.

구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맹주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셨습니다. 감찰총국이 출범하자마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믿어 준 덕분이오.”

사비강의 대답에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도 믿을 겁니다.”

“당연한 말을.”

“하하하. 그런가요? 사실 전태수를 살려 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등왕패와 그의 측근들이….”

“어떤 방법을 써서든 풀어 주려고 했겠지요. 사건은 더 복잡하게 흘러갔을 지도 모르고요. 지지부진해졌을 수도 있지요.”

“그렇소. 생각보다 등왕패 쪽의 세력이 뿌리가 깊소.”

“공감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 불만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인해 저들에게는 큰 경고가 되었을 겁니다.”

“그걸 노린 거였으니까.”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곳에는 중원의 지도가 큼지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사비강이 구윤의 곁으로 다가섰다.

구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천상천….”

말을 꺼내던 그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사 국주님. 혹시 감찰대의 정식 명칭을 다른 것으로 바꾸실 생각은 없습니까? 아무래도 그 이름은 좀….”

“후후후. 걱정 마시오. 나도 다른 수뇌 인사들이 이 멋진 이름에 시샘하는 걸 느꼈지만, 어디 내가 그런 정도로 위축될 사람이겠소?”

‘시샘이라니….’

결국 구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감찰대의 명칭을 축약해서 불렀다.

“그럼 천멸대를 이끌고 어딜 먼저 칠 것인지….”

“천멸대가 아니라, 천상천하유아독존혈풍멸살대요.”

사비강이 또박또박 정정해 주었다.

“끄음. 알겠습니다. 어딜 먼저 칠지는 정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나왔소.”

“그렇군요. 한데 제가 오늘 이렇게 국주를 모신 것은 사 국주께서 반드시 먼저 쳐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입니다. 아마 국주께서 들으시면 놀라실 수도….”

“동방세가(東方世家)를 말하는 거요?”

순간 구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걸 어떻게…?”

사비강이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놀란 상황.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감이라고 해둡시다.”

“감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한참이나 멍한 표정을 짓던 구윤이 곧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동방세가. 하지만 그곳은 그 지역민들에게 명망이 두터운 곳이지요. 가뭄이 들어 어려울 때는 곡식을 나눠 주기도 하고,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어 곤경에 빠진 자들을 돕기도 하지요. 동방세가주는 인망이 두터워 하늘도 굽어 살핀다는 말이 있을 정돕니다. 하지만….”

“정도맹의 부패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지.”

구윤의 표정이 다시금 흔들렸다.

이자는 독심술이라도 쓰는 걸까?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저는 부패의 발원지가 그곳이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패의 자금줄이 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거요?”

“저희 혜성각이 얼마 전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동방세가에서 상당량의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 비자금이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등왕패의 측근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 보는군.”

“그렇습니다. 다만 그 자금이 어떤 형태로 축적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혜성각에서 입수한 정보가 정확하다고 볼 수도 없지요.”

“금괴요.”

사비강이 불쑥 말했다.

“금괴…? 무슨 말씀인지요?”

“군사께서 말한 자금 축적의 형태. 그들은 금괴로 보관하고 있소.”

구윤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동방세가의 수뇌부만 알고 있는 밀실에 보관되어 있을 거요.”

“하면 그 밀실의 위치는….”

“거기까지는 모르오.”

“아….”

구윤이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탄식할 일이 아니었다.

사비강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혜성각이 알아내지도 못한 부분까지.

도대체 어떻게?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감찰총국에서 구성한 조직 중에 귀영단이 있소. 귀영단에서 조사한 결과요.”

“조사 결과의 신뢰도는…?”

“구 할 이상이오.”

“맙소사.”

뭘 믿고 이렇게 확신하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태도였지만, 이상하게 사비강을 보고 있으면 믿어야 할 것만 같다.

사실 사비강은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었다.

그는 동방세가의 어느 밀실에 금괴가 보관되어 있고, 이것으로 맹주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힘을 키워 왔다는 것을 먼 훗날에 알게 된다.

다만 자신만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 무작정 행동할 수 없었기에 귀영단을 통해 동방세가를 집중 조사하도록 한 것이다.

아마 전표 같은 것은 전장을 거쳐야 현금화할 수 있고, 각 전장은 정도맹과 연결되어 있으니 사용하지 않는 것이리라.

조금 안타까운 점은 지금의 사비강도 금괴가 보관된 밀실의 위치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

‘그 밀실에 대해 좀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어쨌거나 구윤의 입장에서는 이만해도 상당한 진척이었다.

한편, 사비강도 구윤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똑똑했군.’

허수아비처럼 살았던 구윤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정도맹의 속내까지 들여다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불운의 천재 군사.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낙인찍힐 일이 없으리라.

구윤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심해야 할 겁니다. 혜성각과 귀영단이 입수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동방세가주는 굉장히 교활한 자입니다. 그자를 뿌리 뽑기 힘든 이유는 대외적으로 굉장히 선량한 무인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걱정 마시오. 그런 자들을 혼내 줄 나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원래 그렇게 교활한 놈들의 천적은 제대로 미쳐 버린 꼴통이 아니겠소? 그러니 군사께서는 마음 푹 놓고 기다리기만 하시오.”

사비강의 호언장담에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왠지 사비강이 저렇게 말하면 정말로 안심이 된다.

‘나도 이래서야 군사 노릇 하기는 글렀군.’

자조 섞인 웃음을 짓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군데가 있습니다.”

“북명신문(北明神門).”

구윤의 눈동자가 다시 커졌다.

‘도대체 이자는 날 어디까지 놀라게 할 생각이지?’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등왕패를 돕는 지방 권력 중 가장 강성한 곳. 그 정도는 알고 있었소.”

“그렇습니다. 동방세가를 정리하고 나면 북명신문을 쳐야 합니다.”

“뭐, 맡겨 두시오. 아참, 우리는 정식으로 동방세가를 조사하진 않을 거요.”

“하면…?”

“다른 곳을 감찰하러 가면서 들린 척할 거요. 뭐, 그 인근에 있는 강진(姜溍) 지단을 감찰하는 척하면 좋겠군.”

“과연 지단 감찰을 핑계로 사실은 동방세가를 조사하겠다는 뜻이군요.”

“그렇소. 들른 김에 사흘 정도 묵겠다고 할 거요.”

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보면 사비강은 의외로 치밀한 성격이 아닌가?

다만….

“사흘간 머문다면 너무 짧지 않을까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하오.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잘 다녀오겠소.”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

동방세가의 가주전.

가주 하태상(遐泰相)이 창가에 서서 밖을 보았다.

아직은 싸늘한 밤공기가 그의 뺨에 날아와 부딪쳤다.

잠시 후 그의 뒤로 적무대주(跡無隊主) 상검악(尙劍岳)이 다가왔다.

“늦은 시간입니다.”

상검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방세가에서 온갖 궂은일과 비밀스러운 임무를 도맡아서 하는 조직이 바로 적무대였다.

그런 만큼 적무대주 상검악은 하태상이 가장 믿는 수하이기도 했다.

“잠이 오질 않아.”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감찰대가 온다는군.”

상검악의 미간이 좁혀졌다.

“본가를 조사하러 오는 겁니까? 어째서?”

“아니. 여기에서 조사할 게 뭐가 있겠나? 오히려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그렇지요.”

“강진의 지단을 조사하기 위해 간다는군. 그 길에 이곳에 잠시 들를 예정인 듯하네.”

“섭섭하지 않게 대접해서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태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될 일이지.”

툭 까놓고 말해서 적당히 뇌물을 먹여서 잘 보이면 된다는 뜻이다.

물론, 뇌물을 뇌물처럼 보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감사한 마음을 담은 표현 정도로 그쳐야 한다.

진심을 다한 마음의 선물.

그런 건 하태상의 특기다.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한 번 받지 않고 잘 지내왔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그를 두 손으로 떠받들기만 한다.

그만큼 수완이 좋았다.

다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질 않아.”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왠지 모를 찜찜함.

뭔가 잘못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최근 일이 많아 과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후후. 그런가?”

“감찰대가 새롭게 꾸려진 것도 썩 내키지 않으셨으니….”

“그건 그렇지.”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래봐야 애송이들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생도들로 구성된 감찰대라니. 지나가는 개도 짖지 않을 겁니다.”

“하하. 이상하게 자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고민이 사라진단 말이야.”

“그래서 절 부르신 것 아닙니까?”

상검악이 입매를 찢으며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이 언뜻 사악하게 보였지만, 하태상에게는 그보다 든든한 미소도 없었다.

“그렇지. 괜히 미운털이나 박히지 않게 잘 대접해 줘야겠어.”

“세상의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오히려 이건 가주님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라면?”

“백지와 같은 감찰대. 거기에 어떤 색으로 물들일지 가주님께서 결정하시면 될 일이니까요.”

“흐음. 하하하! 마음에 드는 소리군.”

상검악의 말이 맞다.

아직 한참 어린 녀석들이 아닌가?

차라리 그런 녀석들이 다루기가 쉬운 법이다.

이 기회에 자신의 뜻대로 주무를 수만 있다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잘 지켜보게. 쥐새끼도 여러 마리가 모이면 징그러운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

“어마어마하군요.”

염자량이 입을 딱 벌리고는 동방세가장의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크다, 크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물론,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는 정도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문파들과 비교하자면 정말 큰 규모였다.

출입구의 높이만 삼 장에 달했고, 좌우로 늘어선 담벼락도 성을 방불케 할 만큼 높고 길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 담벼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이만한 세를 가진 사람이 참 겸손하기도 하구나.’

염자량은 내심 감탄하며 동방세가주인 하태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비강과 천멸대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문설주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비강이 도착하자마자 얼른 달려오며 두 손을 벌려 환영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정말 많으셨습니다. 여행길이 불편하진 않으셨는지요? 누추한 곳까지 이리 찾아주시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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