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귀환 마교관
145화
‘과연 소문대로 넓군.’
류여중은 정도맹 외원으로 들어서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한참을 걸어도 내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니, 장내에서 길을 잃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화사한 장원은 그만큼 부패가 심각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혈사련의 총공세를 막아내다니.
‘과연 구윤이라는 자는….’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사람일까?
듣기로는 굉장히 젊다고 했는데.
“이곳입니다.”
안내자가 건물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혈사련의 협상단으로 파견된 류여중과 백호당주 추희룡, 현무당주 독고진(獨孤眞)과 홍묘 서래향이 걸음을 멈추고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들 곁에는 협상단 신분은 아니지만, 호위와 잡무를 맡은 요신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평범한 지객당.
다만,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서는 조금 큰 편이었다.
독고진이 대번 기분 나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곳이라니? 여기에 맹주께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여긴 여러분들이 묵으실 숙소입니다. 그리고 협상을 진행할 장소이기도 합니다.”
“허! 정도맹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가? 집주인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니!”
그러자 안내자의 표정에 멸시가 스쳤다.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본 맹의 태도도 달라지지요.”
“뭣이? 감히…!”
독고진의 무복이 부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린 탓이다.
하지만 류여중이 가만히 나서며 그를 제지했다.
“잘 알겠습니다. 역시 정도맹은 신중하군요. 행여나 맹의 내부를 염탐할 것을 의식해서 외원에 기거하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군요. 과연 옳은 선택입니다. 자고로 강호 속담에 겁은 많을수록 좋고, 허세는 적을수록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묘한 말투였다.
신중함을 칭찬하는 듯했지만, 속뜻을 알고 보면 결국 겁이 많다는 내용이었기에.
‘강호에 그런 속담이 있었나?’
안내자가 묘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다가 몸을 돌렸다.
류여중을 포함한 다섯 사람이 곧 그의 뒤를 따라 지객당 안으로 들어섰다.
**
맹주 능운파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혈사련에서도 련주가 직접 오지 않은 만큼, 그가 굳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혈사련 협상단으로서는 이러한 홀대가 못내 껄끄럽긴 했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협상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이 분명했으므로.
그렇지 않았더라면 적진 한복판에 단 네 사람만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지객당 접견실.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여덟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정도맹에서는 총군사 구윤, 벽력당주 등왕패, 검영각주(劍影閣主) 섭청(葉請), 그리고 사비강이 자리에 앉았다.
검영각주 섭청은 맹주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저자가… 사비강.’
통성명을 통해 소개를 받은 류여중은 제일 끝자리에 앉은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자가 바로 총군사, 구윤!’
그는 다시 곱상하게 생긴 구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정도맹의 총군사라고 보기에는 몹시 젊은 나이였다.
‘타고난 기재라더니…. 과연 어려서부터 권력 다툼에서도 살아남고 이 자리까지 왔군.’
한편, 사비강의 존재를 류여중 이상으로 신경 쓰는 자가 두 명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홍묘 서래향.
‘이 남자와 다시 보게 되다니…!’
사비강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서래향을 힐끔거렸다.
‘기분 나빠…!’
그리고 또 한 명은 바로 등왕패였다.
‘어째서 저런 놈이 여기에 끼어 있단 말이냐!’
그는 한쪽 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비강이 영 못마땅했다.
그런 등왕패의 반응을 구윤은 내심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사실 협상단에 사비강이 포함된 것은 구윤의 생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사비강이 원한 것이었다.
일전에 용천관에 찾아갔던 그날, 자리에서 일어난 자신에게 사비강이 불쑥 말했다.
“만약 협상 자리가 마련되면 거기에 나를 포함시켜 주시오.”
“정도맹 협상단에 말입니까?”
“그렇소. 혈사련에 요구 사항이 있어서.”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니, 그들에게 내가 직접 말하고 싶소. 물론, 정도맹에게 피해가 갈 일은 아니오.”
구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 알겠노라 대답했다.
구윤이 잠시 회상에 잠긴 사이 류여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련주님께서는 지나간 은원관계를 정리하고 정사가 화합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길 바라십니다.”
“흥! 은원이라? 우리는 그쪽에 받은 은혜 따위가 없거늘 헛소리를! 원한을 산 것도 그쪽이 먼저였고, 그것을 정리하자는 것도 아주 제멋대로군!”
등왕패가 날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현무당주 독고진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리 따지자면 정도맹은 늘 사파 무인들을 핍박하고 멸시하지 않았소? 단지 사공을 익혔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사공이라니! 그 자체가 죄악이오!”
“뭣이? 정공을 익히고도 사공만도 못한 자들이 천지에 널렸거늘!”
“호오, 아무래도 혈사련은 오늘 이 자리에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생사투를 벌일 작정으로 온 모양이군!”
“이익…! 더 이상은 못…!”
그때 류여중이 넌지시 말을 가로질렀다.
“당주님. 자중하시지요.”
“지금 자중하게 생겼소? 군사는 분하지도….”
“흑룡의 명입니다.”
“… 끄음!”
결국 독고진이 입매를 씰룩이면서도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등왕패가 차갑게 웃었다.
류여중이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련주님께서 작은 선물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자 요신이 탁자 위에 커다란 상자를 올려 두더니 덮개를 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구윤이 눈짓을 하자, 시립해 있던 무인이 다가와 상자를 수거해 갔다.
“맹주님께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 쪽에서 제안하는 맹약의 내용입니다.”
류여중이 문서를 내밀었다.
정도맹 협상단이 그것을 나누어 받아들고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앞으로 십 년간 정사간의 불가침 맹약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그 기간 중에 정사간의 싸움이 발생하더라도 철저히 개인사로 치부하고 싸움을 확장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은원관계를 따질 때는 정사간이 합의하여 그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가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끝으로 서로 생포한 포로들을 교환하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다.
‘확실히 많은 부분을 굽혔군.’
혈사련의 정체성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낮은 자세로 제안한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등왕패는 생각이 달랐다.
“역시 제멋대로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가 넙죽 받아들일 줄 알았소?”
“하면 달리 제안하실 내용이라도 있는지요?”
“본 맹이 생포한 혈사련 무인들을 보내줄 수는 없소. 그들 대부분은 강호인이 아닌 일반인마저 무참히 도륙한 자들이오. 그 죄를 물어 마땅하니, 그대로 석방시켜 줄 수는 없는 문제요.”
류여중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등왕패가 보란 듯 구윤을 힐끔거렸다.
마치 협상이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듯.
그는 그간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위신을 이 기회를 통해 일으켜 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류여중은 곧 입을 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건 참 안타깝군요. 사실 이건 이 자리에서만 조용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본 련의 입장에서는 귀 맹에 패배하여 생포당한 그 무인들에 대해 큰 집착이 없답니다.”
“뭐요? 그런데 왜 이런 조항을…?”
“명분과 체면이지요. 본 련 역시 규모가 커지다 보니 어느 정도 명분과 체면이 필요해졌거든요.”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한 마디로 그 조항에 대해서는 본 련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강호에 보여주기 방식이랄까요? 패배의 치욕을 안긴 그 포로들은 어차피 본 련으로 돌아와 봐야 좋은 대접을 받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귀 맹에서 죽이든, 살리든 좋을 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보여주기도 할 수 없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강호에 소문은 제대로 나지 않겠습니까? 혈사련으로서는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정도맹이 제안을 거절했다.”
“하면 그쪽에 잡힌 우리 포로는….”
“물론 그 조항은 결렬되었으니, 본 련에서도 석방은 불가하지요. 만약 귀 맹의 무인들이 무사히 귀환하길 원하신다면 우리 제안을 받아 주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쾅!
등왕패가 탁자를 내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후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강한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지금 본 맹이 네놈들의 정당한 제안을 거절했다며 소문을 퍼뜨리겠다고 협박하는 건가!”
“네놈? 제 아무리 여기가 안방이라지만, 손님을 대하는 꼬락서니가 형편없구나!”
현무당주 독고진이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살기가 마구 휘몰아쳤다.
이번만큼은 류여중도 말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등왕패가 버럭 소리쳤다.
“손님? 네놈들이 무슨 손님이냐? 전쟁에서 패배하여 엎드려 빌러 온 주제에!”
“뭣이? 몇 번의 전투에서 이겼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본 련이 아량을 베풀어 여기서 살생을 멈춰 주겠노라 하면 감사히 받아들일 일이지. 뭐가 어쩌고 저째?”
“무어라?”
여기까지다.
류여중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탁 내려쳤다.
그 바람에 독고진이 움찔거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류여중이 싸늘하게 말했다.
“독 당주님. 점잖게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목소리를 낮춰 주시지요.”
독고진에게 건네는 말인 듯했지만, 류여중의 눈길은 등왕패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내심 웃었다.
정도맹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자들이다.
여기서 독고진이 아무리 날뛴다고 한들, 정도맹이 그에게 해코지를 할 수는 없다.
정도맹이 거래를 위해 온 혈사련 무인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아니, 부상만 입혀도 강호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정도맹의 비열함에 대해.
그런 비난을 정도맹이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후후. 정공을 익힌 것들이 그런 허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미 강호에는 소문이 나 있다.
혈사련이 자존심을 굽히고 휴전 맹약을 맺기 위해 정도맹을 찾아간다고.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혈사련에서 소문을 냈다.
한데 그 맹약을 정도맹이 걷어차면?
물론, 그러길 바라는 정파 무인들도 많을 것이다.
악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으로.
하지만 그 순간, 정도맹은 막중한 부담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 후의 전투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면?
온갖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리라.
반면, 혈사련 무인들은 자존심까지 꺾어 가며 제안한 휴전안을 걷어찬 정도맹 무인들에게 엄청난 분노와 독기를 품게 될 것이고.
‘즉 이 협상은 너희들이 받아들여도 좋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협상 자리에서도 할 말을 분명히 했지.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면… 너희들은 부담을, 우리에게는 명분과 독기를 품는 계기가 되겠지. 그럼 기울어진 균형의 추를 조금이나마 맞춰 볼 수 있지 않겠나?’
한편, 등왕패와 달리 구윤은 그제야 류여중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노리는 것이 그거였나? 어쩌면 이쪽에서 이 맹약을 거절하길 바라겠군.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꺼내길 기다리고 있는 지도. 그럼 자연히 협상은 결렬되겠지. 그렇게 되면 소문은 결코 본 맹에 우호적이진 않을 터.’
구윤이 류여중을 빤히 바라보았다.
‘혈사련에도 이런 자가 있구나.’
비록 자신이 실권에서 물러나 있었다지만, 그간 정도맹이 어째서 연이은 참패를 당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쯤 되자 등왕패도 난감했다.
기세등등하게 말했지만, 저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포로가 된 정도맹 무인들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어진다.
단 한 가지 차이가 걸림돌이 된 거다.
이쪽은 포로들을 죄수로 취급하지만, 저쪽은 인질로 취급하고 있다.
이래서 착하게 살기가 더 힘든 법이다.
‘젠장.’
그때였다.
“후유, 답답해서 더 못 참겠네. 내가 한 마디 해도 되겠소?”
탁자 끝에서 불쑥 말을 뱉은 사람.
사비강이었다.
등왕패가 눈썹을 실룩였다.
‘저 또라이 녀석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