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귀환 마교관
140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사비강은 산기슭에서 마차를 멈추게 한 후 내렸다.
매설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볼일인데요? 오래 걸리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함께 가요.”
“아니,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두 사람은 먼저 돌아가 있도록 해. 나도 너무 늦지 않게 갈 테니까.”
당이협과 매설란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차피 사비강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
결국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군.”
“그럼, 먼저 가 있을게요. 몸 조심해요.”
“호오, 이건 하룻밤 정을 나눈 사이로서 걱정을….”
“누구에게나 해주는 평범한 인사입니다. 사비강 교관님.”
“쩝, 그렇군.”
당이협과 매설란을 태운 마차는 다시 용천관을 향해 떠났다.
숲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마차를 한참이나 넌지시 바라보던 사비강이 몸을 휙 돌리고는 숲속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아이고, 오래 참았다. 오줌 마려워서 혼났네.”
그는 혼잣말을 떠들며 숲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마침내 계곡이 가까워졌을 때 바지춤을 내리고 시원하게 오줌을 눴다.
잠시 후, 그가 옷을 추스르고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안 나타날 거냐?”
누구에게 건넨 말일까?
사비강이 불쑥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혼자되길 기다렸을 텐데, 크크크. 너희들을 배려해서 내가 친히 오줌까지 싸주셨는데 정말 안 나올 거냐?”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물론 사비강이기에 느낄 수 있는 반응이었다.
사비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후후후.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찰나.
촤아아아아아!
수백 자루의 암기가 허공을 빽빽하게 메우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흡사 사천당가의 만천화우를 보는 듯 장엄하고도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사비강이 순간적으로 실드를 펼치며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따다다다다다당!
암기가 튕겨져 나간 직후.
쒸에엑! 쒸에엑! 쒸에에엑!
열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사비강을 향해 쇄도했다.
가장 먼저 날아든 살수가 검게 칠해진 환도를 휘둘러 왔다.
슈까앙!
어느새 뽑혀 나온 베르타스가 살수의 환도를 쳐냈다.
곧이어 사비강이 등에 매고 있던 다크블레이드를 뽑아 들더니 적을 향해 그대로 베어 갔다.
슈아아아악!
화르르르륵!
놀랍게도 칼끝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마검사의 칼인 다크블레이드는 불어넣은 마나의 성질에 따라 곧장 열기나 냉기 속성을 발산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살수들로서는 갑자기 불길이 일어나자 놀란 표정이 됐다.
“크웁!”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대각선으로 베인 살수가 몸을 비틀며 추락했다.
그는 곧장 개울 속으로 몸을 던져 몸에 붙은 불부터 껐다.
첨벙!
다른 살수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거리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밀다니. 상당히 무례한 친구들이구만.”
살수들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사비강을 노려보며 천천히 대열을 정비했다.
사비강이 다크블레이드 칼등으로 제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신기한 걸 보고 놀란 모양인데… 더 신기한 걸 보여줄까? 아, 그 대신 공짜는 아니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크크크.”
비릿한 웃음 끝에.
팟!
사비강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뒤다!’
살수들이 곧장 몸을 돌리며 환도를 후려쳐 갔다.
따다앙!
이번에는 호신강기에 의해 살수들의 칼날이 속수무책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틈을 타서 사비강이 다크블레이드를 휘둘러 갔다.
타다닷!
살수들이 민첩하게 물러나며 다크블레이드를 피했다.
민첩하기로 따지면 강호에서 살막의 살수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몇 없으리라.
한데.
쒜에에에에에에엥!
날카로운 파공성에 이어 느닷없이 허공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이 아닌가?
직후 살수들은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내공을 끌어올려 체온을 상승시켰다.
휘이이이이이잉!
그야말로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촤아아아… 쩌적… 쩍!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개울물 역시 갑작스러운 추위에 거짓말처럼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퍼캉!
개울에 몸을 담고 있던 살수는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얼음덩어리에서 몸을 빼냈다.
촤아아아앗!
살수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현재 모든 공력을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데에 쏟아 붓고 있었다.
살수들은 이 기상천외한 현상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앞서 투입된 살수들이 어째서 임무에 실패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극양의 신공을 익혔다고 착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가 극음의 신공을 익혔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사비강의 공격은 일반적인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살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예측 불가능한 부분이다.
다른 무인들과 달리 그들은 철저한 계획 끝에 암살을 시도하는 자들이다.
한데 이런 추위는 태어나서 겪어 본 바가 없다.
사비강이 싸늘하게 웃었다.
“역시 놀란 표정이군. 하긴 신기하긴 할 거야. 나도 처음 겪었을 때는 귀신한테 홀린 줄 알았으니까.”
“사술… 이냐?”
살수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바로 살막의 막주, 무살이었다.
“말을 할 줄 아네? 너무 조용해서 전부 벙어리인 줄 알았지. 크크.”
“넌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군. 우리의 암살 대상이 되었다는 건 결국 죽는다는 뜻이다.”
“크크크. 살막이라…. 원래 살수들이 너처럼 갑자기 수다스러워지는 거냐?”
“놈!”
파밧!
무살이 바닥을 차고 쏘아져 나갔다.
그 뒤를 삼살(三殺)과 사살(四殺)이 바짝 따라붙었다.
나머지 살수들 역시 품에서 암기를 뽑아 들고 사비강을 향해 날렸다.
각각의 암기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쇄도하는 살수들의 진로는 일절 방해하지 않고, 오로지 사비강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완벽한 합격술.
‘과연 훌륭하군. 살막이 악명을 떨치는 이유를 알 만해. 하지만….’
일전에 사비강은 악천괴와 생사투를 벌였다.
그에 비하면 이 싸움은 훨씬 수월했다.
애초에 살수들이 암살에 실패해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싸움의 균형은 사비강에게 기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부터 쇼타임(Showtime)이다!”
사비강이 버럭 소리치며 다시 한 번 다크블레이드를 휘저었다.
다크블레이드는 그 자체로 훌륭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때는 일종의 메이스 역할을 한다.
즉 마법을 캐스팅할 때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마나를 변환시켜 주는 매개체가 된다는 뜻이다.
“파이어 스톰(Fire storm)!”
사비강의 입에서 시동어가 튀어나오자, 곧장 다크블레이드로부터 화염의 폭풍이 거칠게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크우웃!”
워낙 고온인지라 날아들던 암기들이 순식간에 녹아 버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꽁꽁 얼어붙어 있던 개울물이 녹아서 흐르기 시작했다.
풍덩! 풍덩! 풍덩!
얼음이라고 생각하며 내려선 살수들이 전부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사비강이 벼락처럼 소리치며 개울물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번엔 썬더 스톰(Thunder storm)이라는 거다!”
쩌저저정!
파지지지지직!
순간 강렬한 전기가 물을 통해 퍼져 나갔다.
자연히 물에 빠져 잔뜩 젖어 있던 살수들이 저마다 감전되면서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떨어댔다.
“크아아악!”
“아그윽!”
탁.
개울가에 우뚝 솟은 바위에 착지한 사비강이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크크크. 내 쇼가 어땠나? 아, 쇼라는 말을 모르겠군. 뭐, 일종의 공연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무튼 너희들은 날 이기지 못해.”
사비강의 표정에 여유가 넘쳤다.
만약 평범한 고수였다면, 살수들에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비강은 평범한 고수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서 강해진 악천괴는 사비강의 기상천외한 공격에도 임기응변으로 곧잘 대처했다.
하지만 살수들은 자신들이 조성해 놓은 환경에서만 암살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 있는 자들이다.
물론, 실패했을 시에 차선책도 준비는 되어 있다.
바로 그게 문제다.
언제나 철저한 준비 끝에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
일차 공격에서 막히면, 이차, 삼차로 이어진다.
물론, 중원인이라면 그 철저히 계산된 공격에 당하고 말 것이다.
제아무리 초절정 고수라도 살수들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실드를 상상이나 했을까?
호신강기와 비슷하지만 내공 소모량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블리자드(Blizard)에 이은 파이어 스톰, 그리고 썬더 스톰까지.
연이은 예측 불가능한 싸움 방식에 살수들은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비강이 목을 우두둑 꺾으며 히죽 웃었다.
“그럼, 불친절한 너희들에게 친절이란 무엇인지 계도를 해 줄 차례군. 이래봬도 내가 어엿한 교관이라서 말이야.”
파밧!
순간 사비강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
살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살(五殺)을 비롯한 특급 살수와 일급 살수들이다.
살막에 남아 있는 모든 살수가 방안에 모여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일살이 들어섰다.
앉아 있던 살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살이 날카롭게 살수들을 훑어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막주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니?”
“막주님이 직접 임무에 나서셨습니다만, 현재 연락이 전혀 안 됩니다. 오늘로 이틀 지났습니다.”
“투입된 특급 살수는?”
“삼살과 사살, 육살입니다.”
일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이제 막 임무를 끝내고 본부로 귀환한 참이었다.
한데 임무에 나간 막주로부터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삼사육이라니….”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살이 살해당했다는 소식 역시 들었다.
한데 이젠 막주가 행방불명된 것도 모자라 삼사육살이 모두 실종이라니!
“도대체 그 사비강이라는 작자가 누구기에! 가만? 사비강이라면…?”
“예, 이번에 악천괴를 죽였다는 그자입니다.”
“제길!”
일살이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살막이 존재한 이래 이렇게 위태로운 적은 없었다.
그것도 고작 한 명의 표적 때문에.
‘도대체 사비강이라는 그 작자가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막주가 직접 나섰다.
무공의 수위로만 따지면 일살이 좀 더 뛰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수로서의 자격은 다르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암살 실력에서만큼은 막주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만큼 막주의 암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데 그런 막주마저도 암살에 실패할 정도라니!
“어떻게 하죠?”
오살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였다.
콰당!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면이 퉁퉁 부은 자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굴러들어 오는 게 아닌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바짝 엎드려서 기어야지.”
출입구에 낯선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살수들이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웬 놈이냐?”
“엇? 막주… 님?”
“막주님이시다!”
쓰러진 사내를 확인한 살수들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오살과 팔살이 얼른 달려가 막주를 부축했다.
반면 일살은 재빨리 출입구를 향해 암기를 쏘아냈다.
“노옴!”
쒸이이잇!
하지만 그가 날린 암기는 실내로 불쑥 들어선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모두 잡히고 말았다.
“아, 그놈들 참. 무슨 두더지도 아니고. 땅굴을 구석구석 잘도 파고 살았구나.”
사비강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암기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투덜거렸다.
곧 그의 입매에 사악한 미소가 물들었다.
“그럼, 계도를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