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39화 (139/670)

# 139

귀환 마교관

139화

사비강이 들떠서 싱글벙글 웃는 동안, 전태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는 여전히 절반이나 짧아진 벽수풍파도를 보면서 넋이 나간 사람 마냥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등왕패 역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스쳐간 벽수풍파도 파편을 돌아보았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능운파와 구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칼이 저렇게 좋은 거였나?’

능운파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크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다크블레이드를 직접 만져 본 적은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매우 독특하게 생긴 칼이었으므로.

하지만 예상대로 별 볼 일 없는 칼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패용하기도 불편하고, 여타 도검에 비해 특별히 예리한 점도 없었다.

한데 벽수풍파도가 깨졌다.

아니, 잘려 나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순간 사비강이 강기를 이용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분명 눈에 보이는 강기는 없었다.

사비강이나 전태수나 적당히 기를 싣고 칼 겨루기를 했을 수는 있지만, 강기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짝짝짝짝!

마침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물론 맹주의 측근들이었다.

“와아! 대단하군! 정말 보도를 고르셨군요!”

“세상에 저 칼이 저렇게 대단할 줄이야.”

사람들의 술렁임을 들으며 사비강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하. 이거 참.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이런 칼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그러더니 전태수를 돌아보며.

“단주께 감사드립니다. 이 보도를 시험할 기회를 주셔서. 그런데… 단주님의 칼이 잘려 나가서 어떡하죠?”

“아, 괜, 괜찮소. 별로 대단한 칼도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전태수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사비강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렇죠? 하긴 대단한 칼이었다면 그렇게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갈 리가 있었겠습니까? 하하하! 저를 위해서 저자거리의 잡기로 상대해 주셨다니. 감개무량입니다!”

벽수풍파도가 한순간에 저자거리의 잡기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전태수의 입 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파르르 떨렸다.

‘이런 개 같은…!’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간 사비강에게 두 번 망신을 당하는 것.

전태수가 내심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사비강이 다시 한 번 염장을 질렀다.

“듣기로는 평소에 저 칼을 사용했다던데… 단주님의 고강한 무공에 비해 너무 싸구려 칼을 사용하시는 건 아닌지요?”

‘싸, 싸구려…?’

전태수의 눈이 귀신처럼 찢어졌지만,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을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애지중지 해왔던 보도가 저자거리의 잡기 취급에 이어 싸구려 칼이라는 오명까지 덮어썼지만, 그는 애써 웃었다.

“명장은 병장기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소? 하, 하, 하.”

“아아! 과연! 그런 마음가짐으로 저런 형편없는 칼을 사용하신 거였군요. 제가 단주님께 한 수 배웠습니다.”

“그, 그럼 뭐 다행이오.”

전태수의 심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비강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했다.

“어쩐지… 제가 승무각에서 명검이나 보도를 집어들 때마다 뒤에 서 계시던 등 당주님이 탄식을 흘리시더군요. 이제 보니 거기에는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등 당주님.”

돌연 사비강의 화살이 등왕패에게 향했다.

등왕패가 움찔거리고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뭐, 그런 의미요. 험!”

“역시 그렇군요. 정말 감복했습니다!”

사비강이 다시 전태수를 보았다.

“하지만 맹의 요직을 맡고 계시는 만큼 수하들이 보기에 상징적인 보도를 하나 쯤 가지고 계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조직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저런 보잘 것 없는 칼 대신, 제대로 된 보도를 사용하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흥! 그건 사 교관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소! 좋은 칼 잘 구경했소이다!”

전태수가 몸을 휙 돌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사비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면 능운파와 구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몇몇 무인들은 쿡쿡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만 등왕패만은 전태수의 일그러진 표정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은 사비강에게 능운파가 물었다.

“사 교관께서는 이미 훌륭한 검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소. 한데 또 그처럼 보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오?”

“아, 이건 제가 사용할 게 아닙니다. 제가 가르치는 반 생도가 쓸 겁니다.”

“호오, 과연. 생도의 병기까지 직접 챙기시다니. 참으로 자질이 훌륭한 교관이오.”

능운파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흥겨운 자리가 이어졌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자리였겠지만.

**

콰장!

태사의의 일부가 무참히 부서져 나갔다.

자리에 앉은 흑룡 허무극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살기를 풀풀 휘날렸다.

“한심한…!”

장내에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류여중 조차 고개를 쉬이 들지 못했다.

다 된 밥이었다.

젓가락으로 떠먹기만 하면 끝이었다.

한데 밥상이 엎어졌다.

밥상을 엎은 자는 다름 아닌….

‘밥상을 차린 본인이지….’

류여중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진수성찬을 차린 사람도 악천괴였고, 그 밥상을 뒤집어엎은 사람도 그였다.

악천괴는 너무 서둘렀다.

다소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줄은 몰랐다.

그는 현무당주와 함께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돌아왔어야 했다.

한데 자신이 세운 공을 과시하고 싶어 서두른 것이다.

정예라고는 하지만 인원을 백 명으로 축소해 버렸고, 지형이 험난한 지름길을 이용했다.

하긴.

그 시각에 용천관 교관이라는 자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강호에는 소문이 퍼졌다.

용천관 교관이 우연히 관외 수업을 나갔다가 정도맹 핵심 요인들을 구출하고 악천괴까지 죽여 버렸다고.

혈사련으로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소문이었다.

혈사련주 허무극이 류여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소문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예, 확인했습니다.”

류여중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요즘처럼 허무극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말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어떻게 된 건가? 실제로 그 모든 것이 우연이었나?”

“처음에는 그렇게 소문이 났고, 사비강 스스로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만통각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며칠 전 그가 정도맹에서 다른 내용을 얘기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다른 내용이라 함은?”

“그 모든 것이 총군사 구윤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사실인가?”

“실제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총군사 구윤은 호작곡 전투가 있기 전에 사비강 교관을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크음.”

허무극이 침음을 흘리며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결국 자네보다 구윤이 더 낫다는 뜻이군.”

은근한 질책이다.

아니, 어쩌면 대놓고 나무라는 것이다.

류여중은 이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혈사련주는 자신이 악천괴에게 조언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악 당주의 성격이라면 그렇게 서두를 것도 예상했어야 한다는 질책이다.

류여중도 스스로에게 깊은 반성을 한 부분이다.

설마 했다.

그래서 말을 안했다.

하지만 모든 계획에 있어서 설마라는 경우마저 완벽하게 봉쇄해야 하는 것이 군사의 임무라는 걸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른팔 하나를 잃은 기분이구나.”

허무극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악천괴는 그만큼 유능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안타깝다.

그가 류여중을 돌아보았다.

“앞으로의 싸움이 어찌 흐를 것으로 보이는가?”

잠시 뜸을 들인 류여중이 솔직하게 대꾸했다.

“사실… 어렵게 전개될 듯합니다.”

“이유는?”

“이번 일로 인해 본 련은 악 당주를 잃었습니다. 그는 이번 정사대전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정도맹은 악 당주의 이름만으로 두려움에 떨고, 본 련의 무인들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사기가 오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악 당주가 사망한 지금 본 련의 사기는 급락했고, 정도맹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지요. 게다가 이번 일로 정도맹에서는 총군사가 다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총군사 구윤이 직접 나서게 된다면 싸움은 더욱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백호당주 추희룡(秋熙龍)이 평소에 담고 있던 생각을 꺼냈다.

“지금 상태라면 본 련의 세가 많이 확장되었으니, 여기서 정도맹과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주작당과 가까웠던 현무당주가 발끈했다.

“그 말은 여기서 만족하자는 거요?”

“우선은 본 련의 안정을 취하는 데에 집중하자는….”

“안 될 말이오. 앞으로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소. 련주님, 천하일통이 멀지 않았습니다. 모든 세력 싸움은 오 할까지가 힘겨운 법. 그 고지를 넘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순식간입니다! 이 여세를 몰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추희룡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 여세가 지금 꺾이지 않았소?”

“추 당주께서는 처음부터 본 련의 사기를 꺾는 발언만 하지 않았소?”

“난 그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뜻이오.”

“흥! 겁이 많은 거겠지!”

“뭐라? 그럼, 어디 이 겁 많은 칼을 한 번 받아 보시겠소?”

“얼마든지!”

금방이라도 살기를 퍼부으며 싸울 듯한 분위기.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곧 중단됐다.

허무극이 천천히 손을 들어 제지한 탓이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진행해 보도록 하지.”

“명 받들겠습니다.”

류여중이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군사로서의 직감이라면 직감이었다.

‘쉽지 않겠어. 왠지 그런 느낌이야.’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

나흘간 융숭한 대접을 받은 사비강 일행은 즐거운 마음으로 맹을 나섰다.

정도맹에서는 세 사람을 위해 특별히 육두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호화로운 마차에 오른 세 사람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용천관을 향해 출발했다.

초겨울이었지만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멀찍이 산등성이를 하릴없이 바라보던 매설란은 오늘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큰 그림을 그리겠다더니… 이렇게 완성될 줄이야. 아니, 어쩌면 아직도 그리는 중인지도 모르지.’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단숨에 정사대전의 핵심 인물로 올라선 것도 모자라, 총군사의 영향력을 대폭 끌어올렸다.

게다가 등왕패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인사들을 구해 줌으로써 이번 연회에서도 찍소리조차 못하게 만들지 않았나?

‘어쩔 땐 정말 인정하기 어렵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긴 해.’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녀가 사비강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피해 버렸다.

‘뭐야? 왜 눈을 못 보니?’

매설란은 스스로에게 따지듯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역시 좁은 공간에서 자꾸 시선이 부딪치니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묘한 기류를 눈치 챈 당이협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어… 제가 빠져 드리겠습니다.”

“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두 분만의 시간이 필요한 듯해서.”

그러자 매설란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래, 설란 말대로 그냥 여기에 있어.”

“하지만 두 분은 서로 함께 정을 나누신 사이인데, 제가 이렇게 눈치 없이 끼어 있으면….”

“그런 사이 아니라구욧!”

매설란이 빽 소리쳤지만, 사비강은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그건 그렇긴 뭐가 그래요? 전혀 아니라고요!”

“음? 그럼 나하고는 하룻밤의 불장난이었어?”

“도대체 지금 당 교관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오늘따라 날카롭네.”

“익…!”

매설란이 다시 발끈하려다가 심호흡을 했다.

안 된다. 말려들어서는.

이 남자와 이야기하면 항상 이상하게 흘러간다.

결국 매설란은 입을 다물어 버리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아주 잠깐 사비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사비강이 불쑥 말했다.

“난 여기서 내릴 테니, 두 사람은 먼저 용천관으로 돌아가 있도록 해.”

“여기서? 갑자기 왜요?”

“갑자기 볼일이 생겼어.”

사비강이 싱긋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