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귀환 마교관
144화
문이 벌컥 열리면서 환살단주 요신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 들어왔다.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그였기에 서래향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죠?”
“큰일 났습니다.”
서래향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요즘 들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던 터였다.
그녀가 은근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나요?”
“본 련의 비밀 분타가 궤멸당했습니다.”
“비밀 분타가?”
“예, 이번 일로 인해 본 련의 세가 굉장히 위축될 듯합니다.”
“호들갑 떨지 마세요. 비밀 분타 하나가 궤멸당했다고 해서 본 련이 그렇게 쉽게….”
“한 군데가 아닙니다!”
“그럼…?”
“세 군데입니다.”
서래향이 흠칫거리고는 요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재차 확인했다.
“세 군데를 동시에?”
“그렇습니다. 한날한시에 작정을 하고 치고 들어온 모양입니다.”
“정도맹이 본 련의 비밀 분타 위치를 어찌 알고? 그것도 세 군데 씩이나….”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가… 본 련에서는 어찌 대응하기로 했죠?”
“저도 지금 막 소식을 접한 터라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지난 번 악 당주가 죽고 나서 정도맹과 협상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정도맹과 협상을 시도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도맹에서 협상을 받아들일까요? 이제야말로 우리를 응징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하지만 그쪽도 구윤 총군사가 실권을 잡은 후부터는 온건적인 입장이 강합니다. 게다가 파벌 싸움도 있는 듯하고요.”
“여기나 저기나 욕심 많은 인간들이 버글거리는군요.”
서래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살막은 어떻게 됐나요?”
“소식이 없습니다.”
서래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살막은 사라졌다.
그런데 사비강은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다.
결국….
‘살막마저도 통하지 않았다는 건가?’
그녀가 엄지손톱을 이로 살짝 물었다.
“우린 정말… 터무니없는 상대를 적으로 둔 건지도 모르겠군요.”
돌이켜보면 이번 정사대전의 중심에는 사비강이 있었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한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도맹이 사비강에게 감사패를 수여한 것을 보면, 그들 역시 그의 활약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뜻이리라.
아니면 극소수의 몇 사람만 알고 있는 기밀이라거나.
**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이 화선지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꾹꾹 눌러 쓴 글귀에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분노와 좌절, 수치와 허망함.
글은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절반 정도를 써 내려갔을 때, 복잡하게 뒤얽힌 그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콰직!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더니 이윽고 붓대가 부러지고 말았다.
한 번 터져 버린 감정은 좀처럼 제어하기 힘들었다.
콰직! 콰직! 콱! 쾅! 콰앙!
손에 들린 붓대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그 파편에 찔린 손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종이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찢어져 버렸고, 탁자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으아아아아!”
그가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며 손에 들린 붓대를 집어던졌다.
카창!
창문에 부딪친 붓대가 힘없이 떨어졌다.
류여중은 그렇게 한참이나 씨근거리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고지를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구윤! 구윤! 구유우운!”
류여중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그 원망스러운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의 눈동자가 귀신처럼 충혈 됐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만큼 분하고 억울했다.
정도맹에서 구윤이 실권을 잡자마자, 모든 것이 기울어져 버렸다.
시작은 악천괴의 사망부터였다.
그리고 한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가 계획한 것이라면 구윤은 정말이지 자신이 근접하기 힘든 상대였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좌절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 낯선 열등감이 류여중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혈사련의 비밀 분타 세 군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렇잖아도 땅에 떨어진 무인들의 사기가 이제는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갈 지경이다.
“제기라알!”
류여중이 다시 한 번 탁자를 내리쳤다.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이 그나마 정신적 고통을 조금은 잊게 해주었다.
그때.
“물러나는 것과 도망가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지.”
어둠 속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황급히 고개를 들어 보니 그림자 하나가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마침 창가에서 스며드는 달빛이 그림자의 얼굴을 절반 정도 비췄다.
“려, 련주님…!”
류여중이 얼른 무릎을 털썩 꿇었다.
련주 허무극은 그대로 창가로 걸어갔다.
“일어나라. 무릎은 함부로 꿇는 것이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본 련의 비밀 분타를 세 군데나….”
“크크크.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니지.”
“하지만…!”
“자네의 잘못은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가려고 한 것이다.”
허무극이 바닥에 떨어진 붓대의 파편을 주워 들었다.
다음 순간.
핑!
쒸에에에엑! 팍!
허무극의 손가락에 튕겨 날아간 붓대의 파편이 류여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는 벽에 부딪쳤다.
파편에 스친 뺨이 화끈거렸다.
“사도의 무리를 이끄는 군사라면 뺨에 상처 하나 쯤 있는 것도 멋이지.”
“련주님….”
“도망가려고 한 죄는 그걸로 용서하겠다.”
“……!”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라. 그리고 도망갈 때를 보지 말고, 물러날 때를 보라.”
“새겨듣겠습니다!”
“우린 그저 잠시 한 걸음 물러날 때가 되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류여중의 표정이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물러날 때를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섭니다.”
허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도맹에 뜻을 전하게.”
**
강호는 발칵 뒤집혔다.
혈사련의 비밀 분타 세 군데가 완전히 궤멸됐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이는 정사대전의 균형을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었기에, 사비강이 악천괴를 죽였을 때보다도 파급 효과가 컸다.
객잔에서도, 다루에서도, 저자거리에서도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얘기로 꽃을 피웠다.
“이거 이러다가 혈사련이 패망하는 것 아닌가 몰라.”
“에이, 이 사람아. 그래도 혈사련은 사도맹이나 다름없는 곳이야. 그리 쉽게 무너지겠나?”
“하지만 싸움은 정도맹이 훨씬 유리할 텐데.”
“그래도 삼사 년은 더 싸우겠지. 피 비린내가 어디 쉽게 가시겠나?”
이러한 갑론을박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만 떠도는 것이 아니었다.
정도맹 맹주전에서도 열띤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주춤거리다니! 이 여세를 몰아 놈들을 몰살시켜 버리지 않고!”
등왕패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따르는 수뇌 인사들 역시 공감을 표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당장 혈사련의 주요 분타들을 치고, 녀석들의 총타도 습격해서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사기가 오를 때 정도맹은 무서울 것이 없지요!”
하지만 그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정도맹은 사기로 움직인다지만, 사도의 무리는 독기로 움직인다는 말이 있소!”
“그렇습니다! 지금 혈사련은 사기가 떨어졌겠지만, 독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짝 올라 있을 겁니다. 신중할 때입니다.”
“일이 잘 풀린다 하여 경거망동하면 오히려 실수를 하는 법이지.”
예전 같았으면 감히 등왕패의 주장에 이러한 반박을 하지도 못했을 터.
하지만 호작곡의 참패 이후로 등왕패를 따르는 무리들의 목소리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마침내 구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본 맹이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젠 그들과의 대화를 생각해 볼 때입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재앙과도 같았던 상황에서 반전을 불러온 사람이 바로 구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다만 등왕패만은 여전히 기를 굽히지 않고 맞섰다.
“흥! 혈사련이 존재하는 한 본 맹의 피해를 막을 방도가 있다고 보시오? 그들은 애초에 바닥에서 시작해서 이만큼 올라온 거요. 한데 겨우 세 개의 분타를 잃었다고 눈 하나 깜짝이나 하겠소?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대화를 하자고 하면 놈들의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될 거요.”
“바닥에서 올라왔기에 가진 것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그럼 그것들을 우선 지키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지키기 위해서 더 악착같이 덤비겠지.”
“아니면, 지키기 위해서 굽히고 나올 수도 있고요. 저는 그걸 기다려 보자는 겁니다.”
“하! 혈사련이 굽히고 나온다니?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먼저 우리에게 제안을 하겠소? 그런 헛된 기대는 애초에 품지….”
그때였다.
맹주전 문이 열리더니 한 무인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그가 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급보입니다!”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혈사련에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무인이 붉은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수뇌 인사들이 술렁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구윤이 잠시 맹주의 눈치를 살피고는 앞으로 걸어가 서신을 받아 펼쳐 들었다.
그가 한참이나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눈빛을 빛냈다.
“혈사련에서 휴전 협상을 제안해 왔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반면 등왕패는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그로서는 최악의 경우.
능운파가 껄껄 웃었다.
“과연 모든 것이 총군사의 뜻대로 흘러가는군. 자네의 안목에 감탄했네.”
“그러게 말입니다. 총군사의 선견지명에 감복했습니다.”
“혈사련에서 먼저 제안을 해왔으니, 모든 조건이 본 맹에 유리할 것입니다.”
너도나도 찬사를 보냈다.
이쯤 되니 등왕패는 할 말이 없었다.
‘제기랄…! 이사흠, 이 병신 같은 놈 때문에!’
능운파가 말했다.
“하면, 군사는 앞으로 협상단을 꾸릴 생각인가?”
“이미 협상단의 명단은 생각해 두었습니다.”
구윤의 말이 떨어지자 혜성각 수하들이 수뇌 인사들에게 명단이 적힌 종이를 나눠 주었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든 등왕패는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당연히 내가 있어야겠지.’
행여나 그 중요한 자리에 자신을 제외시켰을까 봐 내심 각을 세우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으음? 이놈은…?’
등왕패가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협상단 명단에 왜 사비강 교관이 올라 있는 거요?”
“그도 이번 협상단에 포함될 예정입니다.”
“하나 그는 정도맹 인사도 아니지 않소?”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지라, 정식 협상단이라기보다는 참고인 정도로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