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귀환 마교관
133화
석지평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필 왜 이런 놈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너무 당황해서일까?
머릿속에만 담아 두어야 할 생각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네, 네놈… 아니, 당신은 용천관 교관 아니오? 어째서 여기에…?”
“아아, 높으신 양반이 기억해 줘서 고맙소. 뭐, 지금 그 모습은 별로 높아 보이진 않지만.”
어딘지 빈정거리는 말투에 석지평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사비강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우연이오, 우연. 생도들을 이끌고 관외 수업 중이었소. 마침 이 지형이 흥미로워서 지형지물에 관한 수업을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혈사련 무인들이 접근해 오는 것 아니겠소? 게다가 자세히 보니 사람들을 철창에 가두고 이동하는 게 보였지.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급습하기로 결정했소. 내 생도들이지만 녀석들의 그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석지평은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찌 됐건 혈사련 무인들이 당한 이상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그랬군! 어쨌든 고맙소! 사실 우리는 호작곡에서 혈사련과 대전 중이었소. 하지만 녀석들의 비열한 수단에 당하고 말았지.”
사실 그저 작전에 실패한 것뿐이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렇게라도 변명을 해야 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소. 이곳에는 지금 나뿐만 아니라 천안각주님과 정검단주님, 추의단주님이 공진철에 구속되어 있소. 그 외에도 본맹의 대주들이 여럿 갇혀 있소. 그러니 어서 우리를 풀어 주시오. 내 그대들의 공로는 절대 잊지 않고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겠소.”
석지평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한데 사비강이 가만히 침음을 흘리며 턱을 매만지는 것이 아닌가?
“흐음.”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으음. 잠시 고민 중이오.”
“고민? 무슨 고민을? 아니, 그보다 어서 이 철창에서 우리를 꺼내 달라니까.”
“그게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라서….”
“왜 그렇소? 설마 열쇠가 없는 거요?”
“아, 열쇠라면 있소. 여기.”
사비강이 열쇠 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방금 쓰러뜨린 사내의 품에서 꺼낸 것이다.
석지평이 철창을 쥐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사비강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 그게 좀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인데….”
“말해 보시오. 뭐든.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돕겠소.”
“음… 사실 이건 관칙에 위배되니까 말이오.”
“관칙?”
“그렇소. 사실 지난번에 내가 춘향제에서 생도들을 위험에 빠뜨려서 징계를 먹지 않았소? 아마 원리원칙을 매우 중시하는 천랑단주께서 직접 건의하신 걸로 아오만.”
석지평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놈!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이런 상황에서 꺼내다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사비강을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
적어도 지금은 사비강이 자신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그 일은 안타깝게 됐소. 유감이오.”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이번에도 우리가 단주님을 구하게 되면 징계를 받지 않을까 해서 말이오. 생도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그럴 리가 있겠소? 오히려 은인처럼 여길 거요!”
“흐음.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뒷간에 가기 전 마음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다른 법 아니겠소?”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겠소? 이럴 시간이 없소! 어서 날 구해 주시오. 오히려 우릴 구해 주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불의한 행동에 대해 지탄하게 될 거요!”
“음. 그건 협박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우리가 구해 주지 않고 모른 척하면 이후에 단주께서는 혈사련으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할 테니까….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긴 쉽지 않을 텐데.”
사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석지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 녀석! 진심이다! 진짜로 우릴 모른 척할 생각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은 혈사련 세력이 더 가까운 땅이다.
그런 만큼 이대로 사비강이 못 본 척 돌아가 버린다면, 살아서 맹으로 돌아가기란 요원해지리라.
석지평이 다시 창살을 콱 움켜쥐고 소리쳤다.
“날 믿어 주시오! 내 반드시 교관과 생도들의 공로를 치하하도록 보고하겠소!”
“흐음.”
사비강이 턱을 괴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석지평이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어서 날 구해 달란 말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탈출하자마자 사비강을 단숨에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석지평을 보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말이오?”
“이럴 때 우리가 쓰는 방법이 있소.”
“무슨 방법이….”
사비강이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불쑥 내밀었다.
“마음의 소리라고…. 혈서 한 장을 써주면 좋겠소.”
“마음의 소리?”
“뭐, 말 그대로 석 단주의 마음에서 우러난 소리를 혈서로 작성하는 거요. 대략의 내용은 앞으로 내가 뜻하는 바에 협조하겠다는 각서 같은 것이랄까? 물론 나만 보관할 것이고, 약조가 지켜지지 않을 때는 그 혈서를 만천하에 공개하게 될 거요.”
석지평의 입매가 씰룩였다.
이거야말로 여차하면 협박용 패를 하나 마련해 두겠다는 뜻이 아닌가.
석지평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을 본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돌아섰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니, 우린 이대로 돌아가는 걸로….”
“잠깐! 기다리시오. 쓰겠소! 쓰면 되지 않소?”
“잘 생각하셨소.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철창 사이로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미간을 찡그리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으으. 이게 무슨 냄새요? 혹시 오줌 싸셨소?”
“이익…! 아니오!”
“그럼, 지리셨소?”
“그게 아니라니까!”
“지린내가 심한데….”
석지평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가만히 눌러 참으며 손가락을 깨물었다.
“뭐라고 쓰면 되겠소?”
“아, 그럼 시작합시다. 첫째, 나 석지평은 사비강 교관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잠시 멈칫 거린 석지평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글을 적기 시작했다.
**
사비강이 흡족한 표정으로 종이 뭉치를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천랑단주 석지평뿐만 아니라, 이사흠과 정검단주 그리고 추의단주까지 마음의 소리를 적게 했다.
거기에는 그들 각각의 치부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혈서들이 있는 이상 그들이 앞으로는 함부로 설치지 못하리라.
품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정도맹의 요인들이니 더욱 몸가짐을 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비강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자, 지금부터 신속하게 구출 작전을 시작한다. 공진철에 구속된 자들을 최대한 안전하게 구출하여 이동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앞에 모여 있던 생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흩어졌다.
그래도 혈사련 비밀 분타에서 실전 경험을 한 번 해서인지, 생도들은 일사분란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당이협과 매설란이 전반적으로 생도들을 통솔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무척 탄탄한 조직력을 보이고 있었다.
공진철에 구속된 자들은 모두 십여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후미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은 월랑대주(月浪隊主) 맹휘(孟輝)였다.
철컹!
철창이 열리자 곡보옥이 든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오십시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맙다. 너희들에게 받은 은혜는 내 절대 잊지 않으마.”
맹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는 호협당에서 월랑대를 이끌었는데, 호협당주 장초신이 악천괴의 손에 허망하게 죽는 것을 보고는 모든 희망을 버린 터였다.
‘하나밖에 없는 어린 딸도 다시 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던 차에 생도들이 나타나 구해 준 것이다.
곡보옥은 씨익 웃어 보이고는 맹휘를 부축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후미에 있다 보니 자연히 제일 뒤처지게 됐다.
그렇게 비탈길 절반 정도를 올랐을까?
구궁. 쿠구구궁.
등 뒤에서 잔잔한 진동이 일어나면서 육중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곡보옥이 멈칫하고 돌아보는데.
콰콰콰콰아앙!
협곡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던 바위 더미가 갑자기 터져 나가더니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이놈들! 어딜 가느냐!”
그림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협곡에 쩌렁쩌렁 울려댔다.
악천괴였다.
곧이어 그가 허공답보를 펼치더니 가장 뒤처져 있던 곡보옥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헙!”
당황한 곡보옥이 얼른 맹휘의 앞을 막아섰다.
“까불지 마라!”
순간 악천괴가 일갈을 터뜨리더니 손을 불쑥 뻗었다.
곡보옥이 반사적으로 양팔을 교차했다.
퍼엉!
“크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곡보옥의 몸이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곡보옥이 양팔에 착용한 철인구가 아니었다면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져 죽었으리라.
악천괴는 그대로 손을 뻗어 맹휘의 등을 찍었다.
콰직!
“크아아아악!”
악천괴의 손등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맹휘의 등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렇잖아도 얼마 남지 않았던 기력이 모두 악천괴의 손에 빨리면서 맹휘의 피부는 거무죽죽하게 변해 버렸다.
흡기조공(吸氣爪功).
귀살조공에 내력을 빨아들이는 마공을 조합하여 창안한 사공이었다.
마침내 맹휘는 전신이 마른 장작처럼 변해 버렸다.
악천괴가 아무렇게나 부리자, 그의 몸이 종이뭉치처럼 협곡 아래로 휙 떨어졌다.
이를 본 생도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저, 저자가 아직 죽지 않았어!”
“서둘러! 고수다!”
악천괴가 고개를 꺾어 들고는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놈들! 순순히 내손에서 벗어날 줄 아느냐!”
공력을 담은 목소리에 생도들과 포로들이 비탈길에 겨우 매달려 비틀거렸다.
악천괴가 다시 몸을 부웅 날리는 순간이었다.
쒸아아아아앙!
어디선가 날아든 검 한 자루.
퍼억!
악천괴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검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내 손을 베?’
귀살조공을 익힌 손이다.
평범한 사람 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손은 하나의 무기나 진배없다.
때문에 거침없이 검신을 움켜쥔 것이다.
한데 베였다.
피를 보았다.
그 말은 자신에게 날아든 이 요상한 검이 엄청난 기물이라는 뜻.
악천괴가 훌쩍 물러나면서 검을 놓아 버렸다.
그러자 허공을 한 차례 선회한 검이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바위 위에 우뚝 올라 선 악천괴가 눈살을 찌푸렸다.
“웬 놈이냐?”
“베르타스를 손으로 막아내다니, 제법이군.”
사비강이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씨익 웃었다.
그가 비탈길을 오르는 생도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내게 맡기고 포로들을 안전하게 구출하도록.”
“예, 교관님!”
생도들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비탈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