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42화 (142/670)

# 142

귀환 마교관

142화

일살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점혈을 당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막주는 네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명예로운 개죽음을 선택했지. 하지만 네가 죽으면? 듣기로는 이살까지가 조직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던데.”

사비강의 지적은 정확했다.

막주와 이살이 죽었다.

삼살과 사살도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마당에 자신이 죽어 버리면 사실상 살막은 강호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일살이 갈등하자 사비강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뭐, 이쯤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의미 있기는 하지. 네놈들 모두 죽어 마땅한 쓰레기니까. 지금까지 해온 악행들, 그리고 앞으로 네놈들이 저지를 일들을 생각하면 역시 멸살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일살이 사비강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약속… 어떻게 믿지?”

“무슨 약속?”

“추후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 말이다.”

“아, 그건… 설명하기 어렵군. 그냥 믿으라고 하는 수밖에.”

불친절한 대답.

하지만 어쩐지 그렇기에 오히려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구구절절 설득을 해왔다면, 오히려 의심이 들었으리라.

살수들은 이제 일살의 눈치만 가만히 살폈다.

그의 한 마디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기에.

이윽고 일살의 입이 떨어졌다.

“좋다. 복종하지.”

“크크크. 잘 생각했어. 그런데 나도 너희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서 말이야.”

“무슨… 뜻이냐?”

“제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들은 신의도 가볍더라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한 녀석이 너희들을 통솔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뭐?”

“인사들 해라. 너희들의 새 막주다.”

사비강이 피식 웃으며 출입구를 가리켰다.

마침 통로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일살을 비롯한 살수들이 흔들리는 표정으로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곳으로 차가운 인상의 노인이 들어섰다.

잠시 상대를 파악하느라 눈살을 찌푸리던 일살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당, 당신은…!”

“오냐, 본좌가 네놈들의 새 주인이다.”

괴팍한 인상의 노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제야 다른 살수들 역시 노인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살막의 새로운 막주라며 들어선 노인.

그는 바로 혈사련의 주작당주 악천괴였다.

사비강이 씩 웃었다.

“무공 수준은 너희들보다 월등하니 별 불만은 없으리라 본다. 모르긴 해도 암살 실력도 뛰어날 테지.”

“어째서 주작혈조(朱雀血爪)가 여기에…!”

주작혈조는 강호에서 악천괴를 부르는 별호였다.

일살 뿐만 아니라 살수들 역시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분명 악천괴는 사비강의 손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가 새 막주라니?

도대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사비강이 악천괴를 돌아보며 물었다.

“관리는 잘 할 수 있겠나?”

“흥! 이딴 녀석들 쯤은 일도 아니지.”

“하긴 악인은 악인을 다룰 줄 아는 법이니까.”

“크크크. 마치 본인은 악인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후후. 그 사이 내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군.”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자, 악천괴가 슬쩍 눈치를 보며 투덜거렸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살수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천하의 악천괴가 사비강 앞에서 설설 기고 있지 않은가?

마침 악천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궁금할 것도 없다! 나도 네놈들과 같은 처지니까.”

악천괴는 문득 그날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

서컥!

한 줄기 빛이 지나갔고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내 목이 잘리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악천괴는 천천히 쓰러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음?’

뭔가 이상하다.

악천괴는 얼른 목과 몸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의 몸이 멀쩡하지 않은가?

“이건…?”

고개를 들어 보니 사비강이 우두커니 선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잘려 나간 바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려친 사비강의 검신이 악천괴의 목이 아니라, 바위를 잘라낸 것이다.

“혈사련의 주작당주 악천괴는 오늘 죽었다.”

“뭐?”

빗나갔을 리는 없고….

“왜 살려 주는 거냐?”

“역시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사비강이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잘려 나간 바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정말이지 한 줌의 공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연이은 상승 무공과 하이 레벨의 마법을 연사한 후유증은 꽤 컸다.

만약 지금 악천괴에게 단 한 줌의 공력이라도 남아 있어서 일장을 뻗었다면, 단숨에 사비강을 죽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악천괴 역시 내공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

악천괴가 히죽 웃었다.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군. 내 재능이 아깝다고 살려 주다니.”

“착각하지 마라. 네놈을 살려 주되 철저히 이용해 먹을 테니까.”

“이용해 먹어?”

“그래.”

시큰둥하게 대꾸한 사비강이 품에서 라겔의 주머니를 꺼냈다.

‘뭐하는 거지?’

악천괴가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가운데, 사비강은 그 주머니에서 붉은색 액체가 담긴 병과 푸른색 액체가 담긴 병을 각각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품은 기이한 병이었다.

바로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이었다.

사비강은 두 개의 포션을 단숨에 들이켰다.

우우우웅.

체내의 변화가 확실히 느껴졌다.

상처는 아물어 갔고, 소진된 마나는 다시 심장에 쌓이고 있었다.

이를 다시 내공으로 치환해서 단전에 쌓으니 기력이 꽤 돌아왔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방금, 뭘 한 거냐?”

“알 것 없어.”

무뚝뚝하게 대꾸한 사비강이 이번에는 라겔의 주머니에서 붉은 빛 단환을 꺼내 들었다.

이 역시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비강이 악천괴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양 볼을 콱 움켜잡았다.

“크윽! 무, 무슨… 지슬…!”

“삼켜라.”

악천괴는 사비강의 손에 의해 단환을 강제로 삼키고 말았다.

사비강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독이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넌 죽어.”

“뭣이…?”

“궁금하면 시험해 봐도 좋고. 어차피 넌 죽어도 싼 놈이니까.”

“이런 개잡놈이….”

“지금부터는 그 입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도 너만큼이나 관대한 성격이 아니거든.”

“이익…!”

사비강은 희미하게 웃으며 악천괴를 보았다.

“네 입으로 말했지? 네 목숨을 의지할 수 있는 자에게 힘을 보탤 뿐이라고. 그 말, 아주 마음에 들더군. 이제 네 목숨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다.”

**

살막의 새 막주로 악천괴를 앉혀 놓고 대략의 정비를 끝내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과연 악천괴는 악인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몇몇 살수들이 은근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악천괴는 빠른 시간 내에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워 버렸다.

사비강 역시 그의 빠른 장악력과 적응력에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용해 먹길 잘했군.’

사비강이 용천관으로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천세명을 비롯한 몇몇 교관들은 여전히 곱지 않은 눈으로 사비강을 보았지만, 다수 교관들은 이제 사비강을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사람처럼 우러러보았다.

몇몇 교관들은 일부러 사비강에게 찾아와 인사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단연 여자 교관들이나 생도들에게도 인기가 급상승했다.

괜히 눈길만 닿아도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여자 생도들이 있는가 하면, 은근히 다가와서 은밀한 시선을 던지는 여자 교관도 있었다.

자연히 특목반 위상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애초에 문제아들만 추려서 만든 반이라는 인식과 달리, 이제는 오히려 우수 생도들로만 구성된 특별한 반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학관에서는 사비강 교관을 비롯해 특목반 전원에게 상패를 수여하고, 영약까지 부상으로 내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예우였다.

한 차례 예정된 행사를 모두 치른 사비강은 집무실에 돌아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어우, 이제야 좀 쉬겠네.”

짧은 기간 동안 무척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휴식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똑똑.

“들어와라.”

문이 열리면서 염자량이 들어섰다.

“부르셨….”

“받아라.”

사비강이 다짜고짜 염자량에게 다크블레이드를 휙 던져 주었다.

얼결에 칼을 받아든 염자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이거…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

“엄청 큰 칼이군요.”

“그래서 싫어?”

“아뇨, 좋습니다. 자랑하기 좋잖아요. 흐흐흐. 그렇잖아도 우경이랑 단화랑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투덜거리다니? 내 욕했단 말이냐?”

“뭐, 저희들한텐 아직 기물을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이놈들아, 맡겨 놨냐고.”

“헤헤헤.”

염자량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자신에게도 신병이기가 생겼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너는 검보다는 도가 어울린다. 그리고 그건 마도(魔刀)다. 마법을 사용할 때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녀석이지. 생도들 중에서 마법 숙지 능력이 가장 빠르니 너에게도 잘 맞을 거다.”

“우와아아! 감사합니다!”

염자량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했다.

그러더니 다크블레이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정했습니다.”

“뭘?”

“이 녀석의 이름요. 흐흐.”

그 동안 조문탁이나 곡보옥이 기물을 받아들고 이름을 붙여 주는 게 은근히 부러웠던 염자량이었다.

때문에 그가 신병이기를 받으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름을 지어 주는 거였다.

“그 녀석의 원래 이름은 다크….”

“흑패도(黑覇刀)입니다! 흐흐!”

“흠… 뭐, 지금껏 들어 본 것 중에선 그나마 낫네.”

염자량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흑패도를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았다.

‘마도라… 그럼 이걸 들고 아이스 볼트를 사용하면 더 쉽게 나간다는 건가?’

한참이나 흑패도를 들고 살피던 염자량이 창문 쪽으로 한 차례 휙 저었다.

그 순간.

슈슛!

파직! 챙그랑!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느닷없이 얼음 구슬이 생성되면서 쏘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창문이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헉!”

정작 칼을 휘두른 염자량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렇게 간단히?’

생각보다 마법이 너무나 쉽게 발동된 것이다.

물론, 속으로 아이스 볼트를 떠올리고 운기를 하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스 볼트가 나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로 쏘아진 것이다.

맨손으로 마법을 시전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흑패도가 체내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증폭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마도…!’

저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희열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가슴에 사비강의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뭐하냐? 더 부수지 않고? 아예 다 부수고 다시 지어 주지 그러냐?”

“아, 죄, 죄송합니닷! 최대한 빨리 수리해 두겠습니다!”

염자량이 연신 굽실거리면서도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