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귀환 마교관
156화
통문각 정문을 지나자 제법 너른 하원이 나타났다.
한데 좀 이상했다.
“이거… 너무 조용한데?”
염자량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썹을 찌푸렸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안마당.
오로지 생도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곡보옥이 제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후후훗! 이 몸의 무위를 보고 전부 놀라서 달아난 모양이군. 자, 이 기세로 각주전까지 쳐들어가자고!”
그렇게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감히 통문각을 무단 침입하다니, 겁도 없구나!”
공력이 담긴 사자후가 통문각 하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크웃!”
생도들이 저마다 귀를 틀어막으며 주춤거렸다.
고개를 꺾어 드니 각주전 지붕 위에서 죽립을 눌러 쓴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무단 침입한 죄를 묻지 않겠다!”
“흥! 지금이라도 본 감찰대의 정당한 집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죄를 묻지 않겠소!”
곡보옥이 당당하게 마주 소리쳤다.
죽립을 쓴 노인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순간 그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슈슈슈슈슉!
파바바바밧!
갑자기 절벽 위에서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일제히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줄을 늘어뜨리고는 촤악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세 방향의 담벼락을 타넘으면서 백의 무복을 착용한 무인들이 생도들을 향해 쇄도해 왔다.
갑자기 수십 명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공격을 해오자, 생도들이 저마다 표정을 굳히고는 무기를 뽑아 들었다.
찰나, 능소소가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실레스틴!”
그녀의 손에는 짤막한 금속 봉이 쥐어져 있었는데, ‘청의봉(淸義棒)’이라 이름 지은 무기였다.
사실 이는 정령술사들이 사용하는 메이스(Mace)였지만, 능소소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메이스를 뻗으며 소리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도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친 것이다.
휘이이이이이이잉!
“크웃!”
쇄도하던 무인들은 물론 생도들마저 거센 바람에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지경.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능소소의 눈에는 하얀빛의 유기체가 너울거리면서 앞에 나타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갑옷에 바람처럼 흩날리는 백발.
깎아 놓은 조각처럼 생긴 그 존재가 능소소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 나, 실레스틴이 그대의 부름에 응답하노라.
영혼을 울릴 것 같은 웅혼한 목소리.
바람의 정령 중에서도 최상급인 실레스틴이었다.
성별 파악이 불가능한 실레스틴은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물론 이러한 현상과 목소리는 능소소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것이었다.
능소소의 의도를 읽어낸 실레스틴이 훌쩍 물러나는가 싶더니, 순간 수백 마리의 맹금으로 화하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하얗게 빛나는 맹금 수백 마리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적들을 향해 빠르게 선회했다.
후아아아아아앙!
이는 다른 사람에게 태풍의 회오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태풍의 눈처럼 생도들이 서 있는 곳만은 고요했다.
후우우우우웅!
“크헉!”
“으읏!”
우당탕탕!
결국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한 백의 무인들이 속절없이 날아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백의 무인들이 튕겨져 나가자, 각주전 지붕에서 지켜보던 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지? 저 소녀가 한 짓인가? 혹시 기풍(氣風)?’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백의 무인들은 저마다 일류 이상의 고수다.
한데 겨우 기풍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나뒹굴며 저 꼴을 보인단 말인가?
평생을 중원에서만 살아온 노인이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다.
한편, 적들이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보며 능소소는 메이스를 꽉 쥐었다.
처음이었다.
실레스틴을 실전에서 소환해 본 것은.
지난 육 년간 실레스틴을 소환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해왔던가?
자기 자신과 싸우고 또 실레스틴과도 싸워야 했다.
수련한지 오 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기적처럼 실레스틴을 소환했다.
애초에 바람의 정령을 가장 잘 느끼던 능소소였기에,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 것은 실레스틴이 처음이었다.
그때의 희열이란….
하나 소환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실레스틴은 도도하고 오만했으며, 무섭기까지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영혼의 소리가 머릿속에 쟁쟁 울릴 때면, 제아무리 친화력이 뛰어난 능소소도 오금이 저려 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육 개월이 꼬박 흘러서야 실레스틴은 능소소의 생각과 동시에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수련의 성과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고마워, 실레스틴!’
능소소의 생각을 충분히 전해 들었을 터였지만, 실레스틴은 대답 한 마디 없이 사라졌다.
튕겨져 나갔던 무인들이 재빨리 몸을 털고 일어나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염자량이 흑패도를 뽑아 들며 나섰다.
“나한테 맡겨!”
다음 순간, 염자량이 흑패도를 거꾸로 쥐더니 그대로 바닥을 향해 강하게 찍어 내렸다.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
그의 입에서 시동어가 터져 나오자.
두두두두!
투콰콰콰콰콰콰쾅!
순간 사방으로 땅바닥이 갈라지더니 물결치듯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마구 튀어 오르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헉! 뭐, 뭐얏! 크악!”
“우아악!”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이번에도 백의 무인들은 검 한 번 내질러 보지도 못한 채 튕겨 나갔다.
콰당탕!
퍽!
솟구쳐 오른 땅바닥이 마구 진동을 일으켜 대니 하원을 둘러싼 담벼락마저 쩌적 금이 가고 말았다.
지켜보던 죽립의 노인이 더욱 눈살을 구겼다.
‘저건 또 무슨 무공이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싸우질 않나?
결국 보다 못한 죽립의 노인이 버럭 소리쳤다.
“한심하긴! 물러나라!”
명이 떨어지자 백의 무인들이 몸을 추스르며 곧 사라졌다.
곧이어,
“궁!”
죽립의 노인이 다시 소리치자,
촤촤촤촤촤촤촤촥!
절벽 위에서 일제히 활을 든 무인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시위에서 금방이라도 날아들 듯한 예기가 느껴졌다.
“쏴라!”
패패패패패패패패애앵!
순간 사비강이 눈살을 구겼다.
‘철시(鐵矢)!’
생도들을 향해 소낙비처럼 날아드는 화살은 가죽도 가뿐히 뚫을 수 있는 철시였다.
사비강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실드!”
찰나지간 생도들이 일제히 마나를 발산하며 실드를 펼쳤다.
쑤앙!
반투명한 실드가 파생하면서 생도들의 몸을 순식간에 덮었다.
그와 동시에!
쒸엑! 쒜에엑!
투타타타타타타타탕!
둔탁한 타격 음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철시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생도들이 선 채로 뒤로 밀릴 지경.
한편, 철시가 생도들의 몸에 닿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죽립의 노인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그는 입을 쩍 벌리고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저 어린 것들이 벌써 호신강기를 사용한단 말인가?’
물론, 호신강기보다는 훨씬 강도가 약한 실드였지만,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도대체가 저 생도들은 어떻게 저런 경지를…!’
노인의 시선이 정문 쪽으로 물러나 있는 사비강에게 향했다.
사비강은 아까부터 노인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새로 임명된 감찰국주. 도대체 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흥! 하지만 잔재주도 여기까지겠지. 지속적으로 퍼붓는 화살을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견딜 수는 없을 터.’
그러는 사이 생도들에게 쏟아지던 화살비가 멈췄다.
사비강이 다시 외쳤다.
“정아!”
찰나, 생도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리정에게 시야를 터주기 위함이었다.
우뚝 서서 활시위를 당기는 단리정을 보고는 노인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궁수들을 노리는 건가? 하지만 혼자서 이 많은 인원을 상대할 수는 없을 터.’
다음 순간,
패애애앵!
단리정이 시위를 놓았다.
세 자루의 화살이 빛살처럼 절벽으로 날아갔다.
노인의 입매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틀렸다. 제법 빠르게 반응을 했지만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순간 사비강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노인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니, 조준은 틀리지 않았다. 아주 정확해.’
그러는 사이 허공을 가른 화살은 그대로 절벽 끝에 부딪쳤다.
찰나,
콰자앙!
화살에 실어 보낸 마나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절벽 끝이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꽈자앙! 꽝! 꽈앙!
연이어 쏘아 댄 화살이 절벽 끝을 맞추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크아아악!”
“우아악!”
궁수들이 무너지는 절벽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콰당!
우당탕!
그 모습을 본 죽립의 노인이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였군!’
‘마나’라는 것에 대해 무지한 그는 그저 화살촉에 폭약을 매어 두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남았다.
이쪽에는 저격수가 있다.
순간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다!’
그 순간 절벽 반대편 쪽 건물 위에서 궁수 한 명이 정확히 단리정의 등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쒸에에에엑!
찰나, 단리정이 몸을 휙 돌리며 소리쳤다.
“아직 일어서지 마!”
동시에,
패애애앵!
그의 손에서도 화살 두 자루가 떠났다.
따앙!
놀랍게도 그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 한 자루가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자루는 그대로 날아가 활을 쏜 궁수의 어깨를 관통했다.
푸욱!
“크아아악!”
건물 지붕 위에서 활을 든 무인이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털썩!
“끄으으…!”
그는 희미한 신음을 흘리다가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쯤 되자, 죽립의 노인이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익…! 말도 안 되는…!”
사실 단리정은 절벽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퍼붓는 순간, 실드를 펼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 자신이 궁수였기에 어딜 가든 주변 지형지물을 파악하는 것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 그는 절벽 맞은 편 건물에서 누군가 매복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활을 든 무인이었는데, 절벽에서 활을 쏘는 자들과는 기도부터 달랐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그를 발견하기 어려웠겠지만, 단리정에게는 용안이 있었다.
때문에 절벽의 궁수들을 처리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려 상대를 향해 두 자루의 화살을 날려 보낸 것이다.
더 이상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자, 생도들은 절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죽립의 노인이 입술을 쿡 씹고는 각주전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제는 직접 나서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