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귀환 마교관
135화
매설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돌아보았다.
‘저 작자가…!’
기껏 목숨을 구해 주었더니, 은인을 내팽개치고 떠나자는 말을 어쩌면 저리 뻔뻔하게 꺼낼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한 마디 거세게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내심 꾹꾹 눌러 참으며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한편, 석지평은 자기 말에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자, 자존심이 상해서 더욱 큰 목소리로 생도들에게 외쳤다.
“너희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우리를 부축해서 여길 벗어나도록 해라! 너희들의 임무는 우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것 아니었느냐?”
그러자 연우경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무뚝뚝하게 말을 뱉어냈다.
“우린 여기서 교관님을 기다릴 겁니다.”
“뭣이?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냐? 너희들이 여기서 기다린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줄 아느냐? 설마 저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하니 분할 뿐입니다.”
“그래도 주제를 아니까 다행이구나. 하지만 더 현명해져야겠다. 지금 너희들이 여기서 기다린다고 해서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거참, 종알종알 시끄럽네!”
불쑥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곡보옥이었다.
석지평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뭐라? 감히 지금 내게 뭐라고 한 것이냐?”
“어차피 선배들께서는 우리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좀 기다려 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자 지켜만 보던 추의단주 사자룡이 불쑥 나서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노옴! 어린 것이 주둥이가 험하게 여물었구나! 네놈들은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리 무례하게 구느냐?”
“알지요. 혈사련 포로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구해 준 것 아닙니까?”
“이놈이…!”
사자룡이 입매를 씰룩이며 곡보옥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공을 소모한 직후 이틀 가까이 공진철에 구속되어 있던 그들이었다.
기력이 쇄할 대로 쇄한 상태였기에 한낱 생도들에게도 맞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들로서는 사비강이 이대로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아니, 사비강만 죽게 된다면 악천괴가 쫓아올 테니, 두 사람이 동귀어진하기를 내심 바랐다.
그렇게만 되면 사비강에게 적어 준 마음의 소리 따위는 평생 잊고 살아도 될 테니까.
거기에는 사비강이 불러 준 말도 안 되는 문구들과 함께 자신들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온갖 악행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석지평이 다시 한 걸음 나서며 소리쳤다.
“자,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도록 하자. 지금이라도 우리를 부축해서 여길 벗어나면 무례를 용서해 주….”
“안 간다고요.”
“우린 교관님을 기다릴 거예요.”
“여기서 교관님이 올 때까지 절대로 안 움직일 겁니다.”
생도들이 너도나도 나서며 한 마디씩 쏟아냈다.
석지평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더니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오호라. 이제 보니 네놈들 그때 그 특목반 녀석들이군. 어쩐지 행실이 불량하다 싶었지. 가만! 혹시 네놈들… 혈사련과 내통한 게 아니냐? 그러고 보니, 마침 여기로 관외 수업을 왔다는 것부터가 수상한….”
“이런 씨벌! 기껏 구해 주었더니 뭐가 어쩌고…!”
결국 참다못한 곡보옥이 욕지거리를 쏟아내는데.
탁.
단리정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더니 그가 석지평에게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단리정이 석지평에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리 사죄드립니다.”
“그래야지. 잘못을 했으면 미리… 음? 미리라니?”
찰나.
퍼억!
쿠당탕탕!
단리정의 주먹이 석지평의 안면에 날아가 꽂히는 게 아닌가?
졸지에 주먹을 얻어맞은 석지평이 들판을 마구 구르며 저만치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기력이 쇄한 탓이었는지, 석지평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버렸다.
정도맹 요인들은 물론, 생도들마저 놀라서 멍한 표정으로 단리정을 바라보았다.
당이협과 매설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온화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단리정이 아니던가?
한데 느닷없이 주먹질을 할 줄이야!
단리정이 손을 탁탁 털어내며 다른 정도맹 인사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사비강 교관님의 인솔 하에 움직이는 생도들입니다. 교관님이 돌아오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리 아십시오.”
사람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단리정을 보았다.
조용하지만 어딘지 모를 압력이 느껴지는 목소리.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멈칫한 그가 다시 말했다.
“정 떠나고 싶은 분은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아무도 붙잡진 않을 테니까요.”
“끄음.”
추의단주 사자룡이 침음을 흘리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한편, 목단화는 그런 단리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쟤… 내가 괴롭히던 그 애 맞아?’
**
쩌엉! 쩡!
쒸에에에엑!
꽈앙!
연신 폭음과 같은 소음이 터졌고, 빛줄기가 여기저기에서 번쩍거렸다.
협곡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협곡 사이에 죽음의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생겨났고, 그때마다 천지가 격동했다.
“노오오옴!”
악천괴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사비강을 노려보며 악귀처럼 소리쳤다.
“하아앗!”
사비강 역시 전에 없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전력으로 부딪쳐 갔다.
꽈앙! 꽝!
휘몰아치는 기의 폭풍 속에서 두 사람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도저히 인간의 싸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장엄하고도 격렬한 전투.
그리고 마침내.
툭!
팽팽한 균형이 깨진 것은 어이없게도 자갈돌 하나 때문이었다.
기풍에 휩쓸린 자갈돌이 악천괴의 팔꿈치를 때린 것이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 한 올 차이만큼 작은 틈이 그에게 생겨났다.
고수들의 영역에서 그러한 빈틈은 생사를 가를 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법.
쉬이이이잇!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휘둘러 그 빈틈을 노려갔다.
찰나, 악천괴의 눈이 빛을 반짝 뿜었다.
‘걸렸다!’
사실, 그 빈틈은 진짜가 아니었다.
팽팽한 균형을 깨트리기 위한 허수!
악천괴가 몸을 휘리릭 회전시키더니 옆구리로 날아드는 베르타스 검신을 콱 움켜쥐었다.
꽈득!
지금껏 그가 싸운 방식을 미루어 보면 이는 굉장히 뜻밖의 행동이었다.
베르타스가 기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로, 그는 검신을 움켜쥐는 대신 줄곧 튕겨 내기만 했기에.
그런데 이번에는 작정이라도 한 듯 검신을 콱 움켜쥔 것이다.
악천괴의 손아귀에 핏물이 베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대로 베르타스를 쥔 채 몸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사비강의 몸이 훅 딸려왔다.
찰나.
슈우우우웃!
맹금과 같은 악천괴의 손아귀가 사비강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과악!
“크읍!”
사비강이 미간을 팍 구기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침내 악천괴가 입매를 찢었다.
“크흐흐흐! 네놈의 기력을 내가 좀 먹어 주마!”
순간 악천괴의 손이 시커멓게 물들면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사비강의 가슴팍에 깊숙이 파묻혀 갔다.
맹휘에게 사용했던 흡기조공이었다.
스으으으읏!
악천괴의 손을 타고 사비강의 내력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됐다! 됐어! 이걸로 네놈의 완전한 패배다! 네놈의 정체가 뭔진 몰라도 이걸로 본좌가… 음?”
앙천광소를 터뜨리던 악천괴가 흠칫거리고는 사비강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자신의 손을 지나 팔과 몸으로 향했다.
‘이게 어떻게 된…!’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이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조소를 지었다.
“크크크. 왜 그러나? 그렇게 좋으면 좀 더 가져가라고.”
“너, 너 이놈! 대체 무슨 짓을…!”
악천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흡기조공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의 내공이 어떤 형태이든 흡수해서 소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극양이나 극음이어도 상관없었다.
흡기조공을 통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오면 그것은 곧 귀살조공으로 승화가 된다.
물론, 이렇게 흡수한 내력은 두 시진 안에 모두 소멸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런 전투에서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되곤 했다.
한데 이건…!
‘내공이 아니잖아!’
그럼에도 혈맥을 따라 흡수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악천괴가 얼른 손을 놓고 물러나려는데.
탁!
사비강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귀신처럼 입매를 찢었다.
“크크크. 더 가져가라니까. 사양하지 말고.”
“크익! 이것 놔라악!”
“그렇게는 안 되지.”
사비강은 의식적으로 악천괴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어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력이 아니라 마나였다.
생전 다뤄 본 적이 없던 마나가 악천괴의 몸속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악천괴는 얼른 운기를 시도했지만,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전에 쌓이지도 않는 마나를 운기로 다스리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다.
게다가 그의 몸에 흘러들어간 마나는 사비강의 뜻대로 설치고 있었다.
“끄으으윽! 크헙! 쿨럭!”
마침내 악천괴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의 전신 혈맥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는 듯했다.
“끄이이이익! 이것… 놔… 라!”
악천괴가 안간힘을 쓰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미 몸속에 들어온 마나가 미친 듯이 휘젓고 다녔기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루룩.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곧이어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푸우우우우우웁!”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토해져 나왔다.
털썩!
마침내 악천괴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야 그의 손이 사비강의 가슴에서 뽑혀 나왔다.
사비강의 가슴에는 흡기조공에 당한 탓에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악천괴가 숨을 쉭쉭 몰아쉬며 힘겹게 물었다.
“네놈… 설마 이걸 위해서 흡기조공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던… 거냐?”
“그게… 가장 확실히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비강 역시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그가 천천히 베르타스를 들어올렸다.
악천괴가 사비강을 올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죽일 거냐?”
“당연히.”
“크크. 내게도 이런 날이 다 오는군.”
“기회주의자인 네놈은 상상하지 못한 날이었겠지.”
“흥! 나는 그저 보다 강한 자에게 언제나 힘을 보탤 뿐이다!”
“그 가볍디가벼운 충성심 때문에 수많은 강호인이 죽게 되지.”
“크크크. 아까부터 의미 모를 소리만 지껄이는군.”
“하나만 묻지. 네놈은 앞으로도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면 그쪽에 힘을 보탤 거냐?”
“크크크. 죽을 사람에게 별 걸 다 묻는구나. 그야 당연하지! 나는 언제나 내 목숨을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에게만 붙을 테니까! 크크크!”
사비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상했던 대로다.
악천괴는 이런 인간이다.
“역시 넌 죽어 줘야겠다. 강호를 위해서.”
다음 순간.
쒸에에에엑!
사비강이 마지막 남은 한 줌의 공력을 모두 쏟아 부어 베르타스를 내리쳤다.
서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