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43화 (143/670)

# 143

귀환 마교관

143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사비강이 지도에서 세 군데의 지명을 가리켰다.

탁자를 놓고 둘러선 귀영단 무인들은 가만히 사비강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이곳은 화양객잔(華陽客棧), 그리고 여기는 유가상단(柔家商團), 그리고 여긴….”

“진가장(眞家場)이겠군요.”

귀영단주 웅패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비강이 웃었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군.”

“앞서 말씀하신 두 군데는 그 지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거점이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렇지?”

“우선 화양객잔은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지요. 비교적 고가이긴 하지만 시설과 음식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해서 지역 유지들이 자주 애용하고, 강호인들이 자주 드나들지요. 즉 수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 중 하나입니다. 지리적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렇군. 거기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웅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여기를….”

“그냥 알고 있는 거야.”

웅패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는 따지지 않았다.

사비강이 그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유가상단은 어떤가?”

“유가상단은 그 지역에서 갑자기 세를 불리면서 실세로 떠오른 이들입니다. 한데, 내세운 문패는 분명 상단인데 당최 무엇을 거래하고 어디에 납품하는지 등에 대해 알 방법이 없지요. 뭐, 사업 기밀이라는 명목으로 감추고 있지만 여러모로 수상쩍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지역에서는 가장 주목할 만한 거점입니다.”

“하하. 오히려 내가 단주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듣게 되는군. 그럼, 마지막으로 지목한 진가장은?”

이번엔 일영인 홍염이 대답했다.

“그곳은 그냥 진가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 받을 만합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향력이 대단한 가문이니까요. 가주가 무인은 아니지만, 대를 이어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무인들을 제법 거느리고 있지요. 뭐, 갑질을 잘 하기로 유명하고요.”

사비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다만, 전생에 이곳들은 모두 혈사련의 비밀 분타였다.

그것도 꽤 규모가 컸던 곳.

이 세 곳이 무너진다면 혈사련으로서는 궁지에 몰린 쥐가 될 터다.

웅패가 물었다.

“그런데 이 거점들을 지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혈사련의 비밀 분타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들이요?”

웅패가 놀란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비강을 보며 그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사비강은 이 거점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없지 않았나?

한데 여기가 혈사련의 비밀 분타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뭐,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확률이 매우 높다.”

“하면 저희 임무는….”

“그래, 혈사련의 비밀 분타가 확실한지 확인하는 거야. 어렵지는 않겠지?”

“식은 죽 먹기보다 쉽습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귀영단은 정보 파악 능력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을 자랑한다.

귀영부에서 귀영단으로 변경된 뒤에는 그 능력이 훨씬 향상됐다.

온갖 잡무를 버리고 오로지 정보 수집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럼, 확인이 되는 대로 내게 보고하도록.”

“존명.”

웅패를 비롯한 귀영단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답했다.

**

마차가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

수수한 마차 안에는 정도맹 총군사 구윤이 타고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의 귓가에 전음이 흘러들었다.

[날이 많이 찹니다. 문을 닫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음? 하하. 그럼 이곳에 함께 타자. 혼자 답답한 곳에 갇혀서 가려니 영 심심해.”

[제 임무는 언제 어느 때든 군사님을 지켜드리는 겁니다. 동석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구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냥 이대로 가련다. 이깟 날씨가 무슨 대수겠느냐? 지금까지 그보다 더 추운 겨울도 버텨왔는데.”

그랬다.

그동안 참고 견딘 마음의 겨울을 떠올린다면, 지금 불어오는 이 차가운 바람은 상쾌하기 그지없다.

비령의 전음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사비강 그자도 좀 너무하군요. 감히 군사님을 오라 가라 하다니….]

“하하. 비령도 점점 맹의 그 늙은이들을 닮아 가는 것 같군. 누가 가고, 누가 오면 어떠냐?”

[하지만 군사님은 맹에서 중요한 역할을….]

“중요한 역할이라… 과연 사비강 그자만큼이나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야 당연히…!]

“령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비강 교관은 확실히 대단한 자다. 몇 달 전에 그에게 내 모든 것을 걸었을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정말 이런 날이 오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자의 가벼운 언행으로 군사님께서 막중한 부담을 지지 않았습니까? 현재 맹에서는 군사님께 거는 기대가 적지 않습니다. 맹주님 역시 군사님이 특별한 작전이라도 세우신 줄로만 알고 곧 이 전쟁을 끝내리라 믿고 계시니…. 아, 죄송합니다. 괜히 제가 더 부담을 드렸습니다.]

“괜찮다. 개의치 않으니까.”

비령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구윤 역시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확실히 맹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엄청났다.

연회 때 사비강이 한 말 때문이다.

그는 ‘총군사가 엄청난 작전을 준비했습니다!’라고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런 분위기를 풀풀 풍겼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사비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떠든 건지 들어보기 위해.

정말 하루아침에 혈사련을 궁지로 몰 묘수라도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럼에도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기대가 된다.”

불쑥 튀어나온 말에 비령이 모호한 말투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이번에는 어떤 일로 나를 놀라게 할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생각해 보면 참 우습지 않느냐?”

[우습다니요?]

“나는 언제나 머리로만 움직였어. 태어날 때부터 줄곧 계산하고,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했지. 그런데… 내가 가장 덕을 본 것은 가슴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던 바로 그때다. 논리도, 계산도 없이 그저 사비강 교관을 찾아갔던 그때.”

[…….]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했는데… 또 어느 날 돌아보면 엉뚱한 길을 가고 있고. 때론 절대 들어서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내밀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다 보니 잘못 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 그런데 여전히 답을 모르겠구나.”

[저는 군사님의 판단을 언제나 존중합니다.]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 천안각주가 말했듯이 나는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는 모양이다. 이렇게 또 배웠다는 것이 분하면서도 참 다행이고.”

비령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구윤도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를 태운 마차가 부지런히 용천관을 향했다.

**

“이곳과 이곳, 그리고 여기를 치도록 하시오.”

사비강이 지도에서 세 군데를 가리켰다.

앞서 귀영단을 만나서 가리켰던 바로 그 지역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 세 군데는 모두 혈사련의 비밀 분타로 밝혀졌다.

“여기는 화양객잔, 이곳은 유가상단, 그리고 진가장이오.”

“세 군데 모두 유명해서 알고는 있습니다. 한데 왜 이런 곳을? 여기는 그저 일반인들이 사는 곳이 아닙니까?”

“그렇게 위장되었을 뿐이오. 모두 혈사련의 비밀 분타지요.”

“비밀 분타…!”

구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생각도 못했다.

그가 지목한 곳은 모두 그 지역에서 어느 정도 위세를 떨치는 곳이었다.

때문에 예의주시하긴 했다.

하지만 혈사련의 비밀 분타라니.

“믿을만한 단주와 대주들을 시켜 세 군데를 동시에 치도록 하는 게 좋소.”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화양객잔은 초절정 하나, 절정이 다섯, 일류가 쉰 명. 유가상단은 초절정 둘, 절정이 스무 명, 일류가 백 명. 진가장은 유가상단과 같소.”

구윤은 전율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이렇게 자세하게 조사해 두었다니.

“하지만 진가장 만큼은 평범한….”

“평범한 사람이지만 욕심도 많은 사람이지. 그는 이미 혈사련이 강호에 나타나자마자 가장 먼저 은밀히 그쪽으로 붙은 자였소.”

“도대체 이런 정보력은 어디서 생기는 겁니까?”

“뭐, 나도 따르는 수하쯤은 있으니까.”

사비강이 두루뭉술하게 대꾸했지만, 구윤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비강이 지목한 곳은 이번 정사대전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 세 군데가 정말 혈사련의 비밀 분타라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중요한 거점이 된다.

만약 침습에 성공하게 되면 혈사련은 협상 자리에 나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으리라.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협상을 요구해 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동등한 조건에서 협상을 하는 게 아니다.

정도맹이 훨씬 우위에 선 입장에서 협상을 하게 된다.

‘역시 이자는 날 매번 놀라게 하는구나.’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알겠습니다. 천안각을 통해서 확실히 조사한 다음….”

“아니.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게 좋을 거요. 현재 혈사련의 이목이 정도맹에 집중되어 있소. 천안각이 움직이게 되면 혈사련이 낌새를 챌 가능성이 높소.”

“하지만… 단지 그 말만 듣고 맹의 단을 움직이기에는….”

사비강이 차갑게 웃었다.

“지위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나니 다시 군사 놀음을 하고 싶어졌소?”

“말이 지나칩니다!”

구윤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비령이 흘려보내는 살기였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처음 나를 찾아올 때의 그 절박함이 많이 사라진 것 같군. 그때는 도박을 하는 심정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랬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제 도박은 그만두고 손익 계산을 할 차례인가? 뭐, 거기에서 만족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사비강을 향해 칼날이 쑤욱 뻗어 왔다.

“무엄하다!”

비령이었다.

어느새 사비강의 목젖에 차디찬 칼날이 맞닿았다.

하지만 사비강은 싸늘하게 웃었다.

“군사의 배짱도 여기까지군. 그동안 애썼소.”

사비강이 칼날을 걷어치우더니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령의 눈매가 구겨지면서 살기가 일어나는데.

“치도록 하지요.”

“흐음?”

사비강이 돌아보았다.

비령 역시 움찔거리고는 구윤을 보았다.

“군사님…!”

하지만 구윤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아직 주사위가 구르는 중이라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돌아가는 대로 바로 타격대를 꾸려 움직일 겁니다. 도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그리고 본 맹의 썩은 부위를 도려낼 때까지는.”

구윤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사비강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이제야 그때의 눈빛이 되었군. 잘 생각했소. 그렇게 되면 혈사련은….”

“협상에 응하겠지요. 정사대전은 이대로 끝낼 수 있을 거고요.”

“그렇소.”

“하지만 진짜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될 겁니다. 협상이 진행되고 본 맹과 혈사련이 안정을 찾게 되면 곧바로 내사를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그것도 알고 있소.”

“이번에 생도들이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아직은 무공이 일류 수준에 머물러 있더군요. 절정 고수 한 명 없는 생도들로만 감찰대를 구성할 수 없다는 건 아시겠지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소. 곧 만족할 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 말을 일 년 가까이 들어온 것 같군요.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더라도 절정 고수가 되려면 최소한 일 년… 아니, 일 년도 빠듯한 시간일 텐데요. 한데 이제 겨우 석 달 남았습니다.”

“흐음.”

사비강이 구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윤 역시 이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는 문제라는 듯 빤히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잠시 후.

“좋소. 내가 감찰관으로 정식 임명이 되는 날, 생도들의 무공이 수준 미달이라고 판단되면….”

“판단되면?”

“생도들을 감찰대로 편성하지 않아도 좋소.”

“그 말은….”

“군사가 구성한 감찰대를 맡도록 하겠소.”

구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비강의 표정에서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확실히 사비강은 자신을 놀라게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돌아가 보지요.”

구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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