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귀환 마교관
146화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나서는 거요? 사 교관은 그저 참고인으로….”
“잠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등왕패의 날선 목소리를 구윤이 가로질렀다.
‘크익…!’
예전 같았으면 감히 자신이 하는 말을 가로막지 못했을 구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보다 확실히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
등왕패가 어금니를 꾹 깨문 채 말을 하지 않자,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협상단이 받아든 맹약서를 차례로 걷어가더니 갑자기 찌익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혈사련의 무인들은 물론, 등왕패 조차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미친놈이 뭘 하는 거야? 지금!’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이딴 꼼수는 그만두고 제대로 협상을 시작해봅시다.”
사비강이 불쑥 말을 꺼냈다.
류여중이 미간을 구긴 채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험하군.’
본능이 경고를 해온다.
저 녀석은 위험하다고.
구윤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머리로 수 싸움을 하면 된다.
엎치락뒤치락하겠지만, 졌을 때도 억울한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저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저런 부류의 인간은….
‘종잡을 수가 없지….’
그렇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들은 언제나 짜증나는 존재들이다.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
군사의 입장에서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상대가 바로 저런 자다.
사비강이 실내를 왔다갔다 걸어 다니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내가 제안을 좀 해도 되겠소?”
“그것이 정도맹의 뜻이오?”
류여중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아마 그럴 거요.”
“아마…?”
“어쨌거나 나 역시 협상단원 중 한 명이니까 말이오.”
“하지만 방금 듣기로는 그저 참고인의 신분이라고….”
“아아, 그건 그쪽이 따질 일이 아니지. 정도맹에서 날 인정한다면 상관없는 것 아니오?”
류여중의 시선이 구윤에게 향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견을 본맹에서는 상당 부분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등왕패가 오히려 발끈했다.
“군사!”
“우선 들어보시지요. 등 당주님.”
“끄음…!”
사비강이 히죽 웃고는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소.”
“말씀해 보시지요.”
류여중이 내심 긴장을 하며 대꾸했다.
사비강이 검지를 펼쳤다.
“첫째, 정도맹은 혈사련이 황하물상을 접수한 것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걸 누구 마음대로!”
등왕패가 역정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문제는 우선 맹약을 맺기로 확정하고 나서 세세한 부분에서 조율해 갈 일이었다.
한데 이건 정도맹에게 유리하기는커녕, 혈사련이 얼씨구나 춤이라도 출 내용 아닌가?
구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단, 혈사련은 매달 정도맹에 이백만 냥씩 상납하도록 한다.”
이번에는 혈사련 쪽에서 벙 찐 표정이 되고 말았다.
“무, 무슨…!”
독고진이 부르르 떨며 말을 뱉는데, 사비강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둘째, 맹약을 맺은 기간 동안 정사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이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때 정도맹의 기관에서 전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한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직 안 끝났소. 이왕이면 내 이야기 다 듣고 말하시오.”
사비강의 말에 독고진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노려보았다.
사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 강호에 혼란을 가져온 혈사련은 이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또한 십년 간의 맹약을 유지하기 위한 의지를 보인다는 의미에서 혈사련 무인 한 명을 정도맹에 파견하여 거주토록 한다.”
“대체 누구를…?”
“홍묘.”
사비강이 딱 찍어 말했다.
혈사련 협상단의 눈동자가 다시 커졌다.
특히 서래향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사비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더 불만을 제기하기도 전에 사비강이 네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넷째, 혈사련은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동안 생포한 정도맹의 무인들을 모두 석방한다.”
“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뭐요?”
“혈사련은 옥교(玉喬) 분타를 어떠한 조건도 없이 정도맹에게 양도한다.”
“옥교 분타를?”
류여중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물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추희룡과 독고진 역시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옥교 분타는 그저 그런 지역의 분타일 뿐이었다.
특별히 비밀스러운 분타도 아니고,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도 없다.
물론, 중요하지 않은 분타가 어디에 있겠냐마는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곳이었기에 혈사련의 협상단원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옥교 분타를 넘겨 주시면 되겠소. 뭐, 나머지는 그쪽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요.”
독고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이번만큼은 추희룡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입매를 씰룩였다.
반면 류여중은 비릿한 웃음이 배어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게 뭔가?
종잡을 수 없는 괴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예상하기 힘든 고수.
너무 긴장한 걸까?
이제 보니 그냥 단순 괴짜가 아닌가?
이래서야 뭣도 모르고 설쳐대는 애송이와 다를 게 뭔가?
그러한 생각은 등왕패도 마찬가지였다.
‘저 한심한 녀석!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저들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게다가 홍묘를 달라니? 혹시 저놈이 저년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등왕패가 힐끔거리며 서래향을 보았다.
확실히 빼어난 미모에 우월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이다.
하나, 굳이 따지고 보자면 그녀보다는 매설란이 더욱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 미녀를 두고 또 다른 여인을 탐내다니.
혹시 색욕에 미친놈인가?
어쨌거나 혈사련이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어 줄 리도 없다.
오히려 이런 억지 주장을 펼쳐대면 소문만 안 좋게 난다.
명분이 중요한 정도맹으로서는 오히려 악수를 두는 셈이다.
마침 류여중이 아까와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비강 교관님의 사적인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공적인 요구 사항이오.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 아니었소?”
“그렇다면… 하나 묻지요.”
“말하시오.”
“저희가 그런 불합리한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야 이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쟁이 계속 될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건 무리한 요구 사항입니다. 죄송합니다.”
“흐음… 나비의 날개가 꺾이고, 고목이 쓰러지고, 늑대의 송곳니가 부러져도 그럴 수 있소?”
알아듣기 힘든 말.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류여중은 물론, 혈사련의 무인들 모두가 흠칫거렸다.
그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저자가 그걸 어떻게!’
나비, 고목, 낭아는 모두 혈사련의 비밀 분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이 명칭에 대해서는 혈사련의 무인들만 알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사비강이 이걸 어찌 안단 말인가?
사실 전의 생애에서 이미 혈사련에 대해 조사를 했던 사비강은 이러한 점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혈사련 무인들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만약 이 세 군데 마저 무너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지도…!’
한편, 구윤은 사비강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고 나서 혈사련 무인들의 태도가 급변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뭔가 있구나! 어쩌면…!’
만약 사비강이 여기에서 공을 세워 준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그렇다면 이후 내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
마침내 류여중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하나 더 묻지요.”
“얼마든지.”
“어째서 홍묘님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야 뭐. 예쁘니까.”
단순한 대답.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기만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비강은 왠지 정말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사비강은 알고 있었다.
홍묘가 흑룡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단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
‘난 흑룡이 저 여자를 각별히 아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후후. 너희들도 십 년 후에는 알 수 있겠지만.’
흑룡은 조직의 서열 안정화를 위해 홍묘를 단지 노리개쯤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 흑룡은 이미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다.
훗날 흑룡은 본인의 입으로,
“나는 그녀를 이미 십 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라고 말했으니까.
즉, 서래향이 정도맹에 머물고 있는 한, 흑룡도 맹약을 깨고 허튼 짓을 하진 못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우리끼리 잠시 논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류여중을 비롯한 혈사련의 무인들이 옆방으로 옮겨 가더니 논의를 시작했다.
전음으로 나누는 대화였기에 이쪽에서 들리진 않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검영각주 섭청이 연신 사비강을 칭찬했다.
물론, 등왕패는 이대로 사비강이 공을 세우게 될 것 같아 영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마침내 류여중이 접견실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매달 지불해야 할 금액이 너무 많습니다. 조정이 필요합니다.”
구윤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 말은 이 제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
“어느 정도의 조정을 원하십니까?”
“이십만 냥이면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사비강이 제시한 이백만 냥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 금액.
하지만 이백만 냥 자체가 워낙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금액이었기에 정도맹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구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들겠습니다. 백오십만 냥까지 생각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면 오십만 냥은 어떻습니까? 그 정도의 금액을 보내기에는 본 련에서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 황하물상을 포기하라면 그렇게 하지요.”
류여중은 마지막 패를 꺼내 든 셈이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매달 백오십만 냥씩이나 내게 되면 황하물상을 장악한 것이 오히려 적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황하물상을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럼 정도맹으로서도 손대지 않고 코 풀 기회를 놓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조율하다가 매달 칠십만 냥에서 합의를 보았다.
처음 제시한 이백만 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지만, 어차피 정도맹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 생긴 셈이었다.
그것도 사비강 덕분에.
맹약서를 다시 작성한 협상단은 마침내 서로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이걸로 정사 간의 맹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는 강호에 공고히 알려질 겁니다.”
구윤이 또박또박 말했다.
‘됐다. 이걸로 십 년을 벌었다. 이제 내사를 시작할 때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진정한 전쟁을 치를 때다!’
그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뿜었다.
**
사비강의 인지도는 더욱 올라갔다.
정도맹의 수뇌 인사들은 어느 누구도 사비강의 다재다능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낱 교관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바쁘게 움직였다.
정사간의 맹약이 성립되고 나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연우경과 목단화를 데리고 옥교로 간 것이었다.
옥교에는 얼마 전 혈사련으로부터 넘겨받은 분타가 있었다.
“여기에는… 대체 왜 온 거예요?”
목단화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눈앞의 철문을 바라보았다.
절벽 아래를 깎아 만든 동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혈사련에서 뇌옥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연우경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설마 우리를 여기 가두시려는 건 아니죠?”
왠지 사비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농담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왜? 갇힐 짓 했냐?”
“아뇨!”
“너희들 내 욕하고 다녔다며?”
“우, 우리가 언제요!”
“신병이기를 너희들한테 주지 않는다고.”
“그, 그런 적 없습니다! 뭐, 좀… 투덜거리긴 했지만….”
“들어가라.”
“왜 이러십니까? 정말 가두려고 그러십니까?”
“아니. 여기에 네놈들이 찾는 물건이 있다. 지긋지긋한 줍기 놀이도 이걸로 한동안 끝이다.”
사비강의 입매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