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귀환 마교관
141화
갑작스러운 상황에 살수들은 혼란스러웠다.
하마터면 막주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구타를 당한 것인지 온통 퉁퉁 부어오른 얼굴.
막주는 오살과 팔살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일살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본부가 유출되다니…!’
사상 최악의 상황이다.
그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살수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멍청하게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놈을 죽…!”
일살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헉!”
거짓말처럼 사비강이 코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히죽.
사비강이 귀신처럼 입매를 찢더니 손을 불쑥 뻗었다.
“커억!”
사비강의 손아귀에 잡힌 일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목의 핏대가 툭툭 불거져 나왔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여기 있는 녀석들 다 죽일 생각이냐?”
“닥, 닥쳐…! 크윽!”
“역시 말로 해서는 들어먹질 않을 놈들이군. 손을 봐줘야….”
그 순간.
쒸엑! 쒸에엑! 쒸에엑!
다른 살수들이 사비강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따다다당!
좁은 공간을 가르며 날아든 암기가 실드에 가로막히며 모두 튕겨 나갔다.
실드를 처음 본 살수들은 무척 당황했다.
호신강기와는 분명 달랐기에.
만약 호신강기라면 이처럼 짧은 순간에 저토록 손쉽게 펼칠 수는 없으리라.
“크아압!”
이번에는 일살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들며 그대로 사비강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쒸이이잉!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힌 사비강은 단도를 피하자마자 일살을 방 한쪽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쿠당탕탕!
잡기를 부수며 날아간 일살이 구석에 처박혔다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네놈이… 사비강이군.”
“크크크. 이 와중에도 상대의 신분부터 확인하는 것은 살수들의 습관인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나?”
“그거야 저 녀석을 깨워서 물어보면 알겠지.”
사비강이 턱짓으로 막주를 가리켰다.
“생각보다 순순히 불더군. 아, 저렇게 만든 건 그 후의 일이니까 오해는 말고.”
실제로 그랬다.
막주는 계곡 전투에서 참패하고 나서 순순히 본부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후에 암살을 재차 시도하면서 사비강에게 의식을 잃도록 두드려 맞은 것이다.
“저 녀석, 생각보다 의지가 박약하더라고. 나도 그렇게 순순히 여기 위치를 까발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래도 명색이 살막인데 말이야.”
하지만 일살은 사비강의 격장지계에 넘어가지 않았다.
막주는 결코 의지가 약하지 않다.
그가 본부 위치를 까발린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이곳에서 처리하겠다는 속셈이셨겠지.’
결국 사비강을 제거하기 어려워지니, 호랑이굴로 끌어들여 죽이기로 한 것이다.
한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사비강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
‘그래도… 아직 끝은 아니다. 기회는 남아 있다!’
일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적어도 여기가 호랑이굴이라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사비강을 노려보며 쉴 새 없이 살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살막의 살수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신호가 계속 이어졌다.
눈동자의 움직임, 발끝의 방향, 자연스럽게 취하는 동작 등이 모두 하나의 신호 체계다.
‘분위기가 달라졌군.’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살수들을 훑었다.
물론, 그는 살막의 신호 체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살수들의 눈빛과 살기. 호흡과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모종의 각오가 느껴진다고 할까?
살수들이 더욱 신중한 태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열을 정비했다.
반면 부상을 입은 일살은 조금씩 물러나며 출입구 쪽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사비강의 눈빛이 반짝였다.
‘과연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그때.
“죽어랏!”
살수들이 한꺼번에 사비강을 향해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철컥! 철컥! 철컥!
사방의 벽면에서 수백 개의 구멍이 나타나더니.
푸쉬이이이익!
거뭇한 연기가 실내에 잔뜩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독?’
그런 와중에도 살수들은 거센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사비강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한 차례 베르타스를 크게 휘둘렀다.
“크아압!”
따다다당!
그 바람에 살수들이 튕겨 나가거나 훌쩍 물러나서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찰나.
“크으읍!”
사비강이 목을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지켜보던 살수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사비강이 그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 개놈들…! 무슨 짓을 한…!”
그제야 출입구로 물러나 있던 일살이 천천히 걸어왔다.
“후후.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왔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이 비열한 놈들…!”
사비강이 털썩 무릎을 꿇고 겨우 말을 꺼냈다.
일살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흑무독(黑霧毒)이다. 곧 네놈은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들게 될 것이다.”
“끄읍… 으윽!”
사비강이 눈에 힘을 잔뜩 주며 일살을 노려보더니 마침내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일살이 사비강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사비강은 그대로 죽어 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작 이 방법을 쓸 걸 그랬다.
다만, 이 경우 살수 전원이 귀한 피독주를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일살이 살수들에게 명했다.
“정리해. 막주님은 안전하게 모시고.”
살수들이 서둘러 사비강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는데.
“엇!”
살수 한 명이 이상한 낌새를 채고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쉬이잇! 파파팍! 파바바밧!
사비강의 손이 귀신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살수들의 혈을 점하는 것이 아닌가?
팟, 팟, 팟!
사비강의 신형이 연이어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면서 살수들의 마혈과 아혈을 차례로 점해 갔다.
마지막으로 일살의 등 뒤에 나타난 사비강.
탁탁탁.
“크읏!”
순식간에 온몸이 굳은 일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사비강이 그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 일살의 눈앞에서 피독주를 흔들어 보였다.
“막주와 다른 살수들이 품에 하나씩 지니고 있더군. 혹시나 해서 챙겨 뒀지.”
일살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사비강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출입구 쪽으로 몸을 빼낼 때 알아봤지. 지금의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문을 봉쇄하고 여기 있는 살수 전원이 자폭을 시도할 것이라는 걸.”
일살의 눈동자가 흠칫거렸다.
사비강의 지적은 정확했다.
실제로 그가 출입구로 빠진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조직의 존립을 위해서다.
막주와 이살이 무력화 된 지금, 자신이라도 살아 남아야 살막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사비강은 그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살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건 바로 강호에서 오랜 기간 명맥을 유지해 온 조직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비강이 품에서 라겔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붉은 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단환을 꺼냈다.
그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튕기자, 휙휙 날아간 단환이 살수들의 입안으로 쑥 들어갔다.
점혈을 당한 상황이었기에 살수들은 속수무책으로 그 정체불명의 단환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살에게는 사비강이 직접 손으로 넣어 주었다.
“‘위선자의 혀’라고 불리는 독이다. 맛은 없을 거야.”
사비강이 일살의 아혈을 풀어 주자 욕지거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이 개자식…! 대체 뭘 먹인 거냐?”
“말해 줬잖아. 뭐,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
순간 사비강이 손을 쑥 뻗자,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던 막주가 허공을 붕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짜악!
사비강이 다짜고짜 막주의 뺨을 후려쳤다.
“어이, 일어나라.”
그 충격에 막주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끄음…!”
그는 동상처럼 굳어 버린 살수들과 눈앞의 일살을 확인하고는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아마 자폭을 시도하지 못했거나, 통하지도 않았거나.
워낙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싸우는 상대이니,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사비강이 참담한 표정을 짓는 막주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너에겐 마지막 기회를 주지. 앞으로 내게 복종하겠느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을 거냐?”
“차라리 죽여라.”
“하여튼 융통성이라곤 없다니까.”
사비강이 혀를 차더니 막주를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부렸다.
쿠당탕탕!
벽에 처박히며 쓰러진 막주.
곧이어 사비강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마계의 언어였다.
그러고는 잠시 후.
“크읍! 끄아아아악!”
막주가 돌연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우와아아아악!”
퍼억!
처절한 비명 끝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주의 전신이 산산조각 나면서 터져 나간 것이다.
“……!”
일살은 물론 실내에 있던 모든 살수들이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피와 살점들이 실내 곳곳에 떡칠이 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지경.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르고 다니는 이들이었지만, 이처럼 참혹하게 죽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일살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보다시피 죽여 달라고 해서. 너도 원하면 언제든 말만 해.”
일살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막주는 너희들이 지금 삼킨 것과 같은 독인 ‘위선자의 혀’를 복용했다. 보다시피 너희들의 목숨은 이제 내 손에 달렸다는 뜻이지. 내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죽여 버릴 수 있어. 아, 중원에서 사술이 들어간 고독(蠱毒)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군.”
“죽여… 버리겠다!”
“아아, 그것도 좀 곤란할 거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복용한 위선자의 혀가 또 폭발을 일으키거든. 결국 내가 죽는 순간, 네놈들도 저렇게 죽는다는 뜻이지.”
일살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사비강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살고 싶다면… 아니, 조직을 유지하겠다면 나를 따라라. 내게 절대 복종하면 너희 모두 살려주겠다. 하지만 개죽음을 원한다면 그렇게 만들어 주지.”
사비강이 시선을 힐끔 돌려 막주가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회유를 하거나 거래를 할 생각은 없다.
살막은 독한 놈들이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은커녕 돈으로도 그 충성심을 사기 힘든 녀석들.
그러니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엔 없다.
거부한다면?
죽인다.
그뿐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자신의 조직이 아닌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일살에게 사비강이 다가섰다.
“내게 복종한다면 십년 후가 되었든, 이십년 후가 되었든. 추후 너희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 내가 준비하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해독제를 주겠다.”
“그 준비가 뭐지?”
“말하자면 길어. 너희들은 그저 지금까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된다. 네놈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염두에 두기나 했더냐? 그저 앞으로도 내 말을 따르는 인형처럼 살면 된다. 생각이라는 걸 끄고.”
사비강이 검지로 일살의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